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대학교 중앙학생회관 8층 813호 스터디 실. 스터디 실에는 한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각자의 노트북을 끼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성은 그녀 또래 여자의 평균키는 가볍게 넘어갈 정도로 키가 컸다. 그녀 또래의 남자의 평균을 살짝 넘을 정도였다. 보통 이 정도로 키가 크면 어지간히 살집이 없는 한 깡말랐다는 인상을 받기 쉽겠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군살은 없었지만 그 빈 자리를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고, 탄력 있는 피부는 옅은 갈색으로 그을려 있으니 깡마르다, 유약하다 같은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군다나 머리카락은 뒷머리가 목 언저리에 닿을 정도 옆머리는 귀나 간신히 가릴 정도로 짧으니 그녀의 건강미는 한층 더 부각되었다. 그렇다고 선머슴 같냐고 물어본다면 그것도 아니다. 몸매는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왔으며, 언제나 자신감이 머무르는 얼굴은 남자에게서는 찾기 힘든 곱상함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시원시원한 인상의 멋진 미녀였다. 

 반면에 남성 쪽은……남성이라는 호칭을 쓰니 성인이라는 느낌이 나지만 그의 외모는 성인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우선 키. 근처 중학교에서 중학생 아무나 불러다가 그의 옆에 세워두면 높은 확률로 중학생의 키가 클 것이다. 보통 성인이 중학생보다 키가 작다고 하면 왜소증을 떠올리기 쉽겠지만 그에게는 왜소증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어딘가 탐탁지 않다. 왜소증 환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신체비율의 불균형은 없고, 외모는 세월의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젖살이 올라있고, 피부는 매끈하였으며, 털은 머리카락과 귀, 그리고 아홉 개의 꼬리를 제외하면 솜털 밖에 나 있지 않았다. 여기에 얼굴에 비해서 커다란 눈망울까지 결합하면 귀엽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런 주제에 언제나 뚱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그의 나이에 걸맞지 않는 ‘애늙은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게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선배.”

 이 말을 한 쪽은 여성이었다. 남자는 노트북에서 눈을 때지 않은 채 대꾸했다.

 “왜?”

 “소설이나, 연극, 드라마 같은데서 보면 아빠가 아들한테 ‘넌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장면 있잖아요.”

 선배는 약간 늦게 대답했다.

 “그렇지.”

 “그게 보통은 아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주로 나오는 대사잖아요.”

 “그렇지.”

 “그 대사 말인데요. 조금만 바꿔서 생각하면 엄청 위험한 대사라는 느낌이 안 드세요?”

 선배는 고민했다. 여기에 대꾸해줄까, 말까. 결론은 쉽게 내려졌다. 귀찮아 질 것 같으니까 무시하자.

 유감스럽게도 후배는 그렇게 쉽게 물러나는 성격은 아니었다. 후배는 선배가 대답이 없자 노트북을 조작하였다. 곧 선배는 하나의 파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창을 보게 되었다. 선배는 발신인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파일을 열어보지도 않고 삭제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하던 작업으로 돌아갔다.

 후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슬슬 선배가 핀잔을 줄 때가 되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네? 아, 보지도 않고 삭제했나보구나. 그렇다면……

 “선배.”

 “왜?”

 “이번에도 그냥 삭제하면 다음번엔 5초 주기로 100개씩 보낼 거예요.”

 망할 년. 선배는 속으로 욕을 하고 대꾸했다.

 “다시 보내.”

 오래지 않아 다시 파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창이 선배의 노트북에 떴다. 선배는 이번엔 곧장 삭제하지 않고 그 파일을 열었다. 용량이 얼마 되지 않는 텍스트 파일이었다. 선배는 그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소년의 두 팔은 머리 위에서 중년남자의 손에 붙잡혀 있었고, 두 다리는 중년남자의 두 다리에 눌려있었다. 소년이 아무리 버둥거려도 그 족쇄는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소년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자를 올려다보았다. 소년이 아는 얼굴이었다. 아니, 그냥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소년은 그를 불렀다.

 “아, 아빠.”

 소년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남자였다. 소년의 생을 지금까지 함께 보낸 남자였다. 소년이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러나 이런 짓을 허용한다는 의미의 사랑은 아니었다. 

