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세계를 여행 중이다.


히피처럼 자유롭게 유랑하고 싶지만 실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여행 내내 나를 짓누르고 있다.


미니밴 버스를 타고 여섯 시간 남짓 달려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가 체크인을 한다.


외관은 허름하지만 깔끔하게 관리된, 무엇보다도 객실 창으로 바다가 보이는 꽤 괜찮은 게스트하우스다.


공용공간의 널찍한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자니 푸근한 인상의 주인 아저씨가 웰컴 드링크를 건넨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한 모금 들이켜본다. 아찔할 만큼 달다.


어제 업로드한 유튜브 브이로그의 조회수를 확인해본다. 39회. 지난 주에 업로드한 것은 48회. 아무래도 이걸로 밥을 벌어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지금 자유롭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발 밑은 언제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4인용 객실로 들어가 짐을 푼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다른 숙박객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아무도 오지 않아 마음 편히 혼자 쓰면 좋을 텐데.


커튼을 완전히 걷고 창밖의 푸른 바다를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이층침대 옆 작은 선반에는 숙소에서 지켜야 할 룰이 적힌 코팅된 종이 한 장이 놓여 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체크인과 체크아웃 시간 같은 평범한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황당한 이야기들이 껴있다.


바다를 너무 오래 바라보지 말 것? 이 나라에도 나폴리탄 괴담이 인기 있나? 파도 칠 때 해초가 보인다면 어쩌고 저쩌고. 우리나라에서는 국으로 끓여 먹고 말려 먹는 해초가 여기 사람들은 무섭나보다. 대충 읽는둥 마는둥 하다 다시 자리에 올려놓고 방을 나선다.

 

해변에 사람이 통 보이지 않는다. 적막 그 자체다. 어쩐지 좀 쓸쓸한 느낌이 들 정도다. 주인 아저씨 말에 따르면 이 해변은 밤이 되어야 진짜라고 한다. 낮에는 다들 숙소에서 빈둥대거나 근처 다른 관광지에서 놀다가 밤이 되면 해변 파티를 즐기러 이곳에 온다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다. 해수면에 하얗게 반짝이는 윤슬이 너무나 아름답다. 이 좋은 풍경을 두고 왜 다들 밤에만 오는 건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바다를 보고 있자니 조금 현기증이 난다. 아무래도 누적된 피로 탓인 듯하다. 잠시 방에 돌아가 쉬기로 한다.


숙소에 돌아가니 주인 아저씨가 또 웰컴 드링크를 주신다. 아까 마셨다고 사양해도 괜찮단다. 뭐지? 설마 체크아웃할 때 청구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달다구리한 것을 마시니 한결 낫다.


이층침대 두 개가 놓인 4인용 객실엔 여전히 나 혼자다. 도미토리룸을 혼자 쓰자니 편하면서도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창밖으로는 슬슬 해가 저물고 있다. 사진을 찍는데 파도 아래 검은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이 보인다. 저게 해초구나. 생각보다 거대하다. 저렇게 생겼으니 무서워할만도 하다 싶다.


적막한 방 안에서 혼자 파도에 맞춰 기괴하게 흔들리는 저 거대한 해초들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밀려온다. 커튼을 친다.




선잠에 들었다 깨어났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 탓이다. 90년대 테크노 같다.


사람들 소리도 들린다.


구경 좀 해봐야겠다. 근데 새벽까지 저렇게 시끄러우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커튼을 걷으려는 순간 오장육부가 본능적으로 나에게 경고하는 느낌을 받는다. 열면 안 된다고. 밖에 있는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나는 본능을 따른다. 신경쇠약이지 싶다.


이윽고 음악 소리가 잦아들고, 웃고 떠들고 노는 소리가 보다 선명하게 들린다. 간간이 한국말처럼 들리는 소리도 섞여 있다.


폭죽이 터진다. 환호성이 들린다.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외로움이 느껴진다. 커튼을 열고 싶다. 방 밖으로 나가고 싶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선반 위의 수칙서가 떠올라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사람들이 흥청망청 파티를 즐기는 소리가 들린다면 절대 방에서 나가지도 커튼을 걷지도 마십시오.


역시나.


그러나 누군가 창문을 두드린다면 진정하시고 자유롭게 행동하십시오.


거의 축제에 가까운 파티는 끌날 줄을 모른다.


버스킹.

벽이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EDM.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샴페인.

술병이 깨지는 소리.

고성.

싸움.

사람들의 비명.

혼란.

누군가 달려온다.


그리고 쿵.



누군가 창을 두드린다. 숨 넘어갈듯한 목소리로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다. 이윽고 더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미친듯이 창을 두들긴다.


창문 잘 잠겨 있겠지?


잠시 걱정하는 사이 수칙서의 내용이 떠오른다. 분명 자유롭게 행동하라고 했지.


조심스레 커튼을 걷어 본다.


아무도 없다. 파도 소리 외에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숙소 밖으로 나왔다.


후줄근한 바닷가 마을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작고 낮고 허름한 건물들 중 그 어떤 곳에도 불빛이 보이지 않아 흡사 버려진 마을 같다.


불이 켜진 곳이라곤 듬성듬성 나있는 가로등과 내가 묵는 숙소뿐.


방금 전까지 동네가 떠나가라 울리던 그 소리는 다 뭐였을까.


밤의 해변에는 축제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떤 인기척도 없다.


나는 바다에 가까이 다가간다.


파도는 낮보다 더 거칠게 몰아친다.


적막 속에서 홀로 울부짖듯이 모래사장에 밀려 온다.


검게 일렁이는 밤바다의 탁한 어둠을 응시한다.


아, 역시 그랬구나.


파티는 바닷속 저 깊은 곳에서 열리고 있다.


다들 미친듯이 춤추고 놀고 있다.


나도 놀고 싶다. 그러나 망설여진다. 저들이 나를 환영해줄지 모르겠다.


주저하고 있는 사이 물 속에서 누군가 내 팔을 잡는다. 꽉 붙잡힌 팔을 통해 그의 말이 전해져 온다.

 

자유롭게 행동하라고. 삶은 즐기는 거라고. 끝없이 경험하는 거라고.


얼어붙을 듯한 그 촉감이 어쩐지 따스하다.


어서 저 파티에 가자. 가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자. 아직 젊고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많다. 나는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