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가 소란스럽다. 정확히 예순하고도 두 시간 전까지는 따분하기 그지없던 이곳이, 이제는 발걸음이 너무나 분주한 탓에 잠깐만 햇살이 비쳐도 공기 중에 섞인 먼지들이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가만 보면 흰 제복을 입은 사람보다 평상복을 입은 사람이 조금이나마 더 많아 보였는데, 아마 제복을 갖출 여유조차 없었다고 해석하는 편이 적절하리라. 그들은 대체로 얇은 종이 뭉치를 들고 다녔다.

S는 작년 말에 갓 졸업한 신입이라 좌에서 우로,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바삐 움직이는 인파에 도통 섞여들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보낸 날이 백삼십 일이라면, 그 중 백이십 언저리는 그의 생각보다도 더욱 고요한 날이었다. 너무나 따분한 탓에 본인이 먼저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백이십 날이나 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사흘 전부터는 이곳이 이례적으로 소란스러워졌다. 더 정확히는, 사흘 전부터는 웅성거림이 들려왔고, 이틀 전부터는 어딘가에서 함성이, 하루쯤 전에는 오열마저 들려왔던 것이다. S는 정신이 아찔하여 이전과는 아예 정반대의 고민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S는 2층과 3층 사이의 층계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시침은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확실히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구두 소리가 줄었다. S는 선임 연구원을 온종일 따라다니느라 기운이 완전히 빠진 채였다.


"S, 점심은 안 먹어도 되겠어?"

"네, 너무 경황이 없어서 그런지 배도 안 고프네요."


그는 초췌한 얼굴로 대답했다. 비록 선임이 이 사태에 대해 뭐라 뭐라 말하긴 했지만, S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어가 너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것은 이미 S의 논리를 벗어나 있었다. 그 역시 연구소 안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S는 그저 자신의 등록금을 되돌려받고 싶어졌다.

그는 연신 한숨을 내뱉더니 기다란 벤치에서 일어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나름대로 연구실이라곤 하지만 사실 잡동사니를 박아두는 창고 취급을 받는 곳이었다. 방은 양옆으로는 좁고 앞뒤로는 길죽한 모양새였는데, 그 가운데에도 기다란 책상이 하나 있었다. 그 중앙에는 커다란 직육면체가 놓여 있었다.

옆면에는 붉은 램프로 그어진 수십 개의 숫자가 여기저기 박혀있었는데, 매초 휙휙 바뀌어대서 눈이 아파져 왔다. 더군다나 이곳은 위치상 채광도 환기도 녹록지 않아 S의 불쾌감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는 구석에 박힌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화면의 왼쪽 절반은 녹색 선이 새파란 격자 위에서 실시간으로 진동하고 있었고, 오른쪽 절반은 네모나게 자른 철판을 정상에서 바라보는 영상이 송출되고 있었다. 그 철판은 다른 한쪽에 놓인 조명 때문에 부분적으로 빛을 반사하는 상태였다.

S가 모니터를 보던 사이, 그의 뒤에서 직육면체가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곧 책상다리마저 떨게 하였다. 계기판의 숫자도 덩달아 가속하였다. 맨 위의 숫자가 900을 넘어 네 자리에 다다를 즈음,


삑, 삑!

쿵, 쩌적.


철판이 갈라졌다, 짧고 귀 아픈 두 번의 알람을 뒤로하고.

S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비친 얼굴이 쨍한 햇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직 완벽히 결론이 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추후의 연구를 통해ㅡ"

"하지만, 이걸 달리 어떻게 설명한다는 말입니까."

"분명 우리가 아직 신경 쓰지 못한 변수가 있을 것입니다."


커다란 회의실 안에 수십 명의 연구원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이 분야에 대해 전문적이라고, 아니, 적어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믿어왔다. 그래, 정확히 예순하고도 두 시간 전에 그 짤막한 글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것은 상식의 문제였다. 그들이 떠드는 '현상논리학적 불가능성'을 제쳐놓고서라도, 이건 그 어떤 학문도 전공하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이상하게 여길 만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이 현상을 임시로 '맥동성 결정'이라고 명명하였다. 결정의 구조가 주기성을 가지고, 외부의 에너지를 공급받지 않고도 스스로 재배열되기 때문이었다. 그 형태가 동물의 심장이 뛰는 것과 유사하여 굳이 '맥동성'이라는 사족을 붙인 것이다.

