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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쳤다.


그렇게 오래도록 내리고 사람들 안에 고여가며,


몸 안으로 바깥으로 저급한 욕구를 품게 만들며,


동시에 물에 불려진 우리의 마음을 썩혀가던 비가,


드디어 멈추었다.


정부 공식 발표 생존자 수. 3500만명. 사태 시작하고서 지지율이랑 사상자 수로 지랄했던거 생각하면 아마 덜 살았으면 덜 살았지 생존자가 더 있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우리의 왕국은



구름이 걷혀지고 햇살이 땅을 비추는 축복과 함께, 또다른 저주가 이 땅을 휩쓸었다.

재건될 운명이다.



아주 비극스럽게도.

즐거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장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상이 물에 잠길 때 까지.













「장마의 기록 2」



                                                  -물안개-






물안개. 2일차.


기록을 시작한다.


원래 세상의 색깔을 약간 망각했던 사람들. 

그들부터 '물안개'에 희생되기 시작했다.


비가 그친 첫째날에는 별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약간 흐렸을 뿐, 비가 오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꽤 질서있게 거리로 나갔고, 

정부가 해낸 유일하게 잘한 일인 뉴스에서도 

사건 사고를 보도하지 않았다.


일이 발생한 것은 2일차.


싱거운 뉴스소식을 보도하던 기자의 얼굴이 

마치 풍선처럼 부푸면서, 사태가 시작되었다.


펑.


많은 픽션에서 흔히 사용되는 장면이었지만, 

머리가 터지면서 나온 액체가 

붉은 색이 아닌 푸른색이라는 점과, 

그것이 우리가 익히 알던 것들이라는 점이 

뉴스를 보던 사람들을 패닉에 몰아넣었다.


비가 그치고 감쪽같이 없어진 괴생명체들이, 

실시간으로 뉴스데스크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보다.... 더 기괴해진 모습들로.


슬라임은 인간을 모태로 삼은듯 

자신을 담았던 그릇의 일부분을 뭉개진채로 

지니고 있었고, 또랑또랑하던 목소리를 

이상한 발음으로 따라하며 

자신들이 아닌 다른 존재를 탐닉했다.



사람들이 터져나갈수록, 스튜디오 안은 점점 흐려져 갔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무언가가 공간을 채웠다.



안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뉴스를 방영하던 tv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들었던 소리는 무언가 긁어대는 소리. 

그로테스크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그런 소리였다.

그리고 비가 내리던 3년간 가끔 들었던 친숙한 소리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소리에 대한 증언이 모두 달랐다.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비명을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그게 진짜로 무슨 소리였는지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소리를 듣자마자 미친듯이 스튜디오로 달려가던 

사람들만이,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을 테니까.


이만 줄이겠다. 바깥에서 고함이 들려온다. 

아마 아파트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는 소리겠지.

꽤 시끄러운데.... 어떻게 되려나.





.










물안개. 5일차.


턱시도. 턱시도들이 다시 돌아다닌다.


스튜디오에서 나온 것들인가? 

아니, 아무래도 좋다. 

눈에 띄지 않는것이 중요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쨋든 재미있게도, 그것들과 전투를 해보려는 사람이 

늘어났다. 아파트 창문 밖으로 기습을 하려는 

모습을 목격했다.


꽤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었는지, 

커다란 식칼에 보기 힘든 가스건까지 들고 있었다.


기대되었다. 괴생명체들의 공략은 

생존에 필요한 일이니까. 

만약 성공한다면 한번 내려가서 

대화를 나누어 볼 생각이다.


마침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잠시...










물안개. 6일차.


시발시발시발시발.


하루종일 토악질을 했다. 

귀중한 식량이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조금 진정되어 글을 쓰는데도 

메식거리는 느낌이 몸을 가득 채운다. 거지같다.


식량 1일치로 괴생명체들과 맞서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득인 걸까? 


더러워졌던 붉은 후드를 다시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괴생명체들의 정체는 무언지. 해부하면 무엇이 나오는지.

그런것들을 고민했었던 과거도 있었다.

그보다 훨씬 전, 인간의 정체는 무언지, 고민했었던 과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적어도, 인간의 정체에 대해선.

저 좆같은 물안개가 내 생각을 좀먹는 느낌이다.

