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나 세력, 도시, 지역 등 세계관 및 설정은 창작 

단, 마물은 대부분 차용



제국의 변경지대를 덮친 마물 연합 세력의 대규모 침공.


전쟁의 징후를 확인한 제국군의 대비에 많은 민간인들을 삽시간에 대피시키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 강간과 함께 포로로 끌려갔다. 마물 연합군의 군세는 매우 위협적으로, 제국 동북부의 주요 거점 도시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름의 국력을 길러왔던 제국은 빠르게 전선의 후퇴를 저지하였다. 주된 방어 거점에서 혈투를 벌여 적을 막거나 야전에서 여러 차례의 기습으로 마물군의 병참을 망가뜨려 진군 속도를 늦추고, 주요 장교들을 사살하였으며 일부 지역을 수복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육체 능력을 가진 마물에게서 승기를 잡기는 역부족이었다.

 외교를 통한 협상은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인해 무산되었으며, 포로 교환은 절대로 응하지 않았다. 더이상 인간 포로들은 포로가 아니라 이미 마물들과 함께인 자신들의 백성이라는 말로 얼버무리려 하였다. 이는 인간들로 하여금 포로들의 처우에 대한 공포심과 분노, 반발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외교 특사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나갔으며, 마물은 협상이 불가한 괴물이라는 소식이 제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침공 이전까지만 해도, 제국 수도에는 소수의 마물이 인간과 공존하며 살았다. 그 마물들은 많은 수가 흡혈귀나 드래곤 등 왕족과 귀족, 자본가들로, 정치, 사업적 이유 등 다양한 이유로 찾아왔던 이들이었다. 그 외에는 사창가의 킬러 퀸이나 정말 순수한 애정을 품고 온 마물들도 있었다. 

양측의 국경이 항상 폐쇄되어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국가, 민간의 교류도 존재했으며 양측의 태도는 매우 유화적이었다.


이 전쟁은 그 모든 조화를 부숴버렸다. 마물이 있는 곳이라면 사창가와 상점 등 모조리 약탈당하고 불탔으며, 일부는 죽임을 당하고 모욕을 당했다. 극소수의 인간 - 마물 부부는 지방으로 도피하거나 쌍으로 잡혀 목숨을 잃기도, 한쪽이 한쪽을 해하기도 했다.

신분과 명망있는 이들은 치안 당국에 의해 분노한 민중으로부터 보호받았으나, 모든 마력과 물리적 힘을 봉인하는 주문, 그리고 재산의 동결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녀들은 사실상 저택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감금 상태에 이르렀으나 그외의 압박은 없었다. 그녀들도 그것이 매우 관대하고 안전한 처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한편 전장에서는 신분을 뛰어넘은 협력이 빛을 발했다. 기사들이 허름한 옷의 징집병들을 험하게 다루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전투가 시작되면 평민 징집병들을 앞서나가며 그들을 격려했다. 


당시의 정치, 사회, 군사적 상황은 다음에 기회가 될 때 깊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기사직을 내던져야만 했던 카를의 이야기에 담기에는 너무나도 길고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카를은 성기사였다. 매우 드물게도 그는 농민 출신이었다. 어떤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를 보였다. 그렇기에 출신 성분에도 불구하고 황제와 교단이 인정하는 성기사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전선이 정체되고 전쟁이 휴전에 이르기까지 그는 온 목숨을 바쳐 헌신했다. 그는 자신의 방어선을 지키며 축복받은 신성력으로 인간들을 정화하고 격려했다. 초반보다 방어선이 조금 후퇴한 카를의 요새는 끝끝내 함락되지 않았으며, 그가 주둔했던 요새의 이름 샤렌 볼은 인간들에겐 승리와 희망의 상징이, 마물들에겐 공포, 오기와 호기심, 그리고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명칭이 되었다.