이 현상은 외국의 개인 블로그에서 최초로 언급되었다. 작성자는 자신의 정보를 일절 남기지 않았다. 당연히 그 블로그 또한 단 하나의 글만 작성되어 있었으며, 조회수는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었다. 아마 작성자가 직접 조회한 것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그 글을 보지 않았다고 추측하는 것이 옳아 보였다.

그 글은 이곳, 연구소 소속의 최 박사가 웹서핑 도중 우연히 발견하였다. 비록 전문적인 형식은 갖추지 않았으나 그것은 논문과 유사하였다. 자신의 실험 목표와 과정이 간소하게 작성되어 있었는데, 준비물이 굉장히 간단하여 직접 실험을 재현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최 박사, 당신은 이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저는."


박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실험 직후에 느꼈던 그 하늘을 날듯한 기쁨은 분명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방을 뛰쳐나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대여섯 번 악수할 정도로 기뻤던 것은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최 박사는 종종 자신이 마흔을 바라볼 동안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자조하곤 하였다. 이 발견은 그에게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비교적 신생 학문이었던 현상논리학의 위상을 높일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최 박사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직 구체적인 답변을 드리기엔 이릅니다. 고작해야 사흘째입니다. 아직 검증도 안 되었고, 무어라 말씀드리기엔."

"아시잖습니까, 저희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 박사는 답답하다는 듯 단추를 위에서 몇 개 풀어내었다. 회의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손짓까지 하며 열변하던 탓이었다. 그의 주장은 처음부터 일관적이었다. 이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다른 것들을 전부 미뤄서라도 가능한 한 빨리 성과를 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이들은 반박할 법도 하였으나 어째서인지 그저 한숨을 두어 번 푹푹 내쉬고는 고개를 떨구곤 하였다. 그것은 이 박사가 천성이 저돌적인 인물이라서가 아니요, 동료가 단순히 체념한 탓도 아니었다.


"최 박사, 이건 우리의 정체성이 달린 문제입니다."


이 박사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본래 과학이란 오류를 밟고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성장한다곤 하지만, 이것은 과하다. 어쩌면 물리학뿐만이 아니라,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및 모든 종류의 자연과학을 그 근간부터 뒤흔드는 발견이기 때문이었다.

발견이란 무릇 과학을 한층 성장시키는 것이라면, 이것은 벌목이었다. 과학의 몸통에 수차례 도끼질하여 그 뿌리까지 아주 뽑아내는, 벌목이라고 여긴 것이다.


"나는 말하기 싫다고 한 적이 단번도 없습니다. 그저 시간이 부족할 뿌운이지, 일단 진정하세요."


최 박사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 역시 이 박사와 같은 마음이었다. 실험의 결과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같았다. 이 박사는 안경을 탁자 위에 벗어두고서 왼손으로 눈두덩을 짚었다.

이 박사의 안경알은 상당히 작았다. 그 좁은 안경알처럼, 이 박사는 평생을 과학만 바라오며 살아왔다. 가정은 꾸리지도 않았으며 인간관계도 마냥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의 곁에는 과학만이 남았던 셈이다. 그것은 그가 평생에 걸쳐 얻어낸 재산과도 같았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최 박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과학을 믿습니까."


최 박사는 입을 열지 않았다. 회의실에 남아 있는 수십 명 중 둘을 뺀 나머지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두 명의 침묵을 바탕으로, 회의실은 여전히 술렁거린다.

그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제와 같이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불었다. 그는 비록 시기상조라고 하였으나, 실은 내심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지난 이틀간 그는 이 현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연구소 내에 있는 장비들로 대충 때운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나름의 결론을 내리기엔 충분하다고 판단하였다.


"이 박사, 과학을 믿는다는 것은 정확히 무얼 의미합니까."

"예?"

