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임: 단, X는 Y에 앞서며 X와 X는 별개의 사건이다. Z는 X의 발생을 전제로 한다.





(중략)



S#35 차 안에서


f는 운전석에, g는 조수석에 앉아 있다. 차 안의 계기판은 새벽 한 시를 알리고 있다. 그들은 한참이나 눈이 오는 산속 깊은 곳에 차를 세웠다. 마침내 헤드라이트조차 끄자, 주위는 암흑에 휩싸인다. g는 조용히 천장을 더듬으며 작은 버튼을 누른다. 차량의 내부가 미약한 주홍빛으로 물든다.



f: (힘없는 목소리로) 오늘은 날씨가 매섭습니다.

g: 참으로 그렇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Y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하오. (머뭇거리다가) 내가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렇게 지금까지 와주는 것은 당신뿐이라오.


f: 엊그제에는 당신이 풀었으니 오늘은 내가 하도록 하지요. (고개를 돌리며) 괜찮겠습니까?

g: 물론이오. 인제 와서는 별생각도 안 드니 나로서는 반길 일이오.


f: (침묵하다가) 그나저나 여태껏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이렇게라도 할 이유가 있으셨는지요. 내가 많은 사람을 봐왔지만, X를 했다는 사람을 이리 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고개를 돌리며) 지금까지 접해본 적 없군요.

g: (목소리를 점차 높이며) 그것은 묻지 말아 달라고 엊그제도, 그 전날도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소. (가라앉히며) 하늘 아래 그 누구를 데려와도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소. 그래서 당신도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니오.



바람이 쌩, 쌩하는 소리를 내며 창문에 부딪힌다. 문틈으로 냉기가 퍼져 나온다.



f: (고개를 숙이며) 예, 죄송합니다. 괜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우리 둘밖에 없어 이것이 마지막 Y일 텐데 제가 분위기를 망치고 말았군요.

g: 되었소. (창밖을 바라보며) 사실 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내 나이 육십이 되어서 Z를 부탁하는 꼴이라니, 죽어서 마누라 얼굴을 볼 수는 있을는지, 어휴.


f: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도 내가 X를 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 있는 목소리로) 아무 걱정 마십시오. 당신의 지인 중 X를 해본 사람은 내가 유일할 것입니다. 그리고 난 Z를 보기도 했습니다.

g: 예, 그래서 내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이라오. 


f: 사실 이 모임을 알기 전까지는 나도 고개 못 들고 다녔습니다. X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난 말하지도 않았는데 내 친구가 다 떠벌리고 다녔는지, 옆집이며 이웃이며 모두가 다 알고 있더군요.

g: 저런, 안 되었소. (고민하다가) 헌데, 무엇이 까발려졌다는 거요?


f: 그것이, X 말입니다.



사방이 어둡다. 오로지 검정과 검정에 적신 담갈빛 뿐, 그 이외에는 전혀 없다.






S#6 f의 집에서


초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f가 작은 방에 홀로 앉아있다. 굳게 닫힌 희멀건 문 너머로 남자와 여자의 고성이 들려온다. f의 눈은 붉게 부은 지 오래다. f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눈물을 한 방울, 두 방울 떨구며 분노와 슬픔이 섞인 그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멈추기를 기도한다.



S: 그러니까 왜 인제 와서 나한테 지랄이야! 내가 지금까지 해준 게 얼마인데ㅡ 뭐? 해준 게 없어? 이 새끼가 아주!

T: 제발, 제발 조용해. f가 듣고 있잖아! (낮은 목소리로) 이건 f 없을 때 말하자고 했잖아.


S: 됐어! 내 동생이랑 연락이 십 년 넘게 끊긴 것도, 이 집 팔아먹어서 딴 새끼랑 같이 살던 것도, 이제는 다 됐다고. 다 네가 망쳤어. 내 인생도, 이십 대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 너 같은 사람이랑 결혼한 내가 미친놈이지, 어?