질척대는 실루엣들이 아파트 아래를 

지나갈때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아니... 아니다.... 눈에 띄지만 않으면 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4년간 그렇게 잘 살아남아 왔다.

그리고 내가 살던 일생 동안에도, 그렇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물안개 속이니, 

내가 할 일은 더욱 명확하다. 

나는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물안개. 13일차.



식량을 구했다. 

아파트 안에 가득했던 것들이 어느샌가 

썩어 있었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잠깐 사냥을 다녀왔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물안개가 낀 이후로는 모두가 

방독면을 쓰고 다녀서 사냥이 편해지고 있다.

오늘도, 꽤 수확이 있었다. 능숙해지고 있다.

익숙해지는 것과 능숙해 지는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렇게 사냥을 성공하거나 어느정도 운이 좋은날에는 

언제나 '드레스'를 만난다. 

사과를 주고 떠나는 여인. 마녀. 턱시도들의 여왕.


그 사과가 턱시도를 양성하는 무언가라는 것은 

누군가 남긴 기록으로 인해 잘 알려졌지만, 

만날때마다 사과를 주는 대신 나에게 지어주는 

아름다운 미소는 무엇인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차라리 사과를 건네는 것이 마음 편할텐데. 


알 수 없는 웃음만을 근 3년간 보내고 

떠나니 항상 불안하다. 

무언가 말하려는것 같기도 하여 들어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항상 턱시도 무리가 돌아다니기에

그 중얼거림을 듣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물안개. 17일차


오랜만에 비가 온다. 

차라리 이제 물안개보다는 비가 반갑다. 

그러나, 이번 비는 전번과 달랐다.


빠득 빠득 소리를 내며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에 손을 닮은 

거대한 무언가가 돌아다니는 듯 했다. 


놀라서 밖으로 잠깐 나가보았지만, 

평소같이 스산한 아파트 풍경과 널부러진 

붉은 시체들만이 나를 반겨줄 뿐이었다. 


하... 그래 이것도 치웠어야 했는데.

저놈의 비는 피를 씻겨 내리질 않는다.

결국, 약간의 청소는 또 나의 몫이었다.

씻겨 내려가지 않는 것들은 내가 먹어치우겠지만.


어쨋든 간에.

다시 집에 들어갔을때도

밖에서 무언가 돌아다니는 느낌은 그대로였다.


마치 정상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

모든 관절을 꺾어가며 고통스레 이동하는

그런 인간의 모습이 연상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런 소리는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았다.


차라리 비명소리가 나았는데. 


모르겠다. 

이 이상 글을 쓰다간 정말 혼잣말을 시작할 것 같다. 

오늘은 이만 줄여야겠다.
















홍수. 1111011일차. 

쓸려내려간다.





내머릿속을헤집고기어다니는저아름답고처참한가는손가락이보고싶다무엇으로이루어져있는지해체하고그것을입에집어넣어사랑하고싶다드레스를입은아름다운망국의여왕이시어죽어가는나의뇌를다시당신의왕국으로아아아아이죄많은성자를다시가죽을벗겨성채의위에자랑스레걸어두소서










홍수. 1374711일차. 

물에잠긴다.






바다 아래에 잠긴 우리의 마지막 삶의 단서.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잔혹함을 가진 사람들.


아름다운 공주님의 목소리는 닿지 않는 곳이 없기에, 또 다시 오늘도 기사들에게 명령합니다.


그녀의 손은 닿지 않는 곳이 없기에, 

멸망한 그녀의 영토를 한번 매만져 봅니다.


그녀의 백성은 언제나 단서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부정형의 몸뚱아리는 그것을 쉽지 않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아. 공주님은 그 사실이 슬퍼 

펑펑 울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멋진 왕자님이 구하러 오실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습니다. 


아직, 때가 아니거든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빨간망토를 두른 서투른 사냥꾼들에게 

멀리서나마 미소를 지어주는 것 뿐입니다. 


격려해 주는것 뿐입니다.


곧 진정한 사냥꾼이 되기 전까지 지켜봐주는것 뿐입니다.


언젠가는 바다가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전까지.


공주는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끝없이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아아 아름다운 공주님.


아직 그대의 여정은 한참이나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함께할 것입니다.


