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철기시대 초 즈음에 대륙의 동쪽에서 번성했던 나라가 있었다.


한때 마인생태학자와 교수들, 그리고 특히나 휘하의 대학원생들을 충격에 빠트렸던 털로 뒤덮힌 라미아가 발견된 바로 그 제국의 이야기다.


그 시절 중앙대륙 동쪽에 정말로 마계로 통하는 관문이 열린 적이 있다는 학설이 거의 확실하다는 듯이, 그 제국의 국민들도 마인(魔人)출신으로 구성되었는데,


비록 자연마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 세계에서는 마계에서의 위력적인 마법과 주술들을 사용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마계의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은 민족 특유의 호전적인 기질과 숙달된 전쟁 기술로, 잘 나가던 시절에는 무려 대륙의 1/4를 점령하고 있었다고 한다.(최근에는 간헐적으로 열리는 차원관문을 통해 마력을 어느정도 비축하지 않았냐는 가설도 있긴 하다)


그렇지만 시대에 비해 강력한 힘을 가진 그러한 강대국이라도 골치아픈 문제는 끊이지 않았나본지, 앞서 말했던 털달린 라미아의 습격이 그 중 하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제법 심각한 문제였는지, 라미아 정벌 이전까지의 발견된 기록물들은 글, 그림 할것없이 하나같이 이들과 싸우는 전사들을 묘사한 기록물들이었다.


툰드라의 거친 습지에서 생활하는 이 거대하고 부들부들한 라미아들은, 일반적인 라미아에게선 보기 드문 털비늘을 통해 북부지방의 추위를 극복했으며,


도래 이후 점점 활동영역을 넓혀가더니, 급기야는 청동기 시절이 끝나갈 무렵에는 제국의 영토까지 거침없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라미아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거대한 덩치를 앞세워, 민가를 약탈하며 식량과 가축을 강탈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배우자로 삼겠다며 사람까지 납치해가곤 했다.


당장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데도 급급했던 이들 민족에게 이들 펄미아(fur+lamia)들의 습격은 심각한 위협이었으며, 제국의 황제는 당시 제국에 만연해있던 피지배계급의 반란을 한차례 진압하자마자, 재반란의 위협을 무릅쓰면서 바로 이들을 토벌하는데 나섰다.


이들 제국의 신민들에겐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펄미아들의 세력은 부족국가들의 집합체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제국은 강력한 동원력과 황제의 재빠른 판단력을 앞세워, 이들이 어떻게 연합해볼 틈도 없이 이들을 각개격파 할 수 있었다.


단, 전쟁이 이토록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끝날수 있었던 이유는, 황제가 그 자신의 특출난 정치적인 혜안을 발휘해서 밀어붙였던 정책이 그 근간으로, 사실 어느정도의 댓가가 따르는 일이었다.


전쟁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이미 알고 있을 사실이겠지만, 적을 쉽게 항복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잔혹한 살육을 통한 멸망의 공포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항복했을 때 포로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 다시 말해 당장 목숨을 건질수 있고,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을때 오히려 강하게 생겨나는 법이다.


황제는 정치적인 부담을 어느정도 지면서도, 제국이 그때까지 입었던 피해에 비했을때, 이들 펄미아들에 대한 살육과 약탈은 최대한 자제했으며, 오히려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로로 받아들였다.


그 덕에 전쟁에서 쉽게 이기긴 했지만, 악감정이 쌓일대로 쌓인 이들 펄미아를 혐오하는 기존 제국민들의 감정을 만족시키면서도, 최대한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이들을 온전히 받아들여서 제국의 일부로 두는 과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황제는 정말 기발한 방법으로 이를 해결했는데, 이들을 각 집에서 첩으로 두도록 장려하는 정책이 바로 그 해답이었다.


말이 첩이지 사실상 노예로 부려먹히며 집안의 허드렛 일은 물론, 밤의 봉사와, 문지기, 심지어는 군역까지 도맡았기에 이들은, 이들의 고달픔에 반비례해서 나아질 제국민의 삶의 질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렇지만, 이는 대단히 절묘한 수요의 절충점이었으며, 그 증거로 이들 펄미아들은 복속된 이후로 한번도 집단 봉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이들이 제국민을 습격하던 이유는 식량 문제와, 배우자의 문제가 제일 컸는데, 사회적 신분과 대우는 낮더라도 이들이 원하던 것들이(비록 이들이 원하던 형태는 아니었지만) 전부 충족된것이나 마찬가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그간 보였던 난폭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각 가정에서 매우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구성원이 되어서 한 시대를 노예 민족으로 조용히 지나갔다고 한다.