"과학이 영원불멸하길 믿는 것입니까, 혹은 자연의 섭리를 믿는 것입니까?"








과정은 간단하다.

하나, 임의의 시료를 준비한다. 이때, 실험 환경은 진공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 공기를 구성하는 입자들이 반응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둘, 진동수를 조절할 수 있는 광원을 배치하여 시료를 비춘다.

셋, 반응이 나타날 때까지 서서히 진동수를 높인다.


쨍그랑!


마치 광전 효과처럼 물체가 특정한 진동수 이상의 빛을 받는 순간,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빛을 받은 부분에서부터 결정 구조가 형성된다. 맥동성 결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입자의 배열은 일정한 시간마다 흐트러지고, 다시 결정 구조를 이루고, 다시 흐트러지는 주기성을 가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존에는 결정 구조가 형성되지 않거나, 혹은 입자들이 제멋대로 흩어진 상태라고 알려졌던 물질에서도 결정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시료의 구성성분에 따라 그 주기나 필요한 진동수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으나, 현재까지 알려진 물질 대부분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S는 이 현상을 믿지 못하는 이 중 하나였다. 그가 철판, 유리, 섬유, 플라스틱, 도자기 및 다양한 것들의 '맥박'을 직접 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언가 오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기체 결정, 기체 결정이 말이나 돼?"


결정이란 입자들이 규칙성을 가지고 배열된 상태를 말하는 것에 반해, 기체는 일정한 모양을 가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애초에 두 단어는 정의에서부터 서로 상충하는 단어들이다.

허나 S는 순수한 산소 기체가 결정 구조를 가진 순간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고작 하루 전에 있었던 일임에도, 그것은 머릿속으로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려웠다. 화학과 물리학의 전공 여부와 관계없이, 기체 결정은 그 자체로 역설이나 다름없었다.

S는 지난 스무 시간 동안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결국, 최 박사의 실험이 있고 나서 엿새 정도 지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상황을 마음속으로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여전히 엄청나게 큰 폭풍이 그의 내면에서 몰아치고 있었으나, 버티다 지쳐 끝내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분명 이 연구소 안에도 그와 같은 이유로 심란함을 느끼는 이가 많을 것이라고 S는 추측하였다. 그런데도 이 연구소가 돌아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으리라. 하나는 윗선의 압박이며, 둘은 시간이 쉼 없이 흐르는 탓이다. 어느 집단이 안 그러겠느냐만, 하급자의 생각은 커다란 흐름에는 저항할 수 없는 탓이다.

S는 입맛을 다시고선 재차 눈을 종이로 향했다. 옆 방에서 연구 중인 동료는 이틀 전, 그러니까 S가 패닉에 빠져있을 때에 이 현상이 빛의 진동수뿐만 아니라 시료에 가해지는 온도와 압력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번에는 뭐, 부전공이었던 천문학을 곁들인다고는 하지만 S에게는 그것이 딱히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S는 압력과의 연관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나름대로ㅡ물론 선임의 도움을 받았지만ㅡ서적을 펼치고 본인의 지식을 총동원하였다.


'허먼-나일 논리평면에서 나타낼 수 있는 임의의 사건은 참-거짓 연관 정리에 따라 두 개의 세계선으로 분리할 수 있으며, 각각의 선들은 무한한 사건의 집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두 선을 각각 B*, ~B*라고 한다면...'


그렇기에 S는 읽는 것조차 어려운 논문을 두고 한참이나 씨름하였다. 팔 년 전에 있었던 커다란 지진을 두고 국내 연구진이 작성한 글이었다. 규모가 9를 초과하는 역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한 대지진이었던지라 수많은 학자의 연구 대상이 되었던 사건이기도 하였지, S는 떠올렸다.