영원히, 그대의 곁에서.


그럼, 다음에 또 만나자고요.


잠시만 안녕.
















물안개. 24일차.


정신을 차리는데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이상한 기록들이 내 노트에 남아있다. 

뭔가... 단서가 될것 같지만, 두렵다.

무언가 다른 것이 머릿속을 휘갈겨 놓은 느낌이 든다.

한동안 앞쪽의 노트를 펼칠 생각은 하지 못할 것 같다.


비가 올때 나타났던 그 거대한 손 모양 실루엣.

그게 문제였던 듯 하지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처음 턱시도를 봤을 때가 생각이 난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스튜디오에서 내가 들었던. 

긁어대는 소리가 내 방 어딘가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하다. 


일단... 일단 잠을 좀 자야 할것 같다. 


밖의 날씨는 안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다.

이런 날은 턱시도도, 슬라임도 돌아다니지 않는다. 


괜찮을 거다. 괜찮다...









물안개. 26일차.



아파트 주위에 턱시도가 가득하다.


들어오진 않지만, 나갈수도 없다.









물안개. 27일차.


식량이 떨어져 간다.


턱시도들은 아직도 돌아다닌다.


더 많아진 것 같다.







물안개. 28일차.



그들이 나를 본다. 

그들이 나를 보고 있다. 


그 저주받을 초록색 눈깔을 돌려 나를 보고있다고. 

그 눈 치워 제발. 


너희들 뒤에 있는 그 거대한 눈동자한테도 부탁해줘. 

나는 눈에 띄고싶지 않아. 

제발. 이 글도 보고 있잖아. 안그래? 


너희들 다 알아듣잖아. 왜 엎드리는거야? 

그것보다 저 눈 좀 어떻게 해봐. 

날 아직도 보고 있잖아. 


그만 쳐다봐줘. 제발. 그만해줘. 


긁는 소리가 더 심해지고 있어.

마치 무언가로부터 나가고 싶다는 듯이.


누군가 환호성을 지르고 있어.

아아 노스텔지어의 나부끼는 붉은 드레스여.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어.

즐겁게 속살이는 바다와 살점으로 가득한 이야기.


더 많은 사람들이 달려온다.


눈동자에 생기를 잃었지만 

나를 분명히 바라보고 있는 빌어먹을 사람들이 달려온다.


2일차에 보았던 목적없이 달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이제는 나의 안식처로 향한다.


누군가 있다. 

그들 사이에 누군가 나를 바라본다.

다른 시선들과 달리 마음이 편안해진다.


무언가 떠오르려 한다.

머릿속에 물이 차오른다.

사과?

옛날 이야기?









물안개. 29일차.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하얗게 표백된지 오래다.


내가 살아있는건, 맞나?


여기가 내 아파트 안인것은, 맞나?


창문에 들러붙은 수많은 초록색 시선들이 나를 보고 있는게, 맞나?


내 팔을 움직이려 해도 무언가 다른 것을 하고 있는 듯한 이 느낌이 현실이, 맞나?


긁는 소리는 이제 내 머릿속에서 나는거 같은데. 맞나? 



환영한다. 사냥꾼이여.

















물안개. 30일차.



눈이 멀어버린 사냥꾼은, 비와 안개에도 굴하지 않고 

오늘도 사냥감을 찾아 나섭니다. 


그의 팔이 몸을 미친듯이 긁어대는 이유요? 

글쎄요. 어딘가 가려운가 보죠.


당신이 궁금할만한 일은 아니에요.


아, 빨리 도망치는게 좋을 것 같네요. 

사냥꾼의 눈들이 당신을 목격했어요. 


달려오는 사람들이 보이시나요? 

그의 뽑힌 눈을 대신하는 것들이죠.

망국의 백성이 되지도 못한 불쌍한 것들.


자자, 애처로운 빨간망토사냥꾼이 당신을 잡으러 옵니다! 있는 힘껏 도망쳐 보세요!























정말 오랜만에 글써보네요. 메모장에 꿍쳐뒀던 아이디어를 이어붙여서 써봤습니다. 너무 묵혀놨던지라 급조한 티가 좀 나는건 어쩔수가 없어요 ㅋㅋㅋ 

재밌게 감상해주시고, 비판과 감상평은 언제나 환영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