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고등학교에 처음 입학했던 그 때.

친구가 없어 자리에서 숨죽여 앉아만 있었다. 

교실 뒷편에선 불량배들이 몹쓸 짓들을 하고 있었고

혹여나 다음 타겟은 내가 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던 그 때.

이제는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친구가 내 책상에 다가왔다.

떨고 있던 나에게 말을 걸어준 것 만으로도

그 친구에 대한 안정감은 배로 커졌고

그 친구와 같이 학교를 누비게 되었을 때,

내 학교생활 3년은 이 친구와 같이 보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차에, 친구가 자신의 집에 놀러가지 않겠냐고 제안해왔다.

누군가의 집에 가는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수락하였다.

친구는 몇십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면서 나에게 괜찮겠냐고 물어보았다.

할 일도 없던 나는 그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며 당장 가자고 하였다. 

사실 그때는 학교 뒷산을 넘어가야 하는지는 몰랐었다.

친구가 학교 정문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 얘가 장난치는 건 줄 알고 참았다가

산을 하나 정도 넘었을 때, 친구에게 농담을 하였다.

혹시 네 아빠가 산신령이냐고. 

친구는 호탕하게 웃어 넘겼다.

학교 뒷산은 이름모를 산맥에 연결되어 있었는데, 

하늘에서 보지 않는 이상 봉우리가 몇개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 이후로도 빼곡한 나무의 첩첩산중을 넘었다.

내 눈엔 다 똑같은 풍경이지만 친구는 익숙하다는 듯이 

어딘지도 모를 집을 향해 요리조리 방향을 전환했다.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등이 흥건하게 젖었다.

친구가 다왔다라고 말하여 고개를 올려다 보니

도착한 친구의 집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내 눈앞에 있던건 다 쓰러져가는 기왓집 한 채였다.

친구는 익숙하다는 듯이 창호문을 열고 어머니를 불렀다.

충격을 머금고 친구를 따라가보니 내부는 생각보다 현대적이었다.

온갖 먹물로 도배되어있는 내부 인테리어를 제외하면 말이다. 

먹물은 온 집에 고르게 분포되어 아름다운 무늬를 형성하고 있었다.

내 취향이었던건지 보다보니 이뻐서 친구에게 벽이 마음에 든다

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잠깐만 기다리고 하였다.

친구의 어머니처럼 보이는 중년 여성이 나와 마주본 채로 앉았다.

막 먹물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하더니

그리고는 그들의 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종교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때의 나는 그 말이 너무나도 설득력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중년 여성의 말에 깊게 빠져들어 버렸다. 

현재는 그 종교가 기억나진 않지만 

하지만 그 아름답던, 먹물. 

그 먹물의 모양과 패턴이 어찌나 큰 뜻을 담았는지를 회상하려면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종교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먹물의 의미는 기억하고 있다는게 참 신기하다.

장장 9시간에 걸친 설명회가 끝난 뒤 중년 여성과 내 친구는 빛나는 눈으로

이 집에서 묵은 뒤 혹시 예배에 따라와볼 생각 없냐고 권유하였다.

권유라기보단 협박이었다.

협박이라기 보단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새벽 4시 반에 첩첩산중을 넘어 학교로 돌아간다는 건 미친 짓이니까.

난 친구랑 더 친해지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먹물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그 종교를 믿겠다고 했다. 

이틀 뒤, 친구가 새벽 5시에 날 깨웠다.

친구는 나의 눈을 가리고 그들의 예배당으로 날 데려갔다. 

눈 가리개를 풀었을 때 보이는 것은 거대한 직육면체의 철제 건물이었다. 

친구는 어서 빨리 들어가자며 나를 재촉했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예배당의 중앙에 섰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예배당에 꽉 차있었다.

예배당은 맨앞의 높은 강단을 제외하면 의자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오로지 사람들밖에 없었는데 

수다를 떤다거나 작은 소리라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나도 숨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열렬한 박수 소리와 함께 풍채가 큰 남성이 들어왔다.

양복 위에 여러 문양들을 치렁치렁 달고 있는 모습이 신성해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남성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친구에게 뭔갈 물어보려고 했던 나는 친구의 눈빛을 보곤 그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마침 남성이 먹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나도 친구와 똑같은 눈빛으로 변하였다. 

1분이 10분이 되고

10분이 1시간이 되고

1시간이 3시간이 되었다. 

그 먹물의 정의에 연결한 종교의 교리, 의지와 목적

그리고 세세한 설명들을 듣느라 시간 가는줄 모르고 집중하였다. 

3시간 17분쯤 되었으려나, 

먹물 62번째 파트의 전체적인 맥락과 유기성을 설명하고 있었던 때였을 것이다. 

난 갑자기 오른쪽 쇄골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왼쪽 손을 올려서 내 손톱이 정확한 가려움이 발생하는 위치를 찍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는, 움직였다. 

"삭"

이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소리가 

조용했던 잠깐의 침묵을 파고들어 

모두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모두가 반응하는건 필연적이었다. 

"휙"

"휙"

"휙"

"휙"

"휙"

"휙"

"휙"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내 친구마저도. 

강단에 있는 남성의 얼굴이 나를 쳐다보게 되었다. 

나는 당황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본능을 따라 긁은 것 뿐인데. 

왜 이렇게 어색한 공기를 겪어야 하는지. 

혹시 먹물이 내 마음을 읽었는진 몰라도

어색한 공기는 분노의 공기로 바뀌었다. 

