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토눌라의 난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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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트릴랑의 결심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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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수녀는 다시 몬탄도레 수도원으로 가서 하룻밤을 묵은 뒤, 새벽에 출발하여 해질녘에 무와송에 다다라 오베르겐 플렌플로리종이라는 여관을 찾았다. 그는 여관의 주인인 그 지역 토끼잡이의 둘째 아들에게 파보리제르란 노인을 아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이 한숨을 한 번 깊게 쉬고는 말했다.


"기억합니다. 그가 온 지 벌써 십오 년은 더 지났구려. 딸이 파리 왕비의 시녀가 되었다며 따라가다 병에 걸려서 여기 묵었는데, 사흘이 지나도 낫질 않아서 딸네 부부가 먼저 출발했지요. 그런데 그 영감, 병세가 점점 더 심해져서 눈까지 멀어 버렸지 뭡니까. 미리 받은 숙박비도 떨어지고, 딸네 부부는 편지 한 통 안 보내고 소식이 끊겼고, 그래도 아픈 사람 쫓아내기 뭐해서 삼 년 동안은 그대로 뒀는데, 제게도 먹여 살릴 식구가 있는지라 내보낼 수밖에 없었소이다. 지금은 거지가 돼서 나루터 주변만 서성이고 있소. 수녀님, 제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수녀는 여관 주인에게 그동안 파보리제르가 내지 못한 밀린 숙박비를 내어 주고, 종이와 깃털을 빌려 그 지역 신부에게 여관 주인의 죄를 용서할 것을 청하는 글을 써 주었다. 그가 울면서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하였지만, 수녀는 하느님께 감사하라는 말만 남기고 문을 나서서 나루터로 갔다. 정말로 그곳에 늙은 거지가 횃불을 거는 돌기둥 아래에 기댄 채 쭈그려 앉아 있었는데, 불빛에 비친 그 눈이 눈동자가 뿌옇게 되어 얼핏 보면 흰자밖에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수녀가 노인에게 말을 건네자, 그가 급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내 딸의 목소리다! 플로브릴레가 왔느냐? 이 배은망덕한 년아! 내가 죽은 어미 몫까지 네 뒷바라지 해 줘서 왕비의 시녀로 만들어 주었건만 아비를 몇 년씩이나 버려 두고 이제야 찾아오느냐!"


수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딸이라고 부르는 이 노인이 파보리제르임을 확신하고, 그를 진정시킨 뒤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할아버님, 저는 할아버님의 딸이 아니라 손녀입니다. 그리고 어머님, 아니 따님은 할아버님을 버리려 한 것이 아닙니다."


파보리제르는 자신의 딸과 같은 목소리를 가진 여인이 스스로를 자신의 손녀라 소개한 뒤에 이어 말한 끔찍한 진실을 듣고 십몇 년만에 뜨거운 눈물을 터뜨리며 울부짖었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이 늙은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본인도 아니고 자식에게 이런 고통을 안기시나이까! 그 얌전한 아이가 그리 허무하게 죽다니! 도적에게 이름에 지위에 남편마저 빼앗기다니! 차라리 정말로 내가 버려지는 편이 나았을 것을! 딸아! 내 딸아!"


수녀는 자신 또한 테펜수스와 만났을 때 눈물을 참지 못했던 것을 상기하고, 조부가 스스로 진정할 때까지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결국 파보리제르는 하늘에서 달이 두 인치를 이동하고 나서야 겨우 눈물을 거두었는데, 슬픔이 가신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울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다른 이의 말을 들어 줄 수 있는 상태로 보였기 때문에 수녀가 다시 말을 걸었다.


"할아버님, 우선 눈부터 보여 주십시오. 할아버님은 신체가 건강하시어 기사까지 되셨다는데, 어찌하여 장님이 되셨습니까?"


그러자 파보리제르가 답하였다.


"처음에 파리로 가는 길에 몸이 나른해지고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여관에서 쉬었는데, 낫기는커녕 머리가 아파오고, 뒤이어 눈 주변에 짓이겨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지더니, 계절이 바뀌어도 딸이 오지 않아서 원망하는 동안 점점 시야가 흐려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동네 사제수사도 낫게 해 주질 못하더구나."


마리 수녀는 그 말을 듣고 노인의 손을 양손으로 잡아 모은 뒤,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이 노인이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러자 노인의 눈에서 뿌연 기운이 가시었다.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된 파보르제르가 처음으로 본 것은 자신의 딸이 열여섯이었을 때와 똑같이 생겼지만 눈만은 사위를 닮은, 수도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네가 정녕 나의 손녀로구나."


노인이 눈은 울고 입은 웃으며 이렇게 말하니, 마리 수녀가 대답하며 말하였다.


"할아버님, 저는 어머니의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복수를 마치려면 할아버님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저와 함께 루앙으로 가 주실 수 있으십니까?"


파보리제르는 손녀의 부탁에, 방금과는 다른 굳건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오냐, 내 딸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다면, 루앙이든 지옥이든 가고말고."


노인은 기적의 은혜를 받은 덕에 정정하게 걸을 수 있었다. 마리 수녀는 그를 데리고 아까 그 여관으로 가 노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내쫓은 주인을 용서하게 한 뒤, 날이 밝자 다시 루앙을 향하여 이틀 만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곧장 영주의 저택으로 가서 수문장에게 요청하였다.