전쟁이 멈춘 후 카를은 수도의 대성전과 왕성을 방문했다. 이때 그는 들것에 실린 신세로 수도의 성문을 통과해들어왔다. 튼튼한 육체와 정신으로 전국에 명성이 자자했던 카를의 모습은 매말라 축 늘어진 꼴이었다.


"카를... 아무래두..."


"더이상 싸울 일은 없겄네요이... 차래 잘됐어요."


카를은 성기사직을 내려놓았다. 교단과 성기사들은 굳이 떠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었지만, 그는 모든 자리와 제안을 거부하고 대성전에서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카를... 제국의 영웅.. 소식은 들었소이다. 샤렌 볼 근교 마을에서 마물들을 몰아내다가... 한 데몬에게 당하고 놓쳐버렸다는 소식을... 그리구 그대에게 알 수 없는 저주스런 병이 퍼졌다는 사실두 말이우..."


중앙 귀족들에게 초대받은 카를은 영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줄곧 자신을 평민이라 냉대해온 자들이었으며 반드시 카를을 성기사 직에서 내쳐버리리라 계획해왔기 때문이다.

그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명망이 높아졌다는 이유로 잠시 저자세를 취하는 것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가볍게 괴롭히기만 허는 수준이겄지요. 이미 헐만치 했응께 성기사 직은 내려놓을 때가 된 것이죠..."


홀로 막대한 신성력을 소모하며 주변을 정화하고, 혹은 마물의 힘을 억지로 흡수해온 것이 쌓여온 카를은 상당히 부정한 마력이 몸에 축적되어 있었다. 그 육체에 병이 생겨버린 것은 반격 작전에서 한 젊은 데몬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이후였다. 카를은 매우 무기력해져 갑옷을 지탱하지 못할만큼 기력을 잃었으며 또한 며칠 지나지 않아 그의 근육붙어 건강했던 육체는 매우 마른 몸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걱정은 마시우... 그대의 공적을 치하하여 황제 폐하께 경을 동북부의 지방 태수로 봉할 것을 추천할 거요. 언젠간 다시..."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볍게 웃음지어보였다.


"그냥... 농민으로 돌아가게 해주쇼."



"카를... 유감이다게레.."


"원래 자리로 돌아온 건데... 뭐."


번쩍이는 성기사의 갑주.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선망을, 어떤 이에겐 공포를, 어떤 이에겐 질투를 사던 물건이었다.


그것은 극도의 수련과 전투, 죽음의 위기를 겪어낸 자만이 겨우 시험의 자격을 받을 수 있었으며 설령 자격을 받았다고 한들 마지막 단계의 시험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그 갑주는, 결코 수여받은 이가 착용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 신분을 증명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견고함과 장식이 무색하게도 이젠 농촌의 작은 가옥의 한 켠을 차지할 뿐이었다.


"고 새끼들... 던댕때는 아무것두 안핸 놈들이..."


"듣겄다, 듣겄어."


귀족 가문 출신의 볼프강은 카를의 가장 친한 동료였다. 평민 출신에 연연하지 않고 전장에서나 인간으로서나 카를을 인정해주었던 그는 카를의 은퇴와 폐허 정착 과정에서까지 그를 다방면으로 도와주었다.


"아 들으라하라우! 그 새끼들... 이 폐허 뿐인 동북부에 너를 똩아낸 기라구... 타라리 고향에 보내달라구 하디 왜 굳이 일로 왔네?"


중앙 귀족들은 겉으로는 카를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했을지 모르나 이미 그를 전쟁이 휩쓸고 간 동북부 태수로 추천했던 것부터 그 속내는 뻔했다. 사내는 싸울 기력도, 마음도 없었다.


"아야... 그래도 여 바로 앞에가 도시 있잖냐. 동북부 제일 큰 동네여. ... 성기사 신분은 아니어도 아직 충분히 봉사할 수 있어야... 동북부 재건... 말이제."