 “아빠, 왜 이래? 왜 이러는거야? 응? 정신차려.”

 남자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결코 아들에게 향해서는 안 되는 눈빛이었다.

 “넌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의 입술을 아들의 입술에



 거기까지 보고 그는 텍스트 파일을 닫았다. 그리고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 파일을 영구 삭제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와, 머리가 이상한 건 알고 있었는데 그냥 이상한 게 아니라 아주 썩어있었구나.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선배는 박살난 멘탈을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다. 선배는 후배를 노려보았다. 후배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여기에 뭐라고 한 마디 하면 후배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는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수가 없다.

 “네 앞날이 걱정된다.”

 후배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즉답했다.

 “걱정되면 저 데리고 사세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이상한 짓을 골라서 할 수 있냐?”

 “선배를 향한 사랑이 절 이렇게 만들었으니 선배가 책임지셔야죠. 저 데리고 사세요.”

 “너 이러다가 진짜 범죄 저지르는 거 아니냐?”

 “그렇죠? 이런 예비범죄자가 당당하게 사회를 활보하는 것을 생각하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죠? 이대로 두면 귀여운 소년소녀들을 납치해서 하.렘을 만들어서 매일매일 주지육림삼매경에 빠져서 살 것 같죠? 정의구현사회를 위해서 저 데리고 사세요.”

 “……분명히 대화는 이어지는 데 어딘가 소통이 안 되는 느낌이 드는 건 내 착각 아니지?”

 “저 데리고 사시면 저 선배 뒤치다꺼리 잘 할게요. 매일매일 산책도 시켜주고, 밥도 챙겨주고, 같이 목욕도 하고, 꼬리도 손질해주고, 화장실도…….”

 “거기까지 해라. 실시간으로 내 존엄성이 깎여나가는 기분이다.”

 “그러면 저 데리고 사세요.”

 “썅년아.”

 결국 못 참고 욕을 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결코 욕을 하지 않는 그였지만 어지간한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지금 상황에서 참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선배에게 욕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깔깔 웃었다. 삐뚤어진 독점욕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결코 그에게서 이런 반응을 뽑아낼 수 없었다. 오직 그녀만이 가능했다.

 “쯧! 헛짓은 작작하고 지금 하고 있는 거나 끝내.”

 “저 데리고 살겠다고 하시면…….”

 선배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후배를 바라보았다. 후배는 잽싸게 그 눈길을 피해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크, 이 이상 하면 진심으로 화를 낸다.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며칠 동안 말도, 눈길도 섞지 않게 된다. 안되지, 안 돼. 그렇게 되면 외로워서 죽어버리고 만다.

 후배는 다시 자신이 하던 작업에 착수했다. 선배는 후배가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후배를 바라보았다. 후배가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야 선배도 다시 자신의 작업에 돌아갈 수 있었다.

 
 
 자신이 맡은 부분을 끝낸 선배는 기지개를 폈다. 손과 발은 반대 방향으로 쭉 뻗었고 탐스러운 9개의 꼬리가 여러 방향으로 치솟았다. 

 찰칵!

 갑작스러운 카메라 소리에 선배는 기지개를 멈추고 후배를 노려보았다. 후배는 폰을 들고 희희낙락 웃고 있었다.

 “오늘도 선배 컬렉션이 늘어납니다. 이걸로 당분간 밤이 외롭지 않겠네요.”

 후배에게 사진 찍지 말라고 말을 하면 도촬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선배는 사진 찍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

 “도면은 다 그리고 놀고 있는 거냐?”

 “절 뭘로 보시고! 도면은 아까 전에 다 끝내고 PPT초안도 이미 끝내뒀거든요!”

 성격 이상한 놈이 능력은 좋으니 더 밉상이었다.

 “보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창이 올라왔다. 선배는 먼저 도면을 열었다. 마법역학과 기초도술회로 등이 결합된 마도구 도면이 노트북 화면에 떠올랐다. 선배는 도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어디 흠 잡을 데가 없는 지 찾아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없었다. 젠장, 조금이라도 틀린 부분이 있다면 그거로라도 갈굴 텐데. PPT에 희망을 걸어보자.

 선배는 도면을 닫고 PPT파일을 열었다.

