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토눌라의 난 篇:

프롤로그 1화 2화 3화 4화 5화 6화 7화 8화 9화 10화 11화 12화 13화


산트릴랑의 결심 篇:

14화 15화 16화 17화 18화 19화 20화 21화 22화(🔞) 23화



사냥꾼 부부는 동시에 잠에서 깨어나, 자기들은 침대에 가로로 누웠고 수녀는 밤새 기도했는데도 일찍 일어났는지 집 밖에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과연 그는 대야에 물을 떠 와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아, 일어나셨나요? 막 아침 기도를 마쳤는데 할 일이 없어서, 마침 빨래가 밀리신 것 같기에 손 좀 보태고 있었습니다."


그걸 본 부부는 경악했다. 꿈에서 아버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도레다보르가 재빨리 나와 수녀를 말리며 말했다.


"수녀님! 손님에게 집안일을 시킬 순 없습니다. 부디 침대에서 쉬어 주십시오. 빨래는 제가 하겠소!"


부부는 그날 내내 산트릴랑에게 충분한 휴식과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극진한 대접을 마련해 주었다. 덕분에 수녀는 침대 위를 벗어나지 못했고, 밥과 대소변까지 침대에서 사냥꾼 아내의 수발을 받으며 해결했다. 그래서 저녁이 되자 그 연유를 알기 위해 두 사람에게 솔직한 답변을 요구했고, 사냥꾼은 꿈 속에서 아버지가 수녀를 극진히 대접하라고 당부했단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산트릴랑은 웃으며 말했다.


"천국은 하느님의 형제와 친구가 가는 곳이고, 하느님의 형제와 친구는 하느님께 베풀고 나누는 이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앞에 나타나실 때, 거룩한 사명을 지닌 수도자의 모습이 아닌, 우리의 이웃 중에서 가장 헐벗고 굶주린 이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니 천국으로 가시려면, 오늘과 같은 대접은 제가 아닌 두 분의 가난한 이웃에게 하세요. 저는 내일 산을 내려갈 때까지 남편분께서 호위만 해 주신다면 만족합니다."


이에 부부는 쑥쓰러워서 동시에 머리를 긁었다. 다음 날이 되자 아도레다보르는 산트릴랑의 요청대로 그를 호위하며 짐승과 괴물이 다니지 않는 길로 안내했고, 그 덕에 수녀는 들판과 계곡과 산길을 걷는 동안 한 번도 습격을 받지 않았다. 다만 몸을 사라며 다니다 보니 길을 조금 돌아야 했고, 그르노블과 토리노 사이의 거리 한가운데에 있는 사냥꾼의 집을 기준으로 삼으면 목적지인 토리노에서 더욱 멀어진 꼴이 되었다. 사냥꾼은 사과했지만, 산트릴랑은 죽어서 쓰러져 있는 것보단 살아서 걷는 게 낫다며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꽤 지나서, 두 사람은 몽블랑 산 중턱에 깔린 다듬어진 내리막길에 다다랐다.


"수녀님, 이 길은 헬비티족부르군트족이 관리하기에 랑고바르드 사람들이 다 군대로 끌려갔어도 토리노까지는 습격 걱정 없이 다닐 수 있소. 다만 이 너머는 저에게 익숙한 땅이 아니라서, 어떤 짐승이나 괴물, 또는 도적이 나와도 노련하게 대응할 수 없겠소그려."


아도레다보르가 송구하여 자세를 낮추며 말하니, 산트릴랑은 손을 모으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무사했던 게 형제님 덕인데, 이 이상을 바라는 것은 탐욕이겠지요. 토리노 다음 길에서는 어떻게든 해 볼테니, 형제님은 가정으로 돌아가세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산트릴랑은 손을 떨고 있었고, 눈가는 축축했다. 이전과 같은 봉변을 또 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도레다보르에게는 그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으므로 수녀의 생떼로 함부로 먼 길로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냥꾼 또한 이를 잘 알았기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그저 등에 지고 있었던 식량과 짐을 내어 주었다. 그때였다.


"수도자여! 스승이여!"


어디선가 약간 낮은 여자 목소리가 수도자를 부르니, 산트릴랑은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승이여! 이쪽이요!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이쪽으로 와 주시오!"