사후에 인근 지역의 지반이나 지구 내부 환경 등을 조사한 결과,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그 정도 규모의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학계 중론으로 자리 잡았다. 진원지는 판의 경계가 아니었으며 화산 활동도 최근 수만 년 동안은 확인되지 않은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S에게는 맥동성 결정과 원인 모를 지진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전부 동일 선상에 있다고 느껴졌다. 그것이 바로 S가 전공하지도 않은 지질학을 접하며 머리를 싸매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요인 탓에 지체된 느낌이 있으나, 그는 어찌저찌 꼬박 두 시간을 투자하여 서른 페이지가 넘는 종이 뭉치의 마지막 장까지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아마 출처나 도표들을 제하면 이번 페이지가 사실상 마지막일 것이다.


'... 차후의 연구에서는 논리상수의 변화와 현실적인 제약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며, 아티야 사건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지."


결국 마지막 문장마저 이해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허탈함에 몸을 뒤로 주욱 빼고 등받이에 걸치듯이 하자 이미 해가 저물어 담색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그래, 오늘 하루는 여기서 자도 한 소리 듣지는 않을 것이다. S는 이마를 붙잡고 잠깐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굳이 문을 나서도 너털걸음으로 몇 보 걷지도 않고 S는 오래된 나무 벤치에 다시 쓰러지듯 앉는다. 천성이 내향적이어서 조금만 걸어도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럼에도 심란함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비록 맥동성 결정이 나타나는 조건이 간단하다고는 하나, 상압에서는 수천 켈빈이나 X선 계열의 상당히 높은 에너지를 가진 빛을 쪼여야 한다. 아마 그러한 조건 탓에 아직도 일상생활에서 결정이 생기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이상하다. 아무리 일상에서 충족하기 어려운 조건일지라도, 실험실에서는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환경이지 않은가. 상온 초전도체를 구현할 때에는 수백만 기압까지도 올린다고 한다. 그만치 극단적인 환경이라면 아주 조금의 온도로도 결정이 만들어질 텐데, 이를 지금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지리상의 위치는 크게 상관이 없을 것이다. 기밀 유지라는 명목으로 이 연구소 안에서만 실험이 이뤄지긴 했지만, 최 박사가 찾아냈다는 그 글은 분명 외국에서 작성된 글이었다. 이는 오로지 대한민국의 특정 연구소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물리법칙이 바뀐 것 또한 아닐 것이다. 뉴턴의 고전역학이 틀렸을지라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듯이, 방정식에서 몇 가지 오류가 발견될 수는 있어도 그것은 이 우주와는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역학이 자연을 기술하는 것이지, 자연이 역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우주는 136억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규칙 아래에 움직였는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있겠는가.

S는 본인이 괜히 밖으로 나왔다며 자책했다. 생각을 비우기 위해 나온 것이 되려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그는 인제 그만 들어가고자 하여 신발을 고쳐 신었다.


"S, 야밤에 무슨 일이야."

"아, 조금 피곤해서 잠깐만 바람 쐬려고 나왔어."


그의 옆 방에서 묵묵히 연구만 하던 동료였다. 아마 그녀도 머리가 아파서 나온 것이라고 S는 멋대로 짐작했다. 동료는 잠시 입을 꿈틀거리더니 한 마디를 꺼냈다.


"저번에 내가 말한 거 기억나?"

"뭐였더라, 우주라 했더라지. 천문학 쪽으로 접근해본다고 했었나?"

"어, 용케 기억하는구나."


그녀는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사실 내일 회의에서 제안할 가설이 있는데, 알잖아, 나 많이 떠는 거."

"아냐, 뭘. 저번에 연설할 때도 잘 하더만."

"고마워. 아무튼, 대본 자체는 하루 전에 이미 다 작성했는데도 조금 떨려서."

"아하, 내가 의도치 않게 자리를 뺏었구나."


그녀는 웃으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벤치 자체는 세 명이 앉고도 거뜬할 정도로 공간이 남았지만, S는 이만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난 적당히 머리 식었으니까 슬슬 들어가 볼게. 내일 발표 응원할 테니까 너도 적당히 하고 들어와."

"S."


그는 자신을 부르는 말에 뒤를 돌아 동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째선지 서글픈 눈을 하고 있었다.


"너는 우주를 믿어?"


S는 바로 대답하였다.


"응."