 
 
 소년의 두 팔은 머리 위에서 중년남자의 손에 붙잡혀 있었고, 두 다리는 중년남자의 두 다리에 눌려있었다. 소년이 아무리 버둥거려도 그 족쇄는 풀릴 것 같지 
 


 “야이, 미친년아.”

 선배는 노트북을 덮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까 전 텍스트 파일에서 업그레이드되어 그림까지 첨부되어있었다. 멘탈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후배는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아차, 실수로 엉뚱한 걸 보냈네요.”

 “퍽이나 실수겠다!”

 후배는 능청스럽게 손을 위아래로 휘저었다.

 “에헤이!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죠. 이번엔 제대로 보냈으니까 다시 확인해주세요.”

 한참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멘탈을 수습한 선배는 다시 노트북을 펼쳤다. 기존의 PPT파일을 삭제하고 새로 온 파일을 열기 직전 선배는 고개를 들어 후배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번에도 이상한 거면 다시는 나랑 얼굴 맞댈 생각하지 마라.”

 “선배! 그거 잘못 보낸 거에요! 열지마욧!”


 
 한 차례 소란이 있고나서야 선배는 제대로 된 PPT파일을 받을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된 PPT파일도 아까 도면과 마찬가지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선배는 혀를 찼다. 선배의 반응을 본 후배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물었다. 

 “어떤가요?”

 선배는 마지못해 말했다.

 “……잘했네.”

 “사랑의 힘이죠.”

 선배는 후배의 기고만장하는 꼬락서니가 아니꼬웠다. 하지만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낸 후배의 면전에 핀잔을 주기도 뭐했다.

 “내가 PPT완성한 후에 대본 써서 보내줄 테니까, 넌 그 대본으로 발표 연습 해둬.”

 “발표하기 전에 리허설도 해야죠.”

 “발표 이틀 전에 다시 스터디 실 빌리자.”

 “선배 집에서 하면 안 돼요? 아니면 우리 집에서라도…….”

 “내 신변이 위험해질 것 같으니 절대로 안 돼.”

 “여기서도 충분히 선배의 신변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데요?”

 선배는 다시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후배를 바라보았다. 후배는 슬그머니 그 시선을 피했다.

 “……농담이에요.”

 절반은 진심이었던 것 같지만 그걸 지적하면 진짜로 달려들 것 같았기에 선배는 지적하지 않았다.

 선배는 노트북과 그 주변기기를 정리하며 말했다.

 “너도 정리해. 지금까지 과제하느라 고생했으니 상 줄테니까.”

 후배의 눈이 빛났다.  

 “모텔!?”

 “저녁밥!”
 

 
 학교근처의 해장국집. 선배와 후배는 적당히 배를 채우고 남은 해장국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선배는 이번 방학에 뭐 하실 거에요?”

 “알바. 생활비 마련해야지.”

 “정해진 곳은 있고요?”

 “옛날부터 신세진 분 일 도와드려야지. 나처럼 어려보이면 알바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더라.”

 후배는 소주를 홀짝인 후 말했다.

 “선배 알바자리 소개시켜드려요? 월급도 나름 빵빵한데.”

 후배가 하는 말은 대부분 시답잖은 것을 알고 있지만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전부터 신세졌다는 분이 주는 급료는 하는 일에 비해서 너무 짰으니까.

 “어딘데?”

 “숙식제공, 하루 여덟 시간 이상 일하기는 하는데 그 초과한 시간 전부 초과근무수당으로 계산해서 주고요, 야간에도 일하면 또 다시 여기에 야간근무수당으로 쳐줘요. 바쁠 땐 엄청 바쁜데 한가할 때는 진짜 한가해요. 하는 일은 빨래, 설거지, 간단한 요리, 청소 같은 거고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냐. 선배는 혀를 찼다.

 “너희 집에서 기둥서방처럼 살라고?”

 후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친척이 경주에서 콘도 하는데 그거 일 돕는 건데요?”

 “…….”

 평소에는 주구장창 헛소리만 하는 녀석이 가끔씩 제대로 된 소리를 하니 이런 비극이 일어나는 거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암 그렇고말고. ……젠장.

 후배는 히죽히죽 웃었다.

 “선배 생긴 건 귀여운데 속은 엄청 응큼하시네. 히히, 그러면 선배가 원하시는 데로 할까요? 저 힘내서 돈 벌어올게요. 선배는 저희 집에서 편하게 지내주세요. 차라리 영구계약 맺을까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이모! 여기 이슬이 한 병 더 주세요!”