 볼프강은 그를 답답하게 쳐다보았다. 적과 귀족 모두에게 강직했던 그가 이젠 너무나도 무기력한 것에 그는 분개했다.


"그리구, 비슬비슬 걷는 기 말구는 암 것도 못하는 놈이 왜 하인도, 경비병도 거부한 기야?"


"하인 부리고 경비원 달고 댕기는 농민 봤냐? 언능 니는 서북으로 돌아가서 하인이랑 경비병 데려다가 저택에서 잔칫상이나 차려라개라."


카를은 실없이 웃었다. 볼프강은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 카를이 모조리 거절했던 제국의 포상을 억지로 수레째 받도록 해준 그의 친구는 한숨을 쉬었다.


"야야, 됐어, 됐다우. 네놈 고딥불통인 건 똑같은디 고놈들한테 맞설 생각은 없다니! 포기하자우. 기냥 고통없이 날래 둑으라."


"아따... 고맙네이... 겁나게."


볼프강은 몇 없는 카를의 짐을 옮겨주고 그의 생활이 넉넉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떠날 때까지 그를 쫓아낸 귀족들과 카를에게 병을 남기고 도망친 데몬에 대한 분노, 그리고 너무나 마물의 영역과 가까운 카를의 집을 걱정하며 말을 타고 떠났다. 

곧 카를의 집에는 적막이 가득찼다.


"후... 조용한 것이 최고제."


카를은 집 밖 통나무 의자에 앉아 고요한 주변을 바라보았다. 곧 가을도 지나가고 겨울이 찾아올 때였다. 추수는 어림도 없었다. 

동북부의 기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카를의 고향이었으면 아직 따스했을 날씨가 벌써 칼바람으로 피부를 때려댔다. 오랜 전쟁으로 동북부의 날씨에 익숙해진 것이 그에겐 다행이었다.


전장이 되어 짓밟힌 밭과 삶의 터전들, 마물들에게 포위당해가는 와중에도 겨우겨우 항쟁했던 동북부 최대의 도시 알레슈파스는 무너진 성벽, 널브러진 시체와 무구, 주변에서 몰려든 피난민들 탓에 한창 혼란스러웠다.

카를은 일부러 성벽 바깥의 쓸쓸함을 택했다. 그런 소란에 더는 시달리고 싶지 않았기에.


알레슈파스는 본디 국경지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동북부의 꽤 넓은 지역이 마물들의 손아귀에 떨어져 그곳의 상황은 전혀 알 길이 없게 되었고, 제국은 계속해서 마물 측에 영토 환원을 요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탓에, 이제 마물의 영역과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이곳이었다. 북쪽으로 조금만가면 나왔을 마을들과 도시, 성채는 공포스럽고 음산한 기운과 소름끼치는 소리가 마구 들려오는 미지의 영역이 되었다.


"아아... 전쟁은 끝났지마는..."


카를은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명 인간이 아닌 그 존재들, 기괴하게도 날개를 단 그 괴물들이 한때 제국의 영역이었을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카를은 그곳에 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인간 백성들의 처참할 말로에 대해 상상했다. 아마 그 마물들에게 온갖 능욕을 당하고 육체는 더럽혀지며 끝내 죽임을 당했으리라고. 


카를은 그냥 생각하는 것을 관두었다. 제국에 대한 충성을 바쳐 전쟁에서 싸웠으면 그걸로 됐다는 것이 그의 위안거리였다.


"에휴, 집도 겁나 크게 지어놨구만. 오두막이면 된다고 말을 해봤자 아주..."


카를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다. 결코 대저택의 크기는 아닌 대도시에선 흔하게 보일 2층의 가정집. 그에겐 그 집마저 과분했다.



카를이 정착한 지 어연 한 달. 무너졌던 알레슈파스의 성벽은 개보수가 한창이었고 대부분의 피난민은 겨울을 나기 위해 도시에 남아 구제를 받았다.

