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토눌라의 난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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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트릴랑의 결심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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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트릴랑이 그 여섯 글자로 된 한 단어를 말하자,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 거대한 바위에도 조금씩 금이 갔다. 사냥꾼은 이상한 깜새를 눈치채고 수녀에게 빨리 내려오라고 외친 뒤, 수녀가 정말로 내려오자 그 손목을 붙잡고 빠르게 물러났다. 


"콰과광!!"


이윽고, 바위와 그 뒤의 절벽이 산산조각이 나고, 거기 갇혀 있던 자가 호탕하게 한 번 웃고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흐하하! 드디어 풀려났다! 오백 년만에 손발을 움직이는구나!"


수녀와 사냥꾼은 절벽이 무너지는 소리에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베르토눌라는 순식간에 그들 앞으로 이동하여 양손으로 각각 두 사람을 일으켜 세운 뒤, 산트릴랑을 향해 왼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나를 풀어 줘서 고맙소, 수도자여. 약속대로 당신을 스승으로 삼으리니, 알려줄게 있으면 속히 가르쳐 주시오."


그 직후, 베르토눌라는 아도레다보르에게도 옛 제국의 예를 갖추며 말했다.


"스승을 이곳으로 데려와 주고, 내 얼굴 주변의 풀과 이끼를 치워 줘서 고맙소. 오백 년 동안 나에게 이런 친절을 베푼 이는 당신뿐이었소. 예수가 말한 천국은 당신과 같은 자들을 위한 곳이 틀림없소."


아도레다보르는 베르토눌라가 자신에게 하는 인사를 받지 못했다. 그가 알몸이었기에 미처 똑바로 바라보고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갇혀 있던 자는 막 벌을 받을 당시에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으나, 오백 년이 흘러 옷감이 다 썩어 없어지고 만 것이다. 결국 그는 민망함을 못 참고 자기 망토를 벗어 주며 말했다.


"아이구, 감사할 것 없으니 이걸로 알몸이나 좀 가리쇼, 거..."


베르토눌라는 자기 비부가 훤히 드러난 것을 알았음에도 그걸 가리지 않고 도리어 사냥꾼에게 옴을 들이밀며 말했다.


"훗, 사내가 여인의 나체를 보고 고개를 돌리긴. 구해 준 대가로 한 탕 같이 자 주랴?"


그러자 산트릴랑이 그를 꾸짖었다.


"자매... 아니 제자야! 수도자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이가 그런 문란한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그 형제님은 아내와 자식이 있는 몸인데, 그분에게 간음을 강요할 셈이니? 어서 그것을 받아 걸쳐라!"


그런데 그 때, 절벽이 무너진 쪽에서 짐승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끄어어어!!"


세 사람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무너지고 남은 절벽 위에서 큰곰 한 마리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수녀는 비명을 지르며 또 주저앉아 버렸고, 사냥꾼은 그런 수녀를 잽싸게 들어안으며 말했다.


"이곳은 본래 짐승이 사람을 피해가는 곳인데, 아까 절벽이 무너져서 반대편이 있던 놈이 놀란 모양이오! 서두릅시다!"


두 사람이 도망치려는데, 베르토눌라만은 그들을 따라 도망치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씨익 웃고는 어느새 손에 황금색 막대를 들고 호방한 어투로 말했다.


"툴리코기툼의 상대로는 한참 부족하지만, 오백 년씩이나 쓰질 못했으니 한번쯤 휘둘러 줘야 녹이 안 슬지!"


마침내 성난 큰곰이 베르토눌라가 밟은 땅까지 다 내려와서, 그를 향해 돌진했다. 산트릴랑은 사냥꾼의 팔에 들린 채, 그를 부르며 들인 지 얼마 안 된 제자의 희생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땅이 크게 한 번 울리는 소리가 나고, 수녀는 눈물을 그쳤다.


"꽝!!!"



두 사람이 크나큰 진동을 한 번 느끼고 뒤를 돌아보니, 큰곰은 몸 한가운데가 거대한 기둥에 깔린 듯 찌부러진 채 쓰러져 있었고, 수녀의 제자는 그걸 보며 뒷머리를 긁고 있었다. 그는 머리카락 한 올을 끊어 훅 하고 입김을 불었고, 이에 털오라기가 날카로운 단도로 변했다. 두 사람이 멍하니 지켜보는 동안, 베르토눌라는 큰곰의 시체에서 가죽을 벗기고는 단도로 재단하고 입김을 불어 말리면서 순식간에 천으로 만들어 냈다. 한술 더 떠, 그는 그 가죽의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황금색!" 하고 한 번 펄럭였고, 이에 가죽이 정말로 황금색으로 변했다. 뒤이어 재단할 때 날린 털들도 손가락 한 번 휘저어 허공에 모으더니, 옷깃에 여미기 좋게 길고 가늘게 짠 천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베르토눌라가 그것들을 둘둘 말아 뭉치고 다시 펴니, 어느새 무릎까지 내려오는 코트가 완성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입고 두 사람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서 말했다.


"이제 만족스럽소?"


두 사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죽이 싹 벗겨진 큰곰 시체와 베르토눌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베르토눌라가 다시 씩 웃으며 뒷머리에서 무언가를 뽑고 하늘로 높이 던지자, 그 털오라기 같던 것이 한순간에 커져 지팡이로 쓸 만한 크기가 되었다. 수녀의 제자가 그것을 받아내고는 말하였다.