그렇게 그는 뒤도 안 돌아본 채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내일 있을 그녀의 발표가 잘 마무리되기를 기원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정확히 두 시간을 더 자신의 두뇌와 사투를 벌인 그는 문득 그 벤치가 떠올랐다. 두 시간이나 지났으면 그녀가 아직도 그곳에 있을 리는 만무하였으나 굳이 참을 이유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S는 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없었다. 그녀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필히 자신의 숙소로 향했으리라. 왜냐하면, 그녀가 연구하던 옆 방에서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S는 회의가 시작되기 두 시간 전에 잠에서 깨었다. 연구실에서 자니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편히 기지개를 켰다. 한 시간 동안은 간단한 세수와 물품 정리를 하였고, 삼십 분 동안은 다시 골똘히 생각했으며, 나머지 십 분 동안은 초콜릿 바와 두유를 아침 겸 점심으로 먹었다.

그는 신입이 회의에 늦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예정 시각보다 이십 분이나 일찍 자리에 앉았음에도 이미 그곳에는 다른 연구원들이 많이 있었다. S는 이곳이 사실 회의실보다는 시청각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이번에는 지정석이 없어서 적당한 곳에 앉자 다른 연구원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듬성듬성 모여앉아 자신의 견해를 설파하고 있었다. 어느 구절은 S가 동의하였지만, 또 어떤 부분에서는 완전히 그와 반대되는 내용이었다. S는 살짝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였다. 그 역시 낯이 초췌하였다. S는 일종의 동질감과 연민을 느껴야 했다.

회의는 꽤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이번 일주일은 워낙 이례적인 사건이 터졌다 보니 소집이 굉장히 잦은 편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열정적으로 임했지만, 그 횟수가 네 번째를 넘어가자 모두 지친 눈치였다.

회의의 서두는 간단한 재정 문제나 설비의 유지 및 보수와 관련된 안건으로 시작되었다. 어차피 그것은 결국 형식적인 안건이나 다름이 없어서, 관심 있게 듣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맥동성 결정에 대한 건으로 차례가 넘어가자, S의 앞과 뒤에 있던 모든 사람이 한 마디씩 꺼내는 것 같았다. 회의실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사실 맥동성 결정은 미시적인 수준에서 항상 발생하나 평형을 이룬 상태이며, 빛과 열은 그 균형을 깨 거시적으로 나타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한번 압력을 받아서 수축한 물체가 위치에너지와 열에너지를 원동력으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수십 마디가 오가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 박사였다.


"정숙하십시오."


그 한 마디에 회의실이 정숙해졌다. 그는 이 공간에 있는 사람 중 가장 피곤함에 절어있었다. S는 벙찐 채 그를 바라보았다.

최 박사는 의자를 뒤로 빼고 책상을 한 바퀴 빙 돌아 이 박사에게 손을 건네었다. USB였다.


"이제 확신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박사는 자신의 앞에 우뚝 선 그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떨리는 손으로 USB를 받아들어 자신의 노트북에 연결하였다. 회의실의 앞에는 그 노트북의 화면과 연동된 영상이 커다랗게 송출되고 있었는데, 이 박사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폴더를 열었다.

이 박사가 건네받은 USB에는 다섯 개의 PDF 파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어떠한 그래프와 몇 줄의 숫자 및 영어, 자그마한 사진이 박혀있는 A4 크기의 문서였다. 최 박사는 송출된 화면을 멍하니 보고선 다시 연구원들을 향해 말했다.


"수가 변했습니다."

"최, 최 박사.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박사의 질문을 뒤로하고 최 박사는 화이트보드에 짤막한 공식을 적었다.


"여러분,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S는 생전 처음 보는 수식이었다. 물리 시간에도, 화학 시간에도 듣도 보도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S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닌 것 같았다.


"좌변은 이상적인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비눗방울의 최소 반지름이며, 우변은 그 인자들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


최 박사는 우변의 마지막 항에 큰 동그라미를 쳤다.


"이것은 섭씨 25도에서의 물의 표면장력을 나타내는 상수입니다."


이어서 그는 '71'을 적고 그 정확한 값을 소수점 스물둘째 자리까지 적었다. 이와 같은 숫자를 그 아래에 한 번 더 적었으나, 두 수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소수점 스물셋째 자리에 적힌 2와 3이 전부였다.


