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뜬 밤.



달이 걸친 산 아래 작은 계곡에서는 계속해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나고 있었고, 그 계곡 앞에 호랑이 모피를 입은듯한 여자가 앉아서 입에 담뱃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 입 힘껏 빨아들려는 순간,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만 깜짝 놀라 켁켁거리며 연기를 내뱉고 말았다.


 



"뭐, 뭐야? 이 시간엔 왠일로... 콜록 콜록!!!"



"응... 마음이 좀 심란해져서..."


 


 


달이 비치는 계곡물같은 은빛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사뿐사뿐 다가왔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녀의 머리칼은 마치 물줄기처럼 찰랑거렸다.


 


 


"햐, 너 보는것도 오랜만이다야. 요새 저 아래 마을에선 많이 바쁜가봐? 그래, 그 남자애랑은 일 잘 되고 있고?"


"응. 지금까지는. 그런데..."




여인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야, 왜 그래? 고민있어? 나한테 털어놔 봐. 아 그래, 오랜만에 같이 술 마실래?"



"아니... 나 이제 술 안 마셔."



"...뭐?"



"아니... 여자가 술 그렇게 벌컥벌컥 마셔대면 좀 그렇잖아... 그리고 내일 그이 얼굴도 봐야하는데 술냄새나면..."



"참나... 그 말괄량이 신령께서 요조숙녀 다 되셨네. 잠깐, 그이라고? 너희 설마 혼인했..."



"아니... 아직 혼인까진 아니고..."



"그럼??"



"사실 아직도 약간 미묘해... 눈을 마주치는 정도의 사이랄까... 뭔가 느껴지긴 하는데..."



"10년동안 한 집에서 지내면서 거기까지밖에 진도를 못 나가냐. 너 지지난 달에 여기 올라왔을때도 똑같은 말 했잖아!"



"...하지만 어떻게 해... 남자들은 조용한 여자를 좋아한다잖아... 난 그이가 먼저 말을 꺼내기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어..."



"에휴, 네가 술도 참고, 참 고생한다, 고생 해."



"헤헤... 그래도 그이랑 함께있으면 언제나 즐거운걸.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아. 물론... 더 가까워지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호랑이 여인은 담배를 한 입 빨아들이고 내뱉으며 잠시 옛날을 회상했다.


 


이 녀석이 그 소년이랑 친해지겠답시고 비슷한 나잇대로 변신해서 마을에 살러 내려갔던 게 벌써 10년 전이던가.


그렇게 내려간 후에도 종종 계곡도 보고, 나를 만나 놀려고 올라오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녀석은 마을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일주일에 한두번이 한 달에 한두번, 몇 달마다 한두번씩으로 변하고...



그만큼이나 그 소년에게 빠져있었다는 거겠지.

진심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신령이라.



그래, 그러고보니 녀석의 첫 변신 모습은 꼬꼬마 여자애였는데, 지금은 어여쁘게 흰색 저고리도 갖춰입고, 몸가짐도 바르겠다, 체형도 들어갈 데 다 들어가고 나올 데 다 나왔겠다, 성격은 정숙하겠다...



여자 다 되었구나. 낄낄낄...


 


 


"뭔 생각하면서 그렇게 웃어?"



"네가 그 아이를 보고 푹 빠졌던 첫 날이 생각나서 웃는다. 흐흐흐..."



"...헤헤..."



"그래, 네가 그 아이가 살던 낡아빠진 오두막도 열심히 고쳐서 사람 살만한 데로 만들었고, 책도 여기저기서 구해서 공부하는데도 도움도 줬잖아.


공부하는 동안 생계는 네가 꾸렸고. 내가 한번 맞추어 보지. 혹시 네 고민이 그 애의 공부 때문이냐?"



"응..."



"흠, 그 애 공부 잘 하잖아. 머리도 좋다매. 네가 예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그 공부 잘 하는 게 문제야.

그 이는... 내일 수도로 떠날거야."



"뭐???"



"과거 시험이지. 자신의 배움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고 싶대."



"뭐...잠깐. 그럼 너는? 넌 놔두고 가는 거야??"