"이것은 툴리코기툼이라는 것인데, 다루는 사람의 뜻에 따라 바늘보다도 가늘게 할 수 있고 낙타 몸길이보다도 굵게 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지만, 그만큼 다루기 까다로워서 한 손으로 기와 300개를 들 수 있는 자만이 다룰 수 있는 보물이올시다! 저따위 털뭉치쯤이야 손가락만 써도 잡지만, 오랜만에 이놈을 휘두르고 싶어져서 말이오."


"나도 창과 화살을 잔뜩 써서 겨우 잡을까 말까 하는 큰곰을 맨손으로?"


아도레다보르가 놀라서 묻자 제자가 더욱 기고만장하여 말했다.


"이 베르토눌라의 재능이 어디 맨손으로 큰곰 잡기뿐이랴? 구름을 옷처럼 입고 하늘을 날고, 갈 곳이 있으면 어디든 한걸음에 다다르며, 병과 상처는 때 벗기듯 씻고, 눈과 귀와 입은 하늘 아래 모든 언어와 짐승 소리와 신의 계시로 소통하네. 물, 불, 바람, 흙에 이르기까지 이 몸이 이해하고 다루지 못하는 것은 세상에 없다! 하하하하하!!"


사냥꾼은 베르토눌라의 능력에 취하여 그가 보여주는 온갖 마술을 보고 감탄했다. 그러나 산트릴랑은 그런 제자의 모습을 보고 몰래 쓴웃음을 짓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렇게 재주를 많이 배웠는데도 바위에 갇혀 오백 년을 지냈다니, 분명 힘만 믿고 주님을 시험하다 징계를 받은 것이겠지. 말 그대로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저 천둥벌거숭이를 제자로 삼아야 하다니. 그래도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분의 종인 이 몸이 함부로 거스를 순 없다. 주여, 당신 뜻이 이루어지소서.'


마침내 산트릴랑은 자기자랑에 신이 난 제자에게 다가가 그 손을 잡고 말했다.


"제자야, 나도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할게. 네 스승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악녀에게 죽고 아버지는 그 원수에게 빼앗기며, 망토 하나 두른 채 갈대밭에 버려졌지만,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이 마르테 세메부라는 수녀님께서 그곳을 지나 나를 발견하도록 하신 덕에 살아남아 마리 드 로셀리에란 이름을 얻고 수도자의 길을 지금까지 걸어온 여자야. 이 연약한 여자는 곰은커녕 토끼 한 마리도 맨손으로 못 잡고, 갈 곳 있어도 길면 몇 년을 족히 걸어야 겨우 도착하며, 병과 상처는 한 달 내내 치료받아도 흉이 지고, 하늘 아래 이해하는 언어는 조국의 언어인 프랑크어와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뿐이지. 제자인 너보다 잘 알아서 가르칠 만한 것이라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과 사랑뿐이지만, 이 둘 덕분에 내가 네 앞에서 충분히 스승 노릇을 할 수 있을 거란다."


"예수... 예수요? 아니, 스승이여! 당신이 말한 그 예수가 혹시..."


베르토눌라가 당황하여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이에 산트릴랑은 제 할 말을 했다.


"잘 들으렴. 앞으로 나는 너를 때때로 죈노비스(Jeune novice, 풋내기)라 부를 거야. 네가 몇 해를 살고 무엇을 얼마나 배웠든, 예수 그리스도를 안 적이 없으면 모든 것을 알지 못한 것과 같고, 겨우 삼십 년을 산 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통했다면 곧 모든 것에 통한 사람이니까. 그러니 너도 네 마술이 아니라, 그것들마저 품어 주시는 하느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스스로를 풋내기로 여기고 신앙과 선행에 힘써 정진하렴. 그래야 네가 나에게서 무언가를 배웠다고 남들 앞에서 선언할 수 있게 될 거야."


"아니, 나를 오백 년씩이나 가둔 놈을 교조로 삼으란 말이오? 그놈에게 무참히 패배하고 썩게 된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단 말이오!"


베르토눌라가 더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산트릴랑은 움츠러들지 않고 다시 설교했다.


"죈노비스, 네가 그토록 그리스도를 적대한들 그분께 티끌만한 생채기 하나 낼 수 있겠니?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패배해서 오백 년을 갇히지 않았겠지. 하지만 네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하여 그분 안에 머무르며 그분 뜻대로 행동하면, 너는 곧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고 또 그분과 같게 될 거야(1요한 3, 1-10). 그러니 지금은 화를 참아봐. 나중에 네가 그분을 직접 뵙고도 그 화가 누그러지지 않는다면, 그때 분통을 터뜨려도 늦지 않을 거야."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갔다. 거가서 짜증을 내봤자 더 할 수 있는 게 없던 것도 사실이었던지라, 베르토눌라는 산트릴랑의 말을 따라 그에게서 그리스도를 배우기로 했다. 수녀 또한 그를 데리고 이번에야말로 마음을 다잡아 주께서 명하신 순례를 온전히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그날 수녀와 그의 제자는 아도레다보르와 헤어져 토리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