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이 제 편지에 답해주실 거라곤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무슨 일을 준비하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연락 좀 자주 해주세요.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을까
얼마나 걱정됐는지 아십니까?
하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걸음해주신다고 하시니


이 동생은 지금


아주아주 행복하답니다.



이미 보셨겠지만, 고향 상태가 말이 아닐 겁니다. 하하.
형님이 떠나신 그날 이후로 불미스러운 사건도 여럿 있었고,
페일 산맥에서 엄청난 수의 네케르들이 출현해서,
몸이 10개라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하하!


무튼 예상보다 길어진 탐사로 영지를 관리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답니다.


하지만 형님도 아시잖아요?
영지 내에서의 제 입지가 어떠한지.


저는 사실상 숙부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니까요.


형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영지로 출발할 채비를 하고 있으니,


부끄럽지만.. 제가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영지를 잠시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숙부님도 마침 자리를 비우셨으니, 간섭할 이는 없을 겁니다.
몇 가지의 간단한 업무만 끝내면 충분할 거에요.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뵙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형님.






아론은 충직하지만 고용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아
많이 미숙해서요,
형님이 하실 일은 여기에 따로 적어두겠습니다.


잘 해내주실 거라 믿지만, 다만 걱정스러운 건.
형님께서 그리 좋지 않은 시기에
고향에 방문해주셨다는 겁니다.


저희 가문이 세간에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형님이 떠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요.


요즈음 무슨 괴소문이 또 돌고 있는건지
영지 내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아요.


뭐, 제가 영지에 도착하면 전부 해결할 수 있으니
형님께서 크게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하하!


부디 제가 도착할 때까지 별 탈 없이 지내주시길.









1.
우선, 이 편지에 적혀있는 순서대로
똑같이 따라주셔야 합니다.
지난번처럼 돌발행동을 벌이시면 아주 곤란합니다.


2.
이 편지를 영지 내의 그 누구와도 공유하시면 안됩니다.
형님만을 위해 쓰여진 러브레터라고 생각해주세요. 하하!


3.
화단에 널브러져 있는 푸른 장미들을 버려주셔야 합니다.
누군가가 자꾸만 꽃들을 짓밟고 있어서요.

아니, 탐사 정행 전날까지도 기어이 화단을 망쳐놓더라니까요?

형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던 화단이었는데.

다른 이의 손이 타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아
그날로 화단 관리는 당분간 방치하라 명하여 두었습니다.

정리가 끝나시면 새로 심을 꽃은 형님께서 정하시면 됩니다.

이번엔 어떤 꽃을 고르셨을지 궁금하군요.


4.
아론과 함께 별궁의 모든 창문을 열어놓으세요.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라곤 하지만
일주일에 1번은 꼭 환기시키려고 노력중입니다.

도중에 아론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든
절대 귀 기울여 듣지도 말고 믿지도 마세요.



5.
주방에 있는 흑단나무 목재 땔감 한 개와 성냥 한 갑,
세 번째 서랍 속 식칼을 꺼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기세요.

주방장이 사라진 물건들에 대해 물어도
모른 척 잡아떼셔야 합니다.

아, 남은 식칼은 단 1개 뿐일테니 그걸 챙기시면 될 겁니다.

그럼 주방장은 뭘로 요리하냐고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주방장은 어떤 수를 써서든
그의 요리를 완성시키는 능력자거든요.


6.
형님의 침실에 있는 순록 박제 모형을
거꾸로 뒤집어놓으세요.

다음날 박제 모형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더라도,
놀라실 필요 전혀 없이 다시 거꾸로 뒤집어주시면 됩니다.
간단하죠?



7.
자정 이후, 자신을 '에밀리'라고 소개하는 시종이
형님의 방문을 두들긴다면,
어떤 말에도 대답해주어선 안됩니다.

만약 어긴다면, 그 즉시 눈알과 혀를 뽑아간다고 합니다.

이건 하녀들 사이에서 떠도는 괴담 같은건데,

혹시 모르잖아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8.
챙겨놓았던 식칼을 아론에게 건네세요.

그 뒤는 아론이 모두 알아서 잘 할 겁니다.

아마.

아, 아론이 비스킷을 하나 줄 겁니다.
절대 드시지 말고 잘 가지고 계세요.



9.
형님께 드리려 준비한 향수가 있습니다.
형님께서 쓰시던 침실의 침대 밑을 뒤져 금고를 찾아내세요.

비밀번호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죠?

가장 좋아하시던 향으로 만들었으니 맘에 드실겁니다.

비상시에도 사용하기 용이하게끔
휴대용으로 작게 만들었으니
항시 몸에 지녀주셨으면 합니다.



10.
미친 척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신으로 본궁 전체를 활보하거나,
정원 분수대에 몸을 맡겨보세요.