"옛 기사이자 교관인 파보리제르로 하여금 영주님을 뵙게 해 주십시오. 그분께 청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문장은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모르오. 신원이 명확하지 않은 자를 함부로 영주님께 데려다 줄 순 없소."


사실 파보리제르가 루앙을 떠난 지 십육 년이나 흐르는 바람에 그를 기억하는 이가 병사들 중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두 사람이 영주님을 뵙지 못할까 염려하던 찰나, 갑자기 뒤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아니, 파보리제르 공 아니십니까? 파리에 사시는 게 아니셨습니까?"


테펜수스의 아버지이자 마리 수녀의 친할아버지인 로랑 프로스페레누 신부였다. 그는 처음 영주의 초청을 받은 이후에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자주 루앙에 들렀는데, 마침 그가 온 날과 두 사람이 도착한 날이 겹쳤다. 파보리제르는 그를 단번에 알아보고는 그동안 자신이 겪고 마리 수녀로부터 들은 것을 낱낱이 고하였고, 그걸 들은 신부는 아들이 수난을 당한 것에 격노하여 즉시 영주를 찾아가 사정하였다. 영주와 그의 아내 또한 모든 사실을 듣고 즉시 임금을 알현할 채비를 갖추고 상소문을 올렸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인정받으시어 온 프랑크인의 왕이자 정교(正敎)의 진정한 보호자로서 세상 만민으로부터 경배 받을 자격을 갖추신 분께 루앙의 영주가 감히 청하오니 윤허하소서. 이 미천한 자가 십육 년 전에 조서에 따라 시녀 플로브릴레를 파리로 보냈으나, 데보르데 다비디트라는 사악한 계집이 플로브릴레를 죽이고 그의 이름과 명예와 남편을 훔쳐 파리로 가 그의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소인에게 이 사실을 알린 자는 플로브릴레의 아버지이자 소인의 충실한 종이던 노기사 파보리제르와, 임신부였던 플로브릴레의 뱃속에서 꺼내어져 죽을 운명이었으나 정의로우신 주님께 보호를 받고 자금까지 살아남은 마리 드 로셀리에 수녀입니다. 이들이 전한 바가 정녕 거짓이 아닌지 밝혀내기 위하여, 소신이 한때 그의 주인이었던 아내를 데리고 직접 파리로 가 지금 폐하의 궁전에서 플로브릴레의 이름을 대는 자가 소신들이 일던 그 여자가 맞는지 확인하고자 하니, 이를 허락하시기를 청하나이다. 또한, 정녕 그 여자가 저희가 알던 플로브릴레가 아니라면 그자를 벌하시고, 나아가 에우로파의 영도자께 진상한 것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 이 루앙의 치(恥)를 죄하시기를 청하나이다.'


상소문을 받은 클로타르 2세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시종들에게 당장 루앙 지방관과 그의 아내, 그리고 노기사와 수녀를 어전에 들라 할 것과 왕비의 시녀 중 플로브릴레라고 불리는 이를 대령할 것을 명하였다. 왕비가 명령대로 플로브릴레를 자처하는 시녀를 데려오자, 왕이 어전에 들인 네 사람 중 수녀를 제외한 이들 앞에 그 시녀를 불러 세우고 말하였다.


"플로브릴레여, 이들이 누군지 아는가? 그리고 그대들 또한 이 여자를 본 적이 있는가?"


플로브릴레를 자처하는 시녀는 그들을 만난 적이 없다고 증언하였고, 세 사람 또한 주님께 맹세코 그를 모른다고 답하였다. 이에 클로타르 2세가 크게 진노하여, 오랜 충신들이 그 모습을 보고 금상(今上)의 망모(亡母) 프레데군트 왕비가 마녀 브룬힐트의 농간에 스러질 무렵 그 임종을 지키던 당시 왕자의 모습을 연상할 정도였다. 


"네년이 십육 년씩이나 나를 농락하였구나! 네 앞에 선 이들은 플로브릴레의 아버지와 루앙의 영주 부부다! 네가 왕비의 시녀가 되도록 힘써 준 이들을 어찌 모르고, 너의 보살핌을 받았다는 이들은 또 왜 너를 모르느냐! 너희 모두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면 네년이 플로브릴레가 아닌 것이렸다!"


왕은 플로브릴레를 자처한 자를 잡아 두고, 테펜수스와 그의 가짜 하녀까지 불러들여 모든 진상을 들어 진짜 플로브릴레가 이미 죽었고 왕성에서 일하던 자는 그를 죽이고 사칭한 악녀 데보르데 다비디트라는 사실을 온전히 파악하였다. 뒤이어 센 강에서 여전히 사공으로 살던 리오파데 프륀과 그 부하들도 잡아들인 뒤,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하였다.


'살인자이자 왕을 능멸한 사기꾼인 데보르데 다비디트와 공범 리오파데 프륀, 그리고 그를 따른 계집 두 명을 피해자 플로브릴레가 죽은 강변으로 끌고 가 그 추악한 육신들이 형체를 잃을 때까지 매질하라. 루앙의 영주는 도적이 왕비를 보필하도록 직접 술수를 쓰지 않았으니, 그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 시체를 강에 버린 다음에는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피해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올려라. 그렇게 해야 비로소 그가 안식을 누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