 
 
 선배는 눈을 떴다. 알코올에 절어있던 뇌는 처음에는 자신의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눈을 뜨고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선배는 자신의 상황을 파악했다.

 선배는 후배의 등에 업혀있었다. 후배의 평균보다 월등히 큰 키와 다부진 몸, 선배의 작은 키와 가녀린 몸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내려줘.”

 “선배, 깨어나셨어요?”

 “내려……달라니까.”

 후배가 자신을 내려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선배는 후배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파, 아파요! 아파요, 선배! 그렇게 쎄게하면 저의 소중한 것이 찢어져 버려요!”

 “미친소리 작작하고 내려줘.”

 “저기 있는 벤치까지만요! 술 마시다가 꽐라 되어서 쓰러진 사람이 깨어나자마자 제대로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이번에는 옳은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선배는 후배의 귀를 놔주었다.

 “히잉, 아프다. 귀에 호 해주세요, 선배.”

 이번에는 뒤통수를 쳐줬다.

 
 
 “선배 여기요.”

 선배가 벤치에서 기다리는 동안 후다닥 편의점에 갔다 온 후배는 선배에게 숙취음료를 건네주었다. 후배는 캔커피를 따며 선배의 옆에 앉았다.

 “소주 세 잔 마시면 뻗는 분이 뭘 그렇게 허세를 부리세요? 그냥 끊어버리세요.”

 “…….”

 옳은 소리였기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선배는 말 없이 숙취해소음료를 마셨다.

 후배는 캔커피를 다 마시고 멍하니 있고, 선배는 숙취해소음료를 절반정도 비었을 때, 후배가 말했다.

 “선배.”

 “왜?”

 “저, 선배 좋아해요.”

 “…….”

 선배는 후배의 고백에 대답해주는 대신 숙취해소음료만 홀짝였다. 후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진짜로, 진심으로, 일말의 거짓도 없이, 전신전령을 다해서, 제 목숨을 걸고, 세상 모든 것이 거짓일지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변함없을 정도로.”

 “……오글거린다.”

 “술 마셔서 그래요.”

 중의적인 말이었다. 선배가 술을 마셔서 오글거리는 건지, 후배가 술을 마셔서 오글거리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건지.

 “저 고백했어요. 선배의 대답은요?”

 “꺼져.”

 “누차 말씀드리지만 긍정의 대답이 아니면 접수하지 않습니다.”

 “어쩌라고.”

 “고백 받아들여달라고요!”

 후배는 와락 선배의 허리에 달라붙었다.

 “만날 만날 그렇게 날 유혹해서 몸 달아오르게 만들면 책임을 져야죠! 오늘로 백 여든 한 번째 고백이었단 말이에요! 이제 슬슬 받아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반대로 너도 이제 슬슬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냐?”

 “음식이 없으면 한 달을 버틸 수 없고, 물이 없으면 삼 일을 버틸 수 없고, 공기가 없으면 삼 분을 버틸 수가 없고, 선배가 없으면 버틸 수가 없는데요? 저보고 죽으란 소린가요?”

 마구 달라붙는 후배를 밀쳐내며 선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년은 진짜 답이 없네. 

 “난 나보다 키 큰 여자는 안 좋아해.”

 “선배보다 작은 여자는 어린애 밖에 없어요! 선배 범죄자가 될 생각인가요?”

 “어린애를 좋아하는 네가 할 소리냐?”

 “그래서 선배한테 집착하는 거잖아요! 어린애는 불법이지만 선배는 합법!”

 “알고 있었지만 너 도덕관념 어딘가 이상하네.”

 “선배보다 큰 여자는 싫어한다고요? 그러면 저 선배보다 작아지도록 노력할게요!”

 “그게 노력해서 될 일이냐?”

 “다리 자르면 되요!”

 선배는 질겁했다.

 “그건 하지마, 병.신아! 나 밤잠 설치게 만들일 있냐?”

 “그러면 저랑 사귀어요, 선배에에!”

 “……도깨비는 전부 너처럼 이렇게 막무가내에 자기 맘대로 행동하냐?”

 후배는 선배의 꼬리에 얼굴을 묻었다.

