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사랑하는 이가 있지만 그와는 신분차이의 문제로 결혼을 금지당한 천민 신분의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슬픔에 잠겨 깊은 숲 속 호수에 몸을 던지려고 하였으나, 전날 비가오는 바람에 축축하게 젖은 땅을 밟고 발이 미끄러져 그이가 선물해 준 금 비녀가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어차피 죽을 거였기에 본래라면 그대로 몸을 던질 터였으나, 죽을 때 죽더라도 최소한 그이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과 같이 가고 싶었던 처자는 비녀를 찾기 위해 무릎까지 잠기는 수위에서 바닥을 헤집는다.


그이의 소중한… 소중한 비녀가…. 항상 품에 넣어 애지중지하며 간직했던 비녀를 이렇게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잃어버리니 억울해서 이대로는 죽을 수가 없다.


결국 치맛자락이 흙탕물에 젖어 지저분한 흙빛깔이 되도록 뒤졌어도 찾지 못한 여인은 그 자리에서 목놓아 울기 시작한다.



얼마나 울었을까, 목이 아파 더이상 우는 소리를 내기도 힘들어진 처녀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내 마음은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은데, 어이 하늘은 이리도 무심하게 맑으오리까.


반쯤 허탈함과 분노를 담은 저주를 내뱉는 말을 누가 듣기라도 한 듯, 호수의 중앙에서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 어찌 그리 서글피 우느뇨, 젊은 아낙네여. "


" 저, 저는 저의 소중한 비녀를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은 누구신지요? "


호수의 중앙에선 백발이 파뿌리 마냥 무성하게 난 노인이 물 위에 서서 여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 나는 산신령일세. 이게 그대가 찾던 비녀인가? "


자신을 산신령이라 소개한 노인은 소매에서 금 비녀를 꺼내보인다.


" 맞습니다.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


" 그대가 원한다면 돌려주겠네. 허나 조건이 있지. "


" 그 조건이라 함은…? "


산신령은 검지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호수를 가리켰다.


" 죽지 말게. "


" ………. "



산신령은 그 말만을 하고서 여인에게 비녀를 돌려주었다.


비녀가 손에 들린 처자는 비녀와 호수를 번갈아 보다, 이윽고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는다.


" 흐윽… 어찌… 어찌 내게 이런 삶이 주어졌나이까. 저는 어찌하여 천하게 태어나, 그이와 이어질 수 없는 것이옵니까. "


산신령은 답하지 않았다. 여인이 자신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 소녀여. 시간이 지나 무릇 성숙한 색기가 배기 시작한 처녀여. 그이를 연모하는 처자여. 애틋한 사랑에 가마솥을 긁는 아낙네여. 지금도 그이를 잊지 못하는 여인이여. "


" 왜… 그러시옵니까? "


" 본디 사람이란 천하지도 귀하지도 않은, 생명 그 자체이니라. 그대는 천하지 않다. 그이도 귀한 사람이 아니다. "


" 허나, 제가 혼인할 수 없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


산신령은 말 없이 소매에서 한 보따리를 꺼낸다.


" 이것은? "


" 한복일세. "


" 어이 갑자기 이런 걸…. "


" 집에가서 입어보게. 그럼 알 테니. "


갑작스러운 일에 여인은 당황하나, 죽고자 했던 마음이 수그러 들면서 산신령의 말을 듣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죽을 수도 없다.



………

……



집으로 돌아온 뒤,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 이건… 기생들이 입는 옷이…? "


야했다. 척 보아도 음란하게 생긴 옷은, 산신령이 준 물건이라기엔 믿기 힘든 색기를 담고 있었다.


" 이런 걸… 어떻게 입으라고…. "


제아무리 천민이라지만, 몸을 파는 기생들 처럼은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고민하던 차에 산신령이 고뇌하는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천하지도 귀하지도 않다고.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

……



땅거미가 지고 보름달이 중천에 떴을 무렵, 한밤중에도 촛불을 킨 채 공부에 몰두하는 남성.


그는 마음에 둔 여인과 혼인을 할 수 없다는 점에 크게 한탄하여,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고 천민도 결혼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치리라 다짐한 채 늦은 시간까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붙들어 매고 있었다.


슬슬 과하게 몰려오는 졸음에 책을 덮을까 하던 차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촛불의 불을 꺼버린다.


" 이상하군. 방 문은 닫혀있는데…. "


뒷정리를 위해 다시 불을 붙이자, 어두워진 방 안을 밝히는 불빛에 그간 가려져있던 인형(人形)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깜짝 놀라며 그것을 쳐다보니, 그 정체는 색기가 흐르는 한복을 입은 약혼녀였다.



" 아니, 낭자 아니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소? 그 옷은 또… "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이 패여 골짜기가 드러난 섶. 그 밑에는 속적삼을 입지 않아 둥그스름한 밑가슴이 보이고, 배꼽이 드러난 복부 아래로는 치맛자락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여미어 허벅지가 드러나있다.


그런 아낙네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나, 어떻게든 눈을 돌려 여인에 대한 예우를 지키고자 했다.


" 저의 낭군님♥ 저만의 낭군님♥ "


" 왜 그러시오 낭자…. "


그러나 그런 그의 노력도 무색하게, 그녀는 네 발로 설설 기어 음란한 몸매를 드러내면서 사랑스러운 그이를 껴안는다.



" 도령은… 저를 사랑하시오리까…? "


" 틀림 없소. "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 제가 천한 신분이어도 좋으십니까? "


" 나는 내가 귀하다고 생각한 적 없소. 마찬가지로 그대가 천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소. "


낭자는 그이가 올곧은 심성을 가졌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 도령, 그렇다면… 제가 사람이 아니게 되어도. 사랑해주시겠나이까? "


" ……물론이오. "


사람이 아니게 된다는 알 수 없는 말이 의미심장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한 걸 눈치없이 언급할 만큼 무신경하지 않은 그였으며, 그의 사랑은 진지한 것이었기에.



" 고맙습니다 낭군님. 낭군님이 있어서 저는, 두려움을 떨칠 수 있어요. "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옷을 벗는다.


그러자 그동안 숨겨왔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 낭자. 당신은…. "


" 조금, 부끄럽습니다. "


" 아니오. 너무나도 아름답구려. "


치켜뜬 눈으로 옥구슬 마냥 빛나는 자줏빛 눈동자. 달빛에 비추어 이슬처럼 빛나는 눈망울.


검은 머리 사이에서 솟아난 여우귀, 그리고 골반 뒤쪽으로 다소곳이 머리를 내미는 꼬리.


그녀는 여우가 된 것이다.



그 후로 둘은 정욕적이고 기나긴 밤을 보냈으며, 다음날 아침이 되어 두 사람은 자취를 감추었다.


가끔 산 속에서 여우의 음란한 울부짖음이 들린다는 소문이 퍼졌으나 누구도 그 실체를 보지 못했다.


산신령이 사는 호숫가에는 그녀가 입었던 한복이 다소곳이 개어져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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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한복 이야기 써달래서 마물화로 써보려 했는데 내가 마물화 요소는 잘 못살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