목소리는 다급하게 수도자를 찾았다. 산트릴랑은 두려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답변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수도자를 찾는다면, 당신이 나에게 오십시오! 나는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럴 수가 없소! 나는 당신이 선 쪽에서 길 건너편 덤불 너머 세로로 깎인 바위들 사이 황소 길이 두 배만한 둥근 돌덩이에 있소! 일단 오기나 하시오!"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오자, 산트릴랑은 난감하여 우물쭈물하였다. 이때 이를 지켜보던 아도레다보르가 수녀를 달래며 말했다.


"세로로 깎인 바위들 사이 황소 길이 두 배만한 둥근 돌덩이라면, 분명 하드리아누스의 바위일거요. 여기 사는 사람들은 어릴 때 적어도 한 번은 들었을 오래된 이야기요. 오백 년쯤 전, 로마 황제가 하드리아누스이던 시절에, 저 목소리가 말한 길 건너편에 바위가 하늘에서 떨어졌다지 뭐요. 그 바위에는 똥색 가죽에 오줌색 털이 자란 머리가 박혔는데, 혓바닥과 같은 색인 눈이 달리고, 뒷골이 머리통 절반만큼이나 길어서 흉측하기 그지없소. 그래서 그 주변을 지난 사람들이 모두 그걸 보고는 '하느님께 죄 지어서 벌 받은 악마인가 보다' 하고 손가락질 한 번씩 하고 갑니다그려. 그래도 그 바위가 사람을 해친다는 말은 들은 적 없으니, 안심하고 들러 보시지요."


산트릴랑은 사냥꾼의 말을 믿고 살피러 가기로 결심했다. 그 말대로 그곳에는 아무리 봐도 사람의 몰골이 아닌 것이 주변에 풀과 이끼가 자라 미리 전해 들은 것이 없었다면 기절했을 꼬라지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 얼굴 모양이 입이 달렸다고 자꾸 말을 거는 것이었다.



"아유, 드디어 왔구만! 이봐, 스승이여! 어서 나를 꺼내 주시오! 어서!"


아도레다보르도 그걸 보고 크게 놀라 자기도 모르게 말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동안 하드리아누스의 바위는 얼굴을 달아 놓고 정면만 응시할 뿐 말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와, 저 똥색 얼굴이 말을 할 줄 알았네."


그 말을 들은 얼굴이 울컥해서는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네 이놈! 아까부터 말을 참 예쁘게도 하는구나! 나 베르토눌라는 이 산맥에 있었던 모든 일을 들을 수 있고, 네놈이 신세 한탄하거나 나를 비웃는 것도 다 들었다! 이 몸은 우라노스의 잘린 양물에 남아 있던 마지막 정액 한 방울이 우연히 가이아의 음부에 닿아 생긴 작은 바위 방울을 깨고 태어나, 살갖은 기름진 열매가 열리는 흙과 같이 검붉고 머리카락은 일출 빛이 땅에 맞닿을 때와 같이 노랗고 밝은 빛을 띠는 절세미인으로서, 외모가 출중할 뿐 아니라 힘과 지혜까지 우수하여 딤랑(Dimlang) 산의 왕이 되어 아름다운 자원(雌猿)왕이란 뜻인 풀크라무타(Pulchramuta)를 존호로 삼고 삼백 년 넘게 군림한 미녀 영웅여왕이란 말이다! 네놈에게 조롱받아도 될 몸이 아니란 말이야!"


사냥꾼은 빈정거리며 응수했다.


"풀과 이끼에 싸여 더러운 면상이 스스로 미녀라고 두 번씩이나 말하는구만. 이봐, 하드리아누스의 바위야. 네가 진짜 신의 자식이고 딜롱...이란 곳의 왕이라면 오백 년씩을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힘을 쓰든지 부하를 시키든지 해서 그 바위를 알아서 깨고 나왔어야지."


베르토눌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버둥거리며 악을 썼다.


"이놈이! 다리 저는 졸장의 자식놈이! 내 이걸 깨고 나오면 네 늙은 어미와 아내를 먼저 죽여 주마! 으아악!!"


그걸 들은 아도레다보르는 콧방귀를 한 번 뀌고는 이상한 춤을 추며 대꾸했다.