"그 이가 같이 가자고 했어. 수도로 떠나자고. 하지만 나는... 계곡을 관리해야 하잖아. 내가 떠나면 이 계곡물은 한 달도 못 지나 썩어버릴 걸."



"너... 너... 그럼 그 놈은 널 놔두고 그냥 가버리는 거라고??

네가 지금까지 그 놈한테 해 준게 얼만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진정해. 그 이가 꼭 돌아온댔어."



"엥?"



"말 그대로 그냥 시험만 해 보는 거랬어.

내가 못 따라간다니까,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만 알고, 그냥 돌아온대.

그리고 돌아온 후에는..."


 


 


신령은 얼굴을 붉혔다.


 


 


"...나랑 함께 살고싶대."



"...오오..."


 


 


호랑이 여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잘된 소식이네..."



"그렇지..."



"잠깐, 그럼 뭐가 그렇게 고민인건데???"


 


 


신령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살짝 흥분한 듯 어투를 높여 속사포로 중얼거렸다.


 


 


"혹시 갔다가 안 돌아오면 어떻게 해?

 그리고 가는 길에 나올지도 모르는 산짐승들과 알 수 없는 위협과 산적들과 괴력난신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평범한 인간인 그 이는 그냥 당할 수 밖에 없는데 너무나 걱정된다고 너무 무서워 그리고 또 계속 걱정돼

 근데 난 계곡을 관리해야 해서 떠날 수가 없으니 진짜 미칠 것만 같아..."


 


"시팔 진정해 미친년아. 그렇게 걱정한다고 해결이 되냐? 뭔가 마땅한 계책이라도 강구해야지."



"...그래서 부적을 하나 만들어서 그이 봇짐에 넣어놨어... 이상한 거 안 꼬이고 나아갈 수 있는... 산적들도 들짐승도 막을 수 있는 그런..."



"뭐야, 그럼 다 해결된 거 아닌... 아, 괴력난신."



"그래, 그게 문제야!! 가다가 혹시 요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냐고!! 난... 그런 것들 막는 부적은 못 만든단 말야!!


게다가 그것들은 종류도 많아서 부적만으로는 막기도 힘들고..."



"어음... 그건 내가 좀 도와줄 수 있다."



"어??? 정말로???"



"내 옛 부하들 중에 구미호가 몇 놈 있거든. 그놈들한테 부탁해서 네 남자가 가는 길에 나올 수 있는 괴력난신들을 먼저 모조리 먹어치워놓으라고 하면 된다.


그리고 그 녀석들을 시켜서  남자를 미행하라고 명령해 놓을게.


예전에 헤어진 사이라 다시 부르기가 좀 뭣하긴 하지만... 뭐 부르면 와 주긴 하겠지. 사실 굉장히 유능한 애들이긴 하니ㄲ..."


 


 


호랑이 여인은 갑자기 품에 파고든 신령 때문에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놀랐을 뿐만 아니라, 신령이 달려들면서 머리로 상당히 아야한 부분을 강하게 타격했기 때문이였다.


 


 


"정말 고마워!!! 역시 언니 뿐이야!!!"



"... 언니라. 그 호칭도 참 오랜만에 듣네... 킥... 콜록콜록!!!"


 



신령은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호랑이 여인에게 재재거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뒷머리를 묶은 예쁜 다홍색 끈을 자랑하며, 그이가 사준 물건이라고 자랑했다.


자신이 수도로 떠나고 나면 자신이 없는 동안

그 끈을 보며 자신을 기억해달라며 말했다면서, 싱글벙글 웃으며 계속 기뻐했다.



확실히 은빛 머리에 묶인 그 다홍색 끈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호랑이 여인은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맹수의 촉으로써, 옛날 옛적 인간과 엮였었던 기억으로부터 뭔가 불길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괴력난신도, 산짐승도, 도적의 위협도 아니였다.


정체불명의 불길함이 어쩐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즐겁게 떠들고 있는, 그녀에 비하면 아직 어리디 어린 계곡의 신령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호랑이 여인은 그냥 함구하기로 했다.



이제야 막 기분이 좋아진 귀여운 친구의 기분을 망치기 싫었기 때문에. 

그리고 걱정을 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틀렸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면서, 신령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며 오랜만에 신령과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깊은 밤.

보름달이 구름 사이에 가려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