눈이 유난히도 모질게 몰아치는 날.

그 사람이 왔던 날도 마치 오늘 같았다.

그리고 내가 처음 이곳에 왔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칼만 쓰고 칼만 알고 칼을 위해 살던 시절.

만약 그때 칼에 베여 쓰러지지 않았다면, 오카미상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름도 모르는 전장에서 이름도 모르는 시체로 굴러다니지 않았을까.

“오늘 떠나는 거니?”

설녀여관 창고.

어깨 갑주까지 모두 끼고 나서 짐을 확인하는데 오카미상이 조용히 뒤로 다가와 말을 건다.

“날도 궂은데 해 뜨면 가지 그러니.”

“아니에요.”

오늘이 아니면 영원히 출발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이런 날에 절 찾아왔듯, 저도 이런 날에 그 사람을 찾아 가야죠..”

“음식도 다 챙겼고?”

“네.”

짐이 든 가방을 어깨에 둘러맨 뒤 일어나 몸을 돌린다.

“어쩜, 처음 왔을 때처럼 늠름한 모습이구나.”

“평소에 조금이라도 운동 해두길 잘 한 것 같아요.”

예전처럼 갑옷이 가볍지는 않아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마음 다스리려고 매일 칼 갈던 것도 다행이고요.”

“그래. 정말 세상일이라는 게 참 신기하구나.”

나도 이렇게 다시 갑옷을 입고 칼을 들 줄은 몰랐다.

과거는 완전히 잊고 여관 종업원으로만 살 줄 알았는데.

“짐은 마을에 줄 식비랑 같이 따로 보낼 테니까 칼만 챙겨서 내려가렴.”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괜찮아. 그 사람과 만나기 전부터 지치면 안 되잖니.”

“그래도 이렇게 폐만 끼쳐서는······.”

“폐라니. 정말 폐라고 생각하면 나중에 돌아와서 갚으렴.”

“네?”

오카미상이 방에 놓고 왔던 메이드캡을 다시 머리에 씌워준다.

“그래. 한 며칠만 봉급 안 받으면 되겠구나. 그렇지?”

“그······.”

옛날 같으면 별 의미 없는 말이라 치부하고 넘겼을 텐데, 여기서 지내면서 어느새 많이 여려진 걸까.

아니,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변해가는 걸까.

벽장에 감춰뒀던 칼을 꺼낸다.

어제 밤에도 계속 숫돌에 갈아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도 쪼개지 않을까 싶다.

자잘한 나이프까지 갑옷 속에 숨기고 나서 나가려고 하자 오카미상은 말없이 비켜준다.

“정말, 날이 맑아지고 나서 내려가면 좋을 텐데.”

그 말대로 눈발이 조금 약해지기는 했지만, 하늘은 아직도 잿빛이다.

오카미상이 마치 자식을 걱정하듯, 나도 반항하는 자식처럼 눈발을 헤치고 몇 발짝 걸어본다.

“오카미상. 이만 갈게요.”

“다른 애들은 정말, 뭘 하기에 마중도 안 나오는 걸까.”

만약 내가 저지른 짓을 안다면,

“그러고 보니 요즘 잘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처럼 이렇게 날 걱정해주실까?

그리고 그 사람도 그때 했던 말처럼 날 계속 사랑해줄까?

마음 약해지기 전에 출발하려고 억지로 발을 크게 내딛는데 뒤에서 오카미상이 부른다.

“코유키.”

죽을 뻔했던 나를 구해주고 길러줬던 그 목소리에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칼까지 내리고 잠시 멈춘다.

그 사이에 이미 눈이 발자욱을 채운다.

“코유키.”

오카미상이 다시 부르고 그제야 몸을 돌린다.

허리만 돌리지 않고 제대로 마주 본다.






“네.”

“네가 산을 내려가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벌이든,”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오카미상을 본다.

속으로만 우는 걸로 충분하니까.

“그 메이드캡을 쓰고 있는 한, 여기는 네 집이고 넌 우리 여관의 종업원이란다.”

그래도 무뚝뚝하게 이별할 수는 없다.

영원한 이별이든, 잠시의 이별이든,

“네.”

미소로 화답한다.

“다녀올게요.”

“그래.”

이제 정말 눈밭을 헤치고 산을 내려간다.

정말 긴 시간이었다.

‘오갸쿠사마.’

기나긴 모멸과 핍박의 시간.

‘지금 찾아갈게요.’

검성 코유키로 돌아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