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지금 녹음되고 있는 거 맞지?

-나만? 내가 하는 말만 녹음된다고?

-그건 불공평해. //// 난 수색자라고. 이 중에서 진짜로 목소리를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야.

-진짜 변태 같잖아. 무슨 녹음기가 사람을 가려가면서 누구 목소리는 인식하고 누구 목소리는 빼놓고...

-잠깐만, 여기 왜 이렇게 숨이 차지? 여기 지하야? 산소 농도 좀 올려봐. 이러다 현기증 나겠어.

-엄청나네. 그래, 아주 떼거지로 들어와라. 숨도 쉬기 힘든 좁은 방에.

-어쩐지, 섬사람답지 않게 잘 뛴다 했더니만, 너네 심폐지구력의 비결이 이거구나. 산소도 별로 없는 지하방에서 다같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거.

-대충 알만하네. 난 너희가 모든 면에서 굉장히 풍족하게 살 줄 알았는데.

-그래, 바로 그게 우리가 서로 무역을 해야 하는 이유야. 우리 쪽에 산소발생기... 같은 건 없지만, 그걸 만들 재료 정도는 구할 수 있었겠지. 그리고 종이가 있었어봐. 너희가 속기사를 두는 대신 이런 변태 같은 녹음기 만드느라 시간 낭비를 했겠어? 무역으로 전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어.

-야, 내가 여기 잡혀왔냐? 아니, 잡혀있기는 한데, 아무튼 내가 오기로 마음 먹어서 내 발로 온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늬들이 날 잡아올 수 있었을 것 같아? 그래. 뭐, 들켜서 잡히기는 했지만.

-/////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 아! 됐고. 들어보기나 해. ///// 조용히 해! 조용히 해!

-일단! //// 일단 한 번이라도 내 말 좀 들어! 우리한테는 종이가 있어! 의약품도 있고! 발전기도 있어! 무기, 제련소, 탈 것, 옷감도 많다고. 너희한테는 식량과 종자가 있지. 가축들도 많고. 전부 우리한테 부족한 것들이야. 이래도 감이 안 오냐?

-서로 부족한 걸 채워주자는 거지. 무역. 거래. 상업.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어제 샀던 거랑 같은 걸로 주세요.' 얼마나 좋아.

-너희도 우리 사람들 수두룩하게 죽였잖아. 그렇다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거야? 서로 죽이면서? 인간들끼리 죽여대지 않아도 저 밖에 사람 멸종시키고 싶어서 안달난 것들 넘쳐나잖아. 왜 이리 피를 못 봐서 안달이야.

-그 말 똑같이 돌려주도록 할게. 우리 정착지 사람들도 너희 못 믿어. 근데 사람들은 인간 아닌 것들을 더 못 믿지.

-정착지끼리의 약속이 어려우면 일단 나하고라도 거래를 하자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하고 물건들을 가져올게. 너희가 필요로 하는 것들로. 그럼 너희도 나한테 식량이나 씨앗 좀 줘.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조금씩 거래하다가 내가 어느날 우리 쪽 사람들한테 밝히는 거지. 그동안 먹은 음식이 다 강화에서 온 것들이었다고. 그럼 사람들이 선택을 하겠지. 그동안 먹은 걸 죄다 역겨워하며 토해내고 쫄쫄 굶던 생활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이 멍청한 적대관계를 청산하든가.

-'포로', '포로'거리지 마라. 듣는 포로 기분 나빠.

-현실성을 따지자면 오히려 내 제안을 받아야 해. 너희한테는 오염되지 않은 농지가 있지만, 우리한테는 방사성 쓰레기를 구해서 그 농지를 오염시킬 방법이 아주 많거든.

-협박이라니. 오히려 너희한테 정보를 준 거지. 상상력을 발휘해보자고. 나 혼자서 여기까지 숨어들어왔을 정도면 서곶이 작정하고 여기를 치려할 때 무슨 짓까지 벌일 수 있을까?

