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들어 보고 있는 벽보에,

자신의 이름 서 글자가 장원이라는 글자 바로 아래에 크게 떡하니 박혀있었다.


 


장원이라니. 이런 건 예상도 못했는데.



청년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기쁘기도 하고, 약간 괴롭기도 한 여러 감정들이 몰려들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녀도 같이 오면 좋았을 텐데...



고향에서 어렸을 적부터 함께 지냈던 그녀.


그녀는 언제나 그의 뒷바라지를 해주고, 공부하는 동안 집안일도 잘 해준대다가, 대가도 없이 언제나 자신을 잘 대해주었기에 항상 고마움을 느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번에 시험보러 한양에 가는데 같이 가자고 부탁했었는데, 그녀는 곤란한 표정으로 거절했었다.


자신은 이곳에서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며.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래, 뭐. 내가 다시 돌아오면 되지.



설마 합격할 줄은 몰랐으니까.

장원을 딸 줄 알았다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녀를 데려왔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녀와 함께 이곳에서 어떻게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벼슬도 하면서.



다시 고향에 가서 그녀를 데려오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고향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2개월이 걸렸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 사이에 장원은 합격자가 사라졌다며 취소될 것이다.


게다가 오는 길도 상당히 고되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모를까 그녀를 데리고 다시 수도로 오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운이 좋았는지 거친 산짐승이나 산적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다시 또 그만큼 운이 좋으란 법은 없으니까.


 


후우...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청년은 일단 마음을 추스렸다.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품에서 꺼내 들었다.


 


수도로 과거를 보러 떠난다고 인사를 올리던 날에 받았던 편지였다.


 


 


("수도에 가서 쉴 곳이 마땅치 않으면 00거리의 00집에 가서 이 편지를 보여주도록 해라.


내가 전에 벼슬에 있었을 때의 친구의 집이다.


아직 날 잊지 않았다면 내 제자인 널 잘 대해 줄 것이다.")


 



후우... 그래.


일단 잘 쉬고 보자.


지금까지 이용했던 주막들은 굉장히 좁았고 쉬기도 힘들었다.


이왕 온 거, 몸이라도 편히 쉬고, 한양에서 즐길 거 다 즐기고 돌아가자.



장원... 좀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 내가 여기에 집이 있는것도 아니고. 벼슬을 해서 뭘 한단 말인가. 실컷 놀다 돌아가기나 하자.


그래... 00거리의 00집이 어디지...??



 


 


 


=====


 


 


 



"아하...!! 그 친구 아직도 잘 살아있었구만!! 소식을 듣고 싶었는데 다행이군! 그래, 자네가 제자라고?"



"아, 네. 그렇습니다."



"이야... 시골에서 공부해서 여기까지 올라와 단 한번에 장원을 따내다니...! 자네 정말 대단한 인재로구만!

역시 그 친구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하하... 스승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더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허허, 겸손은 그만 떨게! 자네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거라고! 다른 사람들은 30년도 넘게 준비하고도 떨어지는데, 자넨 정말 엄청난 일을 해낸거네!"


 


 


청년은 마음속으로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큰 부잣집은 본 적이 없다.

00거리는 완전히 번화가였다.



말 그대로 기왓장으로 도배되고 채 수도 세기 힘든 그런 집들이 가득 들어서 있었는데,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00집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으리으리한 집이였다.



처음엔 진짜 여기가 맞나 몆번이고 확인했다.


그런데 진짜로 여기였다.



게다가 이 집안의 큰어르신께서 편지를 보시더니 청년을 직접 만나 보고 싶다고 하시며 방에서 뛰쳐나왔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되었다.


 



"그래, 몆 주 쯤 쉬어가겠다는거지.

상관없네. 방을 내 주겠네. 손님용 방은 엄청나게 많으니까. 으하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흠, 그런데 좀 사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 저쪽 방으로 들어가지 않겠나? 꽤 중요한 이야기일세."


 



아까까지 쾌활하던 어르신의 눈매가 갑자기 예리하게 변하고, 목소리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청년은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약간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들어가기 싫다고 할 순 없었다.


 


어르신이 청년을 이끈 방은 화려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다른 방으로 연결된 다른 큰 문 하나가 바로 보였고, 그 너머로 왠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다.


청년이 호기심에 차서 두리번리는 사이, 어르신은 큰 자리에 앉아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앉게나."


 


 


청년은 홀린듯이 자신의 작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앉았다.


어르신은 담배를 깊숙히 한번 빨았다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사실 요새 아주 큰 고민이 있다네...

문서상으로 뭔가 큰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내가 죽으면, 내 집안 재산이 전부 외가로 넘어가게 생겼네.


난 그쪽 집안, 외가 사람들이 내 재산에 손 대는 건 상상도 하기 싫네. 몇몇이 도박벽이 있거든.

순식간에 탕진해버릴게 뻔하고. 그런 한심한 인간들에게 돈 내주는 것도 싫다네."


 


 


"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허허... 자네가 도와줄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지."


 


 


그러면서 어르신은 목소리를 크게 내어 외쳤다.


 



"애야, 들어오너라."


 



그러자 문이 열리고, 그 너머에서...


 



"내 딸일세. 혼기는 좀 넘었다네. 19살이지. 자네와 동갑일세."


 



"..."


 



"...표정을 보아하니... 흐흐... 그래. 내 딸이 좀 많이 예쁘지?

어머니 쪽을 닮았거든. 날 안 닮아서 다행이야. 안타깝게도 내 아내는... 세상을 먼저 떠나버렸지만... 큼..."


 



"..."


 



"아무튼, 자네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라네.

내 딸이 시집을 가면, 내가 죽더라도 내 재산은 외가에 넘어가지 않게 되네.


그런데 요새 마땅한 신랑감을 찾을 수 있어야지.

다들 놀고 마실줄이나 알고 말이야. 요새 젊은 것들은...


그런데 자네는, 그야말로 완벽하네.


자네야말로 내가 항상 바래왔던 사윗감이네.

내 딸을 혼기가 넘어서까지 결혼시키지 않고 놔두었던 것이 마치 자네를 맞이하기 위한 것인 것만 같구만.


...그래.


난 자네를 사위로 맞이하고 싶네.

내 딸도... 표정을 보아하니 자네가 마음에 드는 것 같구만.


그래, 어쩔 텐가?


...하나 말해주자면, 난 요새 건강이 별로 좋지 않네.

아마 오래 못 살 것이야.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은 다 자네 것일세.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네."


 


 


"......"


 


 


청년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헷갈렸다.


순간 고향에 두고 온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꼭 돌아 와 주셔야 해요... 당신을 언제까지나 기다릴게요.")


("걱정 마. 내 실력만 확인하고 바로 돌아올 거야.")


 



"..."


 



...그녀는 지금 아주 멀리 있었다.


그 반면, 지금 부와 명예,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청년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