"난 졸장의 자식이고 다리도 다쳤지만 나머지 부위는 자유롭게 움직이고, 세상 어디든 내 의지대로 갈 수 있으며, 죽으면 내게 슬픔을 안겨 줄 어머니와 아내도 있지만, 넌 신의 자식인데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 바위 밖을 나설 수도 없으며, 어미도, 배우자도, 하다못해 말동무 돼 줄 사람도 곁에 없으니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대체..."


사냥꾼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산트릴랑이 듣다 못해 입을 막으며 그를 말렸기 때문이다.


"그만, 그만하십시오! 천국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런 심한 말을 내뱉으면 안 됩니다! 이 자에 한때 무슨 일이 있었든, 굳이 나를 찾은 걸 보면 내가 있어야 저 바위를 깰 수 있는 듯한데, 남의 어려운 사정을 두고 놀리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 아닙니다. 어서 이 자에게 용서를 구하시고, 얼굴 주변의 풀과 이끼를 치워 주세요."


수녀는 곧 베르토눌라에게도 말했다.


"당신, 이름을 베르토눌라라고 했던가요? 우선 이 형제의 죄를 용서하시고, 거기서 나와도 이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그 다음에 당신의 말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갇힌 이는 어쩔 수 없이 그러겠다 했고, 사냥꾼도 수녀의 말을 듣고 그에게 용서를 청하며 풀과 이끼를 치워 주었다. 주변이 깨끗해져 두상이 온전히 드러나자, 베르토눌라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소개를 하자면, 나는 한때 로마 공화국을 떨게 했던 피로스 1세가 아르고스 전쟁에서 쇠할 적에, 그 뒤를 이어 로마의 칼 아래 스러질 카르타고에서 더 남쪽으로 가면 나오는 거대한 사막, 거대한 사막 너머 야만인의 낙원인 딤랑(Dimlang) 산의 기이한 과일이 나는 곳에서, 우라노스의 잘린 양물에 남아 있던 마지막 정액 한 방울이 우연히 가이아의 음부에 닿아 생긴 작은 바위 방울을 깨고 태어나 그곳 사람들의 추대를 받고 왕이 되었지만, 죽음의 마수를 떨치지 못하여 마법을 배우고 강력한 괴수들과 자매의 연을 맺며 끝내 제우스의 인정을 받아..."


갇힌 이가 이때부터 말끝을 조금씩 흐렸다.


"음... 황금 사과의 수호자가 되었다가... 약간 사고가 있어서 파직이 되고... 그때 좀 울컥해서 올림푸스에서... 작은 소동을 일으키고... 그랬더니 신들이 나자렛의 예수란 자를 데려와서... 지금 이렇게 갇힌 것이올시다."


"오, 죄 지어서 벌 받은 악마란 소문이 사실..."


아도레다보르가 무심코 감탄하여 말을 뱉자 산트릴랑이 또 입을 막으며 그를 제지했다. 갇힌 이가 다시 소개를 계속했다.


"어쨌든, 그렇게 벌을 받은 게 벌써 오백 년 전인데, 어젯밤에 그 나자렛의 예수의 어머니란 여자가 와서는 뭐, 주님의 구원 소식을 온 누리에 전하기 위한 대업이 시작되었고, 그 대업에 참여한다면 망뜨란 곳에서 온 수도하는 여자가 나를 이 바위에서 꺼내 줄 테고, 바위에서 나오면 그 여자를 스승으로 삼으라 했소. 듣자 하니 당신은 '수녀'라는 직함을 가진 듯한데, 그 수녀란 게 수도하는 여자를 뜻하는 거라면, 그리고 당신이 망뜨 사람이라면 나를 좀 여기서 꺼내 주시오!"


그러자 산트릴랑은 난감하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매님, 당신 말대로 나는 수도를 하는 망뜨 여자입니다. 하지만 저는 힘이 세지도 않고, 바위를 깰 수 있는 망치나 끌 같은 도구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이에 베르토눌라가 대답했다.


"도구 따위는 필요없소. 바위 윗부분에 적힌 글귀만 읽으면 이것이 스스로 깨질 거랬소."


산트릴랑이 살펴 보니, 그 말대로 바위 윗부분에 글씨 일부가 보였다. 그러나 수녀의 눈은 바위 아래쪽에 있었기에 글씨의 나머지 부분은 읽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도레다보르가 어깨로 산트릴랑의 발을 받친 채 일어서서 겨우 확인했는데, 수녀가 읽은 글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임마누엘(עִמָּנוּאֵ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