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흘러 흘러 이 괴문서까지 집어들게 된 당신도 그간 참 힘드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문서를 쓰고 있는 저는 어린 시절 어느 백화점에 잘못들어갔다가 괴이 체질이 된 사람입니다.
괴이 체질이란 게 생소하시겠지만, 여태 당신이 겪어온 일들을 떠올려 보시면 대충 납득이 되시겠지요.
남들도 다 겪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아실테니까요.
적어도 일반인은 이 문서를 인지할수조차 없습니다.
이 문서는 백지(白紙)이자 백지(百紙)에 쓰인 문서로, 이 바탕이 되는 종이는 만들 때 백번의 정성이 들어갔다고 하여 귀히 여겨지던 한지입니다.
본래는 단순한 종이였지만, 말이라는 것은 본의 아니게도 참 큰 힘을 가지고 있지요. 세상의 개념에 간섭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 종이의 이름인 백지(百紙)에는 그 이름이 불리울 때마다 백지(白紙)의 의미가 섞여 들어가, 결국엔 본래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흰 종이'라는 개념만이 강하게 자리잡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종이 자체에 들여진 '백번의 정성'은 그 이름이 바뀌어서도 본질 속에 남아있었고, 우리들의 '말'로 말미암아 두 개념이 뒤섞인 이 종이는 특이한 현상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단순히 '흰 종이'로 보이게 되는 것이 바로 그 현상으로, 괴이 치고는 상당히 담백한 편이죠.
하지만 입에 오르내림으로서 그 개념이 성립되는 괴이의 완벽한 예시로 이 종이 만큼 좋은 것도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이것이 제가 이 종이에 본 당부를 써내려가는 이유입니다.
이 종이를 읽어내려가는 당신이 괴이 체질이라는 것을 납득시킴과 동시에, 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에 더 없이 좋기 때문이죠.
사실 아직도 이 '개념'과 '괴이'라는 둥 하는 이야기가 잘 와닿지 않을 겁니다.
이해 합니다, 저도 그렇게 와닿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어느정도 모호하게라도 받아들여두면 분명 도움이 될겁니다.
그렇게라도 해두면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가 될 것이고, 정돈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도 조금은 정돈이 되는 법입니다.
괴이라는 건 결국 관찰자에 따라서도 변화한다는 걸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정말로 도움이 될 얘기를 조금 해볼까요?
우선 괴이의 종류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첫번째로는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처럼,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그 모습이 확립된 괴이가 있겠죠. 전승이나 전설로 내려오는 대부분의 괴이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걸 편의상 A형 괴이라 해봅시다.
그리고 두번째는 앞선 A형 괴이와는 다르게, 그 시대에 유행한 풍문에 의해 갑자기 발생했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조금 더 인스턴트한 유형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2000년대에 유행했던 빨간마스크라거나, 최근 급격히 발발하고 있는 백룸 현상이 있겠죠. 이는 B형이라 해두죠.
이들 A형과 B형 괴이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개념이 사람의 인지와 소문에서 유래했다는 점이죠. 그들이 많은 인간이 공유하는 표상의 현현이라는 가설은 제법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괴이는 이 두개 분류에 속하기 때문에, 괴이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답을 여기서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세번째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인간의 인지를 넘어 그저 그 자체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부류죠. 어느순간부터 서울의 지하수로에 서식하기 시작한 그림자들이라거나, 갑작스레 생겨나 방문객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놀이공원이라거나 하는 것들 말입니다. 이들을 뭉뚱그려서 분류하는 것이 맞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C형이라 부릅시다.
이들 C형 중 몇몇은 앞선 A형과 B형 괴이와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연구하기에 따라선 둘중 하나의 분류였음이 밝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관찰자가 누구든, 어떤상황이든 거의 일관된 현상을 보이기 때문에 메아리나 번개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초자연'이 아닌 세상 본연 그대로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괴이 체질은 이런 C형 괴이 마저도 남들보다 더 자주 마주치곤 합니다. 뭔가 이상하죠? A, B형과는 명백하게 이질적인데도, 마치 그들이 하나의 울타리에 속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게 말입니다. 결국 어딘가 근본적인 부분에서 '괴이'라는 울타리에 묶여있다는 뜻일까요?
제 생각에는, 이 사실을 통해 시점의 전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표상의 현현, 그 자체를 C형 괴이로 분류한다면 어떨까요? 애초에 어떠한 본질이 존재하고, A, B형 괴이는 그 본질의 단면으로서 관측된다는 해석이죠. 이 해석에 따르면 결국 모든 괴이는 C형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지만.. 글쎄요, 당신은 이게 너무 과한 비약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일한 근거는 저희가 겪는 이 '괴이체질' 뿐이니까요. 또한 이 가설이 맞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별로 없어보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일까요?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제 개인적 바람이 담긴, 희망적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C형 괴이가 가진 '일관성'이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했듯, C형 괴이는 원인불명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 일관된 규칙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경우 그러한 규칙을 잘 따르는 것만으로(물론 그것을 따르는게 가능하냐는 별개지만) 큰 피해 없이 대응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즉, A, B형 괴이도, 우리의 괴이 체질 마저도 그러한 '규칙'에 입각해 접근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한층 편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미 수많은 희생을 통해 많은 규칙이 밝혀진 다른 C형 괴이와는 다르게, 이쪽은 규칙이 잘 확립되어있지 않다는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사실, A, B형 괴이의 경우 이미 그 규칙에 대해 우리는 어느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원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있다면,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강력한 대응책이 될 것입니다. 다만 A형의 경우 우리 문화의 근본에 녹아들어있고, B형의 경우 밈(meme) 현상에 의한 것이니 개인의 노력으로는 대응하기 쉽지 않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죠.
물론 저 두가지 경우에 대해선 답이 없겠지만, 그렇습니다, 우리 괴이 체질에 대해서는 아직 희망을 가져볼 수도 있겠죠. 이 수많은 괴이를 마주하게 만드는 어떠한 규칙의 존재를 보장받게 된다면, 적어도 자포자기할 필요는 더이상 없어질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규칙이 되겠느냐 한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목표가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론 이 문서를 읽을 수 없게 되는 것이 되겠죠.
우리는 뭉쳐야 합니다. 우리와 같은 수많은 이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우리의 체질에 관한 규칙을 밝혀야 합니다. 우리가 자연에 대한 이해를 더욱 넓힐 때 비로소 초자연은 초자연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다시금 명심하십시오.
정돈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 또한 정돈이 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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