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랑 모험가.

실력은 시원찮지만 잔머리는 꽤나 돌아가는 편이라 근근히 먹고 살고 있다.

어느 늦은 밤, 일거리를 알아보기 위해 인근의 도시로 향하는 길이었다.


"어이 인간, 나랑 한판 붙자!"

샛길을 오르는 내 앞에, 리자드맨이 나타났다.

아니. 얼굴은 앳된 여자아이였으니 리자드걸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려나.

아무튼 그러한 녀석이, 칼을 빼들고 다짜고짜 나에게 덤벼들었다.


나도 재빨리 단검을 들어 반격했지만, 녀석의 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 합 한 합을 막아낼 때 마다 팔이 욱신거리는 게 느껴졌다.

애초에 싸울 준비가 된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점점 밀리더니 나중에는 방어에만 급급할 지경이 되었다.


결국 내 단검은 꼴사납게 내 손을 떠나고야 말았다.

녀석이 날 어떻게 할지 감이 잡히지 않던 나는 재빨리 끝내달라는 의미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녀석은 날 해칠 생각은 없었는지 칼을 멀리 던져두고는, 한숨을 내쉬며 가던 길을 가리켰다.

"이겼네.... 가던 길 마저 가."

내가 아는 리자드맨은 호전적인 종족일 텐데, 승리하고도 저렇게 아쉬운 표정을 짓다니?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갈 길이 멀었기에 나는 녀석의 호의에 가볍게 목례하고는 다시 길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저 멀리 떨어진 단검을 주울 무렵, 내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톡.

맑은 하늘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샛길은 맑은 날에는 지나가기 어렵지 않지만, 비가 내려 땅이 축축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소 비가 그치기 전까지 샛길은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주변에 비를 피할 곳은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중에, 리자드맨들은 동굴에 산다는 이야기를 기억했다.

마침, 녀석도 아직 샛길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불렀다.

"어이, 거기 도마뱀 아가씨!"

"왜..."

"오늘 밤 너네 집에서 신세 좀 질 수 있겠어? 물론 숙박비는 낼게!"

녀석은, 왠지 모르게 기뻐 보였다.


샛길로부터 5분 정도 거리에, 녀석이 사는 동굴이 있었다.

입구는 엎드려 기어가야 겨우 들어가는 크기였지만, 내부 공간은 제법 넓었다.

조잡하긴 했지만 나름 집의 구색은 갖춘 집이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곳의 주민은 리자드맨들뿐이 아니었다.

녀석은 돌로 만든 침대에 앉은 중년의 인간 남자에게 달려와 안겼다.

"아빠! 나 왔어! 근데 할 이야기가 있어!"

남자는 녀석과 함께 그들의 언어로 무언가를 쑥덕거리더니,

녀석을 쓰다듬고는 동굴 안쪽으로 보냈다.


잠시 후, 남자는 돌 탁자에 앉은 나에게 뜨거운 잔을 건넸다.

"보아하니 이곳 분은 아니신가 보군요."

"아아.. 적을 두지 않고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딸아이의 무례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딸아이라면 양녀십니까? 종족이 다른 것 같던데.."

"아니오. 제 친딸 맞습니다. 리자드맨과 인간 사이의 자손은 리자드맨으로 태어납니다."

"그렇군요..."

그는 나에게 리자드맨들의 생태와 문화에 대해 여러가지를 말해 주었다.


"그런데 어르신."

"말씀하시죠."

"혹시 아까 따님이 왜 제게 덤벼들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그건 그들의 구혼 의식입니다. 마음에 드는 행인에게 대뜸 덤벼들고는, 

자신이 행인에게 패배하면 그 행인을 남편으로 삼는 것이죠."

"즉.. 그 말씀은?"

"딸아이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했나 봅니다. 다행히도 딸아이에게 패하셨지만.."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럼 저는 패배했으니 상관없는 거로군요?"

"안 그래도 딸아이가 애 엄마와 저에게 물어보더군요. 

너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봤는데 그만 이겨 버렸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그래서 뭐라 대답하셨는데요?"

"어차피 너에게 졌으면 거부할 힘도 없을 텐데 강제로 구혼하라고 했습니다."

"그...그 말씀은?!"

"포기하고 받아들이게. 사위."

나는 뒤통수에 강렬한 충격을 느끼고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뜬 나는 내 옆에서 나체로 나를 꼭 껴안은 채 잠들어 있는 녀석과,

그런 나와 녀석을 음흉하게 바라보고 있는 어느 리자드맨, 그리고 아까의 남자를 보았다.

"흐흐흐흐, 사위. 우리 집에 온 것을 환영하네."

"싫어어어어어...."








써놓고 보니 영 아니올씨다이지만 쓴 시간이 아까워 올립니다

언제나 똥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