얌전하고 순종적으로 지내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제국이 쇠락하기 시작했던 철기시대 말기부터였다.


제국의 경제는 확장주의적인 침략전쟁으로 유지되고 있었고, 그 영토가 지나치게 불어나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새로운 영토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렇지만 어째선지 대부분의 기록에서, 새로운 전쟁을 위한 의결은 전부 과반수 이상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당시의 기록물에 따라 살펴본 바에 따르면, 황족, 귀족, 시민, 천민 등 너나할것 없이 노예로 부리고 있던 펄미아들이 새로운 전쟁에 반대 의사를 보였다는 정황이 있었다.


비록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어디까지나 노예였지만, 각자가 지닌 힘을 생각했을때 놀라울정도로 충성스럽게 헌신하고 순종하던 이들은 이제는 각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문제는 이들의 요구에 통치자들이 휘둘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집 안의 잡무부터 시작해서, 통치의 보조와 심하면 행정까지 도맡아 했던 이들의 발언권은, 그것이 한 국가의 통치자라고 해도,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펄미아들은 자신들이 전쟁에서 주 전력으로 활약해온 만큼, 전쟁에서 피를 흘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기질 자체가 생존에 문제가 없다면 현상을 유지하고 양보하려는 성향이 있었다.


많은 학자들이 이 학설에 대해, 이전 시대의 급진적인 확장과 이어진 습격은 그럼 대체 뭐냐며 따지고 들었지만, 현재 채택된 가설에 따르면 이전 시대의 확장적인 행보는, 당대의 폭발적인 인구수 증가와 그로인한 식량 부족으로 인해 일어났다는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찌 되었건, 통치자들과 국민들은 이들 펄미아들의 반대에 부딛혀, 타국과의 정치적 마찰이 있을때마다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기 일쑤였고, 제국의 거대한 영토는 시간이 갈수록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들어, 현재는 대륙 서쪽 구석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섬과, 그 앞의 산지만을 영토로 보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세월에 따라 국력이 약해지는 와중에 용케도 멸망하지는 않았는데(통치체제나 국호가 바뀐적은 있다), 펄미아들이 어디까지나 양보하는 정책을 선호했다 뿐이지, 실제 전투에 임할때는 이전 시대의 야만을 기리기라도 하듯, 용맹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아닌게 아니라, 이들 펄미아들의 방어에 대한 집착은 편집증의 영역에 가까워서, 본인들의 용맹함에 더해 제국의 선진적인 군사 기술과 미래에 대한 안목까지 배운 이들은, 그 어떤 시대에도 새로운 병기에 있어서 뒤지지 않는 전력을 보유하는데 집중했다.


충성스러운 심복으로서, 자신들의 주인들을 들볶으면서 말이다.


덕분에 현대에 와서도 재래식 전력에 있어서는, 국가 규모를 생각했을때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때때로 주변 국가들의 불안감을 사고 있다.


다행인 점은, 규모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NUTO 등의 여러 국제조약에 앞장서서 가입하고 있는데다, 현대적인 평등과 민주주의가 정착해있는 신사적인 국가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현재의 펄미아들은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며, 의석중 과반수를 차지한 적도 있을 정도로 정치권에서도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 국가의 전통적인 가족관은 인간 남성, 인간 여성, 펄미아로 이루어지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거기다가 여전히 펄미아들은 전근대적인 전통에 따라 집안의 온갖 잡무와 예식을 담당하며, 집안의 남성과 함께 군역을 지며, 여성과 함께 가정을 돌보는것도 여전하다.


과거와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이 가족을 노예된 몸으로 섬기는것이 아닌, 한 가정의 가장으로, 가족의 관리자로서 봉사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 사회에 와서는 그런 오래된 전통조차 조금씩 그 형태를 잃고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펄미아 본인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이 전통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도 저 버러지같은 털뱀년들은 저동네 어디 집구석에서 "주인은 성급하게 굴지 말고, 자, 이렇게 부드럽게 더 만져주시고, 안주인은 너무 힘이 들어갔으니까 이렇게, 궁디팡팡, 힘빼요, 힘, 자 좋아요, 이대로 가요." 라며 침실에까지 기어들어가서 참견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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