알레슈파스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자리했던 카를은 최대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자 했다. 경의와 감사는 황제와 신께나 드리라는 마음으로, 그는 알레슈파스에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카를의 집은 도시 성벽을 둘러싼 황무지 언덕에 홀로 우뚝 솟은 집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카를은 마음편히 기뻐했다ㅡ



그는 축 처진 몸을 이끌고 가끔 바람을 쐬러 나와서 앉아있다가 들어가거나 집에서 홀로 기도, 서적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북쪽 지역의 하늘은 늘 그가 주시하는 곳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간혹 경계를 넘어오는 마물들도 존재했다. 그들은 초소의 위병에게 경고 및 생포당하였다. 잡힌 그녀들은 며칠 뒤 알레슈파스로 이송되었으며, 그날 도시가 한동안 비명과 함성 등으로 소란스러웠던 이후 카를은 다시는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마 분노한 민중의 보복을 당했으리라고 그는 넘겼다.

카를은 이미 너무 많은 마물들을 죽이고, 마물들에게 너무 많은 동료와 부하를 잃었으며 인간과 마물 사이엔 이미 너무 큰 장벽이 지어졌음을 알았다. 그를 포함한 인간들은 왜 마물 연합 세력이 제국을 침공했는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어디보자.. 귀한 종이를 수레째 줘븐 건 고마운 일이구마이."


그는 지나친 무료함을 달래고 비록 끝난 것이나 다름 없으나 청춘을 허무하게 날랴보내지 않기 위해 첫날부터 일기를 썼다. 그는 맨 앞장에 이렇게 적었다.


'언제 끊겨도 좋은 초라한 일기장. 더 미련삼을 것 없는 인생. 부디 더는 두 화산이 서로를 무너뜨리려하지 않기를.'



강한 눈보라 휘몰아치는 계절. 카를은 며칠 간 밖에 나가지 않았다. 너무 매말라 비틀어질 만큼 초라해진 그의 몸매는 정말 극히 약한 마물에게도 당할만큼 약했다. 그는 봄이 오더라도 자신이 노동을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가 원통한 것은 그것 하나였다.


 카를은 그날 밤도 신에게 기도올리며 하루를 끝마쳤다. 또한 그는 과거부터 남몰래 품어온 연심을 떠올리며 침대에 누웠다.


사랑을 관장하는 에로스의 종, 큐피드. 과거 아주 살짝 방문했던 천계에서 눈이 맞았으나 참전 및 은퇴로 이름조차 모르며 얼굴도 볼 수 없게 된 그녀. 그러나 그는 그 다시는 못 볼 아름다운 얼굴을 눈을 감을 때마다 머릿 속에 그려본다. 마치 꿈에라도 나와달라 애원하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나 카를은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에 든다.

카를도 알고 있다. 죽어서도 천계에 가지 못할 것을. 그녀가 죄많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을. 그는 언젠가 죽을 때에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볼 것이다.



다음날 아침, 거친 눈보라는 잠잠해지고 바깥은 두껍게 눈이 쌓인 세상이 되었다. 그는 투박한 털가죽 옷과 모자를 겨우 쓰고 지팡이를 챙겨 집 밖을 나섰다. 계단 위 기단부에 지어진 그의 집은 눈이 쌓여도 문이 열리지 않는 일은 없었다.


그는 오랜만에 조금 멀리 돌아다니기로 했다. 아직 사람이 정착하지 않은 주변 폐허, 그리고 경계선에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응? 거! 멈치소! 잉게는 이염하오! 돌라가소."


"잠깐만 거.. 구경도 어렵겄는가?"


그는 경계선 부근에 접근하자 위병에게 붙잡혔다. 성기사로써의 버릇 탓에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접근해버린 것이었다.


"안 데오! 돌라가소!"


"고생들 허시게..."