11.
혹여나 시종이 죽거나 하는 위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일단 응접실 벽로 속의 줄을 당겨요.
꼭 당기셔야 합니다. 저번처럼 새까맣게 잊어먹지 마시고.

그리고나서, 챙겨놓은 목재와 성냥 한 갑을 이용해
벽로에 불을 붙이세요.

영지 곳곳에서 피어날 불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하네요.



12.
3층 복도의 노란 앵무새에게 비스킷을 먹여주실 수 있나요?

아론에게 받은 한 조각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겁니다.

고자질쟁이에겐 만족감을 안겨줘야 할 필요가 있죠.



13.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복도를 배회하는 하녀들을 조심하세요.

제 옛주인께 목례조차도 하지 않는 버릇없는 것들.

늘 그랬듯 뒤에서 형님을 가십 따위로 취급하고 있을 겁니다.



14.
숲에 들어가실 일이 생기셨을 때는
제가 드린 향수를 반드시 몸에 뿌리셔야 합니다. 제발.



15. 아론을 찾으세요.



16.
영지 내에서 거울을 보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두 깨뜨리세요.



17.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들면,
즉시 향수를 뿌려요.



18.
아론을 찾으셨다면 그가 여전히 맥동하고 있는지 확인하세요.



19.
그럴 리 없겠지만,
아직까지도 아론이 살아있다면.

그 즉시 도망치셔야 합니다.

아, 그가 쥐고 있을 식칼을 챙겨오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겁니다.

지난번처럼 맨손으로 싸울 순 없잖아요?



20.
네케르 군집이 영지를 습격해올 겁니다.
맞설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시고,
곧장 형님의 침실로 숨으세요.



21.
아론에게 일어난 일은 아무에게도 발설하거나 보고하지 말고

인기척을 최대한 피해 곧장 형님의 침실로 돌아가세요.

이젠 몇 남아있지 않을테니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22.
주방장이 분신해도 절대 그를 도우면 안됩니다.
그는 항상 꿈꿔왔던 목표를 막 달성했으니까요.



23.
끈질기게도 목숨을 부지한 하녀들의 비명이
형님을 괴롭힌다면,

그 즉시 향수를 꺼내 얼굴에 3번 분사하세요.



24.
영지 곳곳에서 끝을 모를 단말마가 들려와도,
형님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안심하세요.



25.
무사히 침실에 도착하셨나요?
만약 도착하셨다면 당장 문을 잠그셔야 합니다.
누군가 침입할 수도 있으니까요.

여기서부턴 저도 처음이네요.



26.
침실로 들어오셨나요?

방 내부의 모든 것은 사라지고,

아마, 큰 마법진과 날카롭게 벼려진

검 한 자루가 놓여있을 겁니다.

마법진 중앙에 편히 앉으시고 검을 쥐세요.



27.
아, 모든 문은 굳게 잠그되,
침대 기준 왼쪽 창문만은 활짝 열어젖히셔야 합니다.



28.
"아아아!" 모든 창문 너머로 쏟아내세요.

드디어!



29.
다시 마법진 중앙에 앉고,
검을 쥔 다음,
심장에 갖다 대세요.



....많이 긴장하셨나 보군요

괜찮을 겁니다.

부디 하나뿐인 동생의 말을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30.
천천히. 검을 당기세요.

장기를 가르는 고통을 음미하며 자살하세요.



31.
꺼져가는 시야 속에 담길 제 모습을 봐도 놀라지 마세요.
형님은 형님의 본분을 다했습니다.


이 창문은 넘어오기가 약간 힘드네요.

만약 다음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오른쪽 창문을 사용해 봐야겠어요.





이제 그만 편히 쉬세요, 형님.

이후의 일은 모두 제게 맡겨요.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든,

형님을 위해서라면 전,
그 어떤 상스럽고 끔찍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지금도 이러고 있는 걸요, 하하.







영지도, 가문의 평판도, 형의 입지, 저의 입지마저도.


모두 이전의 영광을 되찾겠죠.


우리의 작은 염원이 모여 마침내 결실을 맺었어요.


벽로 속 흑단나무 목재에서 시작된 작은 불씨가
영지 전체로 퍼진 것처럼요.


형님이 원했던 모든 것들이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형님 자신의 손으로 말이에요.


아아, 영지가 불타오르는 게 형님께도 보이실지 모르겠습니다.


끝이 없는 처절한 단말마.


비강을 뚫고 들어오는 매캐한 연기.


고요히 내려앉은 어둠.


제 옆에 뉘인 시체 하나.


마치 아바돈에 입성한 것만 같아요.


모든 것이 이뤄진 이곳이 비로소 천국일 터인데.


형님께서 너무 멀리 가시기 전에, 저도 곧 뒤를 따르겠습니다.






카델 프로드 세이아스.





에르아가 당신과 함께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