"위의 값은 십 년 전 측정된 값이며, 아래의 값은 바로 어제 측정된 값입니다. 우리 설비는 충분한 정밀도를 가졌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스물셋째 자리까지는 신뢰구간 내에 있다는 것이 한참 전에 검증되었습니다."

"하지만 최 박사, 이건 너무 미세한 수치이지 않나. 스, 물셋째 자리 정도는 충분히 변화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최 박사는 이 박사를 바라보았다.


"과학은 마치 거미줄 같지요. 각각의 분야는 서로 다른 씨앗에서 자라났을지라도, 이제는 모든 학문이 유기적으로 얽혀있으니까요."


그는 이어서 간결한 등식을 적었다. 물방울의 표면장력을 유도하는 식이었다. S는 박사의 의도를 눈치챘다.


"물방울의 표면장력이 달라졌다는 것은, 그것과 관련된 인자가 변화했음을 의미합니다. 평상시라면 물방울의 직경이 달라졌음을 의심할 것입니다. 나 역시 그랬으며, 얼마 안 가 직경은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 박사."

"다음은 압력의 차이입니다. 나는 수십 번 다시 측정했으나, 소수점 아래 마흔째 자리까지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얼 의심해야 합니까?"


최 박사는 다시 동그라미를 쳤다. 파이, 원주율이었다.


"원주율이 달라진 것입니다. 아주 미세한 수치로, 기하적인 의미에서."


S는 매우 놀랐다. 하지만 회의실은 매우 고요했다. S 또한 그랬다. 너무나도 놀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인지, 혹은 방금의 삼 분도 안 되는 순간에 대기압이 달라져 폐가 눌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물리학만 해도 원주율이 사용되는 수식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감히 추산조차 못 합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 제안할 가설이 있다던 그 동료를 찾아 둘러본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을 보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예 불참한 것인가, 아니면 잠시 밖으로 나간 것인가?

S는 어느 날 그녀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현대의 천문학은 우주의 팽창률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 상수라는 보정값을 사용하는데, 그 값은 소수점 뒤로 0이 예순째 자리까지 이어지는 아주, 극심히 작은 숫자이다. 만약 그 값이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졌다면 이 우주는 아예 다른 환경이었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S는 웃었다. 소수점 아래 육십 번째 수준에서 우주가 멸망할 수도 있는데, 원주율이라고 덜하랴. 아니, 원주율뿐만이 아니다. 원주율과 관련된 모든 물리 상수가 변했다는 것이니까.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낸 현상이 맥동성 결정이었을 뿐이다.

최 박사가 헛기침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건 어제 알아낸 사실입니다."


최 박사는 새로운 그래프를 띄웠다. 어느 것은 올곧은 직선을 그렸지만, 다른 하나는 살짝 휜 채로 하강하는 곡선이었다.


"맥동성 결정이 일어나는 데에 필요한 최소 진동수의 값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그가 이어서 말하길ㅡ


"현재의 추세가 이어진다면, 2070년에는 상온 상압에서 태양광만으로도 반응이 일어날 것입니다."

"박사님, 그러면."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질문하였다.


"원주율이 달라진 것이라면, 박사님께서 측정하신 결과 또한 그 여파가 반영된 것이 아닙니까?"


최 박사는 발언자를 잠깐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S는 두려웠다. 그렇다면, 그가 측정한 것이 사실이라고 누가 증명할 수 있는가? 망가진 자를 가지고 아무리 길이를 재봤자, 그 측정값이 정확할 리가 없다.

만약 그 자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알기 위하여 또 다른 망가진 자를 사용해야만 한다면, 그 자의 주인은 측정을 이어갈수록 진실에서 멀어지지 않겠는가.

하, 하. S는 생각했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도, 물리학에 있어서도, 과학을 뒤엎을 역사적인 반례라고.

참으로 보편적인 반례였다.


회의실의 시계가 똑딱이더니 정오를 알렸다. S는 자신이 본 12시가 참된 정보인지 믿을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