그는 몸을 이끌고 뒤를 돌았다. 카를은 잠깐 사이 경계선 너머에서 괴상한 식물을 발견했다. 아마 사람을 유인해 잡아먹는다던 그 마물이었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인간의 땅이 완전히 마물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카를은 하는 수 없이 도시를 향했다. 딱히 들려보고 싶지 않았던 알레슈파스로 가는 까닭은 역시 호기심이었다. 


성벽의 복구 작업도 거의 완료되가는 도시 성문 앞에 이르자 위병들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 아마 저 주택 주인인가 보오?"


"중앙에서 보냈는갑구만. 그렇소. 저가 내 집이요."


"뭐하는 양반인줄은 몰라두.. 그런 짓은 관두는 게 좋을 거요. 여기는 최전방이라, 저 뫼랑 숲 속에 아직 마물이 남아있을 지두 모르니."


"갠잔헝께 냅두쇼. 거... 심심해서 미쳐불 거같은 것이 문제긴 문제요."


"뭐 댁 맘대루 하시오. 이 도시가 난장판으루 한창 재밌었을 때 안온 건 아쉽겠수다.'


위병은 그를 들여보내주었다. 그만큼 알레슈파스는 안정되어감을 뜻했다. 


성문 앞의 거리는 나름대로 정비되어 있었다. 비록 그게 번듯한 집은 아니었지만 다 부서진 잔해를 긁어모아 최대한 깔끔하게 급조해본 결과였다. 물론 2층 이상 짓는 건 어림없었다.


"이보소. 곰만 저 바까티서 왔소?"


한 중년의 남성이 카를을 붙잡았다. 그는 다리를 다쳤는지 부목을 대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근디요?"


"금메, 바까티에 마물으 본 게있소? 아죽 아무도 성문으 못나가고 있소."


"접경지대는 군인이 지키고, 주변서 마물 본 적은 읎구만요."


카를의 대답에도 여전히 남자는 두려움에 찬 눈을 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도 매한가지였다. 그렇지만 조금 특이한 사람 취급에 지나지 않던 카를이 그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양호했다. 그는 기왕 나온 김에 성당에 들려보기로 했다.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알레슈파스 대성당은 마물에 대한 항전 당시 이상한 식물들이 솟아올라 곳곳을 파괴하였다고 전한다. 정말 고딕 양식의 뾰족한 첨탑과 스테인드 글라스 곳곳은 보수 공사가 진행중으로, 상당히 훼손되어있었다.

카를은 성당 앞에 사제복을 입고 맥없이 앉아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예배는 현재두 집전하고 있지만... 내부 제단마저 파괴되어 임시 제단을 급조하였소. 한동안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두 못할 만큼 엉망이었다오."


성당 앞의 사제는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한을 풀어볼 곳이 여지껏 없었다는 듯, 가난한 이방인 행색의 카를에게 거리낌없이 말했다.


"이곳 내부를 몇 주간 온 시민이 정리했으므로 가장 먼저 진행한 것은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여주는 것이었소. ...시신에 남은 미약한 마물의 힘이 뛰쳐나오리란 생각은 못했지. 모두 한곳에 잡아놓거 파괴하기 위해... 또다시 성당을 폐쇄하고 온갖 주문을 걸어놓구 의식을 거행했다오. 꼬박 나흘 밤을 세야만 했소.. 그게 끝난 것이 바로 어제로군."


사제의 얼굴은 매우 수척했다. 사제는 카를보다는 나이가 많아보였으나 여전히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신실허신 사제 님이신가 보네요이... 주름살이나 흰머리는 딱히 안보잉께 말이에요."


"그렇소? 아... 글쎄올시다. 머리가 한움큼 정도는 빠졌던 것같소만. 으흐흐..."


"근디... 참 친절도 하셔요. 아니 나같이 허름허고 딱봐도 영 깔끔허도 않은 놈이 거는 말에 답도 다 해주시고.."


"모든 성도는 주께서 보살피신다오. 감히 사제가 함부로 다루겠소? ...실은, 그대에게서 범상찮은 기운이 느껴져서 말이오. 겉모습이야 흔한 농민과 같지만 속은 꽤나 비범한 것같단 말이지."