남성은 어마어마하게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 새신자를 잡아라!!"

남성은 소리를 지르고 나서 긴 칼로 자신의 몸을 찔렀다.

몇몇 사람들이 남성의 곁에서 통곡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내 발은 내 뇌보다 빨리 움직였고,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냥 뇌가 없는 듯 했다.

뒤를 돌아보니 친구와 친구 엄마도 쫓아오는게 보였다. 

도망 갈 곳은 첩첩산중 뿐이었다. 

안전해 보이는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의 광기는 내 생존본능엔 미치지 못했는진 몰라도

그들은 더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난 거의 죽을 것 같은 몸 상태로

어딘지도 모를 산맥을 넘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온 몸으로 확 느껴지면서

울음이 터졌다.

이상하게도, 가족이나 동네, 내가 가졌던 물건이 아닌

나를 이렇게 만든 원인 중 하나인 먹물이 생각이 났다. 

남성의 설교를 계속 곱씹게 되고...

남성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는 미친 짓까지 하면서 

장장 며칠을 걸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은 아직 현대화가 덜 된 곳이 굉장히 많아서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한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엔 노인들 이외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라 고립된 채로 존재하던 마을 이었다.

난 그 마을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다가

동사무소에서 내 이름을 찾으니 사망처리가 되었다고 뜬 걸 보고

어떻게든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서 그대로 살아갔다. 

이것도 지금의 주민번호 체계가 확립되기 전이라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30년이 지났다. 

어떻게든 얻은 직장에서 차장 직급을 달고서 

그때의 일에 대해선 완전히 잊은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퇴근한 나의 집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두 남자가 서있었다. 

두 남자는 나의 팔을 한쪽씩 잡곤 우악스럽게 봉고차에 나를 밀어넣었다.

저항할 틈도 없이 묶여버린 두 손발과 가려진 눈.

여기서 난 떠올렸다. 

30년전, 그 예배당으로 향하던 과정과 같다는걸.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입에 재갈 따위는 없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들은 내 입을 막아버렸다. 

그들이 손수건으로 내 입을 막았었던건 맞지만, 

손수건에 환각제는 없었다.

하지만 난 온갖 불안증세와 어지러움으로 기절해버렸다.

오히려 기절을 한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 예배당을 다시 내 눈으로 목도하면 기절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현실이 되었다. 

그 예배당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헛구역질을 하고, 구토를 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구토를 하고. 

울고.

헛구역질을 하고, 구토를 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구토를 하고. 

또 다시 울었다. 

남자들은 이상하리만치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바닥에 엎드린 나에게 다 했냐고 물어볼 뿐이었다. 

마지막 위산 한방울 까지 밖으로 내보냈을 때,

그제서야 나는 다 끝났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나를 예배당 안이 아닌 예배당 뒤쪽으로 보냈다. 

그리고선 잊고있었던 나의 기억을

그 미친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먹물이 벽을 따라 멋드러지게 그려져 있었다. 

그 모양과 패턴. 

30년 전 그대로.

몸의 수분은 다 쥐어짠 줄 알았는데,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왜 눈물이 나온 것이지? 

이렇게나 기쁜데? 

고민할 시간도 없이 깨달아 버렸다. 

내 삶은 먹물을 위해, 수미상관으로 내 삶을 끝내기 위해 존재 했던 것이었구나. 

12시간 가량의 그 먹물의 의미가 모두 떠올라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이 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줌마와 친구가 열렬히 믿었던 종교는 무엇인지. 

이 곳이 그 종교의 성전인지. 

왜 하필 나였는지. 

온갖 궁금증이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속세의 것으로 치부했다. 

남자 중 한명이 옷을 들고 왔다. 

30년전 나를 거의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그 남성이 착용했던 그 신성한 옷.

그 치렁치렁한 휘장의 의미가 다 이해되기 시작하자

이젠 그 남성이 나에게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그 남성이 난 너무나도 고맙다. 

옷을 입고

먹물의 의미를 상기하다 보니

예배당엔 어느새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이제 그 강단에 내가 오른다. 

열렬한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 중간. 

보였다. 

어색한 박수와 갈 곳 잃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 

아!

먹물의 의미는 다 너를 향했던 것이었구나!

30년 전에는 나를 의미했던 것이었고!

마음 속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먹물의 의미에 대해 설교가 3시간이 넘어가자

소년의 손이 올라갔다. 

나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지금 내 입을 제외한 신경은 모두 그 소리를 들을 타이밍에 집중되어있다. 

내 입이 마침 한 문장을 끝냈다. 

소년의 손톱이 부드럽게 쇄골 피부를 긁는다. 

"삭"

이 손톱으로 피부를 긁는 소리가 

조용했던 잠깐의 침묵을 파고들어 

모두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모두가 반응하는건 필연적이었다. 

"휙"

"휙"

"휙"

"휙"

"휙"

"휙"

"휙"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은 평안했다.

"휙" 

내 손가락은 그를 가리켰다. 

아 이런거였구나.

이제야 알았다.

남자가 칼을 건넨다. 

멀어지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몸에 칼을 찔러 넣는다. 

또 하나의 고귀한 희생양이 정해졌다. 

내 옆에서 통곡하는 모르는 신도들

희미하게 보이는 달리는 소년을 보며 

평안히 눈을 감았다. 

내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된 것이였다. 

먹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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