T의 신음을 들은 f는 고개를 더욱 무릎 사이로 밀어 넣는다. 물먹은 울음이 어린 허벅지 사이에서 새어나온다. 아니, 그의 심장에서 터져 나왔던가. 알 수 없다.



S: 아무튼, 내 앞에서 양육비 소리 하기만 해 봐. 뭐, 한 사람당 백만 원? 내가 사는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T: 하지만, 이제는 나도 못 하겠다고! 나도, 나도 Z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만 몇십 번꼴로 한다고. 왜 돈 안 줘? 왜 안 주냐고. 당신 없이 나 홀로 몇 년을 벼텼는지 알아? 왜 안 주냐고!

f: (울먹이며) 엄마, 엄마. 아빠. 그만해, 제발. 하나님, 하나님.


S: 이 새끼가!



T의 울음소리와 그릇 깨지는 소리가 열쇠 구멍을 헤집는다. 윗집도 아랫집도 더욱이 고요해진다. f의 울음도, 따라 고요해진다. 입을 두 손으로 아주 틀어막는다.







S#9 f의 집에서


f가 경련한다. S와 T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 f는 옷장의 틈새ㅡ위아래로 긴 틈새 사이로 그 광경을 흘겨본다. f가 웃는다. 동시에 큼지막한 눈물이 마구 바닥으로 치닫는다. 밖은 그때와 같이 고요하다.



f: (숨을 내뱉으며) 엄마, 아빠.



f의 귓바퀴를 타고 고막을 때리고 귓속뼈를 들추고 달팽이관을 타서 신경으로 이어지는, 발걸음이 들린다. S와 T가 사라진 f의 요람에, X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f가 옷장에서 나와 마루 위에 선다. 발바닥이 시리다.







S#37 차 안에서


f: 에ㅡ그래서 이리되었습니다.

g: 아고, 고된 일을 깨나 겪으셨소. 이제 Y도 다 들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겠소.



계기판은 어느새 두 시를 알리고 있다. 산은 여전히 어둡다.



f: X라는 것이 처음에만 힘들지, 두 번째부터는 생각보다 별 게 아니더군요.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방황하다가 이 모임을 찾은 것입니다.

g: 그런 사연이 있으셨다면 미리 말하지 그랬소. 우리가 모인 이유도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었는데.


f: 뭐,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고나 한다면 용서해주실련지요. 이제는 모임이라기엔 우리 둘밖에 남지 않아서, 모임이었다고 말하는 게 민망한 수준이지만.

g: (웃으며) 재미있었다라. 하긴, 고쳐 생각해보면 나도 이 상황이 재미있소. 결국,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들이 Z하겠다는 명목으로 똘똘 뭉쳤던 걸 생각해보면, 사실 그러지 않고서도 잘 살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고.


f: 오히려 내게는 당신이 이토록 미룬 이유가 궁금합니다. 다들 그 목적을 이루었는데 왜 아직도 이곳에 남아있나요?



g는 멍하니 차의 앞면에 난 커다란 창문을 바라본다. 그 속에는 겨울과 봄 사이 어딘가에서 피어난 때아닌 꽃 몇 송이와 어떤 이유에서인지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산짐승이 있다. Z를 바라고 산을 오른 자와 눈을 맞으며 산에 남은 것들이 얇고 여린 유리창 하나를 두고 갈라서 있다. f는 g를 바라본다.



f: 혹시 더 미루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말하세요.

g: (입을 다시다가) 재차 말하지만, 이제 되었소. 지금까지 당신과의 Y는 참으로 재미있었소.


f: (g를 한동안 바라보다) 그렇다면, 이제 나갑시다.



f와 g는 각각 자신과 가까운 문을 열고 차에서 나온다. g가 낙엽을 지르밟는다.







S#38 산 깊은 곳에서


f의 X로 g는 Z한다.


(중략)







S#39 산 깊은 곳에서


해가 밝아온다. f는 홀로 차를 타고 산에서 내려간다.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웃는 f. 그는 어딘가 상쾌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