카를은 혹여나 데몬에 의한 병이 자신을 마물같은 존재로 만든 것인지 의심했다. 


"하하. 나쁜 뜻이 아니외다. 그대는 꼭 신의 축복을 받은 것같소. 그리고... 마물과두 관련이 있군. 전장에서 수없이 많은 마물과 싸운 것이 분명하오. 그리구 신성력을 다루어 정화를 행한 적두 있나보군."


"어떻게... 그것을 다 아셨대요?"


"그야 그대는 성기사 카를이 아니오? 보자마자 그 빛나는 얼굴을 떠올렸소. 몹쓸 병에 걸려서 은퇴하구 그 신변은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더니... 마물과 가장 가까운 위험한 곳 성벽 바깥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게 말이 되오?"


사제는 크게 웃었다. 카를른 혹시나 주변에서 들을까 노심초사했다.


"아따, 누가 듣겄어요. 인자 조용히 살아가고 싶단 말이에요."


"물론 알고 있소. 그러니 이런 선택을 하였겠지. 정말... 병세가 심하긴 한가보오. 그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라버렸을 줄은 상상두 못했소. 꼭... 서큐버스한테 당한 것같군. 아, 실례를 범했소이다. 미안하오."


아마 사제는 몰랐겠을 거라 생각했지만, 카를에게 서큐버스란 꽤나 불편한 존재였다. 이미 살해해온 여러 마물 중에서도 그 존재는 독보적인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갠잔해요. 요즘도 고런 마물들이 성벽 안에서 발견된가요? 거 저번에 위병이 잡아온 날개달린 것들 몇 마리를 어떻게 해부렀잖애요?"


"아... 그 조류 비스무리한 녀석들 말인가... 그걸 알면 어떻게 됐는지두 다 짐작이 가지 않소? 얼마 전까지 그것들을 광장에 걸어놓는 짓거리를 하길래... 냉큼 불태워버렸소이다. 글쎄... 그 녀석들을 굳이 도시로 가져온 것두 희한한데 또 시체를 만들어서 참 번거로웠지. 그것들 외엔 딱히 들은 바가 없소. 전쟁 전에는 마물들이 꽤 자주 들르는 도시였는데.. 아마 민중이 가만두지 않았겠지. 모두 어쩔 수 없는 것이오. 전쟁의 명분조차 거짓으로라도 내걸지 않고 쳐들어왔으니 말이오."


"여그 주민들은 아직 성벽 배갓이 위험헌줄 안당께요."


"그야... 아직은 정말루 위험하니 그렇소. 주민들은 봄 전까지 절대루 성벽 배깥으루 나가선 안되오. 왠 집 하나가 배깥에 생겼대길래 뭔가 했더니... 그대였군."


"눈보라가 치건 날이 맑건 마물은 저 접경지대 랑께나 북쪽 영토 하날서 날라다니기만 허지.."


"그래두 조심하시오. 어느 날 그대 집에 이상한 그림자라두 생길지 모르니."


카를과 사제는 꽤나 오래 대화를 주고 받았다. 얼마 뒤, 사제는 일이 있어 자리를 먼저 떠버렸고 카를도 성당 앞을 떠나 시장으로 들어갔다.


시장은 그리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제국으로부터 받는 지원 물자로 연명하는 시민과 피난민들이 사고 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카를은 영 우울한 시장을 넘어 조금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아마 그곳은... 


"사창가... 구마이.."


분명한 것은 업소가 존재하고, 드나드는 이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앗아간 전쟁의 고통을 잊기 위해 배급 물자마저 맞바꾸며 쾌락을 찾는 불쌍한 이들이었으리라. 카를은 처음으로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


"부디 뿔달린 창부헌테 홀리지만 말기를."


카를은 그대로 뒤를 돌아 그 거리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