 “생식 본능에 충실한 거라고 해줘요. 저도 선배가 아니면 이런 행동 안 한 단 말이에요.”

 “이 따위 특별취급은 전혀 받고 싶지 않은……야! 꼬리 깨물지마!”

 도깨비와 구미호는 그렇게 한참을 엎치락뒤치락거렸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먼저 지친 것은 구미호였다. 도깨비는 구미호의 팔과 다리를 누른 자세로 구미호 위에 올라탔다.

 “선배.”

 구미호는 숨을 고른다고 늦게 대답했다.

 “왜?”

 도깨비는 진지한 얼굴로 구미호를 내려다보았다. 도깨비의 눈에는 지성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지성이 사라진 빈자리는 본능, 짐승에 더 가까운 빛이 머무르기 시작했다.

 “저랑 사귀어요. 아니면 여기서 덮쳐버리겠어요.” 

 도깨비의 말을 들은 구미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구미호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봐. 평생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도깨비는 한 손으로 구미호의 양 손을 잡아 못 움직이게 하고 남은 손을 구미호의 바지 벨트에 갖다대었다. 구미호는 조금도 겁먹은 기색 없이 도깨비를 올려다보았다. 도깨비가 구미호의 바지 벨트를 풀고, 바지의 단추를 열려고 하는 그 순간. 구미호의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선배는 왜 만날 저한테 이래요? 만날 나한테 욕하고, 핀잔주고, 때리고, 무시하고, 비웃고…… 저 선배 좋아하는데.”

 “너 같으면 이런 짓 하는 사람을 좋아할 수 있겠냐? 배려받고 싶으면 너부터 날 존중해.”

 “저, 선배 좋아한단 말이에요! 너무 좋아해서 도저히 못 참을 정도로! 그래서 이런 짓을 저지를 정도로!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결국 도깨비는 울고 말았다. 서럽다는 듯이 소리를 내며 구미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구미호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근력은 부족하였고, 도깨비의 몸은 너무나도 무거워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구미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도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 녀석은 덩치만 컸지 속은 완전히 어린애다. 진짜. 

 
 
 구미호의 상의가 완전히 젖을 때까지 울고 나서야 도깨비는 울음을 그쳤다. 아니, 울음을 그쳤다기보다는 지쳐서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다 울었냐? 그러면 고개 들어.”

 도깨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구미호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끅끅거릴 뿐이었다.

 “고개 들라고.”

 그러나 도깨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 들어, 안 그러면 다시는 얼굴 안 볼 거다.”

 그렇게 협박을 하고나서야 도깨비는 고개를 들었다. 조심스럽게. 도깨비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물과 콧물, 침으로 범벅되어 있었고, 두 눈은 부었고,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표정 관리까지 안 되니 평소의 멋진 미녀의 모습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구미호는 손을 뻗어 거칠게 그 얼굴을 문질렀다.

 “으이구, 화상아, 화상아. 넌 도대체 왜 그렇게 못 났냐?”

 도깨비의 얼굴이 더욱 더 일그러졌다. 다시 한 번 울음을 터트릴 기색이었다. 구미호는 혀를 찼다.

 “쯧! 내가 진심으로 너 싫어하면 매일 매일 달라붙는 걸 참아줬겠냐?”

 도깨비 얼굴의 일그러짐이 멈췄다.

 “너 하는 행동이 너무 애 같아서 네 고백 받아주면 엄청 귀찮아질 것 같아서 지금까지 계속 거절한 거다. 사귀어달라고?”

 도깨비는 크게 훌쩍 코를 들이마셨다. 도깨비의 얼굴에서는 희망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구미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냐, 어디 한 번 사귀어보자. 이제는 거절하는 쪽이 더 귀찮게 됐으니 받아들여줄 수밖에 없잖냐.”

 그토록 기다려온 대답이 돌아오자 도깨비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슬퍼서 터져나오는 울음이 아니라 기뻐서 터져나오는 울음이었다. 도깨비는 일그러진 얼굴을 구미호에게 들이대었다. 그리고 구미호의 입술의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다시 구미호의 바지를……

 구미호는 기겁해서 외쳤다

 “야! 적어도 밖에선 이러지 말자!”

 구미호는 도깨비와 사귀면서 겪을 일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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