-말했잖아. 전쟁하러 온 게 아니야. 우리와 너희가 지금은 사이가 안 좋더라도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이왕이면 서로 배려를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역사는 항상 통합을 지향하지. 분열과 반목은 과속방지턱에 지나지 않아. 서곶과 강화, 두 정착지도 함께 살아갈 수 있어.

-아니. 나도 어디서 들었어.

-어, 그래. 고마워.

-머리?

-잠깐만, 장난하는 거지?

-이봐. '포로', '포로' 거리더니 이제 진짜로 포로처럼 처형하겠다고? 야, 너희가 날 이렇게 대접해서 그렇지 난 사실상 외교관이야.

-야, 씨발! 잠깐만! ////// 이거 완전히 미친 새끼들 아냐! 야! 나 외교관이라고! 지금은 외교관이야!

-////// 야! /////// 이! /////

-/////// 잠깐만! 잠깐만! /// 내 말! 내 말 좀 들어봐!

-한 마디만! 야! /// 너흰 궁금한 것도 없냐?

-그래! 야, 나, 나 수색자거든. 나 서곶 수색대원이야. 아는 거 엄청 많다고. 이것저것 말해줄 테니까 일단 살려놔.

-진짜, 진짜 다 말해줄 수 있어. 물어만 봐.

-서쪽 게이트 비밀번호 578683. 감시탑처럼 생긴 건 미끼고 진짜 위병들은 사실 반지하형 토치카에서 길리슈트 쓰고 경계근무 서. 문 앞에 언제든지 개방할 수 있는 함정 구덩이가 있으니까 그쪽으로 마구 몰려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못 믿겠으면 지금 가서 확인해봐.

-거짓말 탐지기? 너네 진짜 의심 많구나.

-당연히 진실이라고 나오겠지. 사실대로 얘기했으니까.

-아무렴, 난 현실주의자거든. 그리고 엄청 살고 싶어. 그러니까 고문 같은 거 할 필요도 없어. 오히려 하는 게 더 안좋은 선택이야. 나 아픈 거 진짜 엄청 못 참거든. 나 맞거나 찔리면 토하기 시작한다. 여기 이 카펫 더럽혀지는 건 늬들도 싫잖아, 그치?

-후./// 살려주는 거 맞지?

-좋았어. 뭘 더 말해줄까?

-가장 높아보이는 벽이 약점이야. 적이 처들어오면 자연스레 가장 낮은 남쪽 벽을 공략할테니 그쪽에 함정과 보강물을 도배해뒀지. 또 궁금한 거 있나?

-그건 새빨간 거짓말. 우리 국방장관이 너희들한테 허풍 떤 거야. 생각을 해봐. 이쪽에서 그런 무시무시한 물건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으면 너희를 아직도 살려뒀겠어? 진작에 죄다 갈아버렸겠지.

-거짓말탐지기도 못 믿을 정도로 의심하고 있으면서 애초에 뭐하러 물어본 거야? 진짜라니까.

-윤제시카? 그걸 늬들이 왜 궁금해하지?

-그것도 거짓말이야. 실종된지 오래다.

-말했잖아. 난 그냥 살고 싶은 거야. 우리 쪽 애들한테 미안해도 어쩔 수 없지. 지금 걔네가 날 살려줄 수 있는 것도아니고.

-몰라. 전혀 몰라. 어딘가에 살아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꼼짝없이 죽은 건지...

-그건 아닐 거야. 우리 쪽 수색대원들 전부 되게 당황한 상태거든. 집단으로 정신병이라도 일으켰는지 자꾸 밖에서 제시카를 본 것 같다는 애들이 나오고 있어.

-제시카를 '본 것 같다'는 건 말이 안 돼. 제시카는 눈에 띄고 싶지 않다면 다른 수색대원으로부터도 철저하게 숨을 수 있는 실력자야.

-가능성이 없어. 제시카는 돌아와야 할 이유가 많아. 우리 정착지가 자기한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어. 그런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면 진짜로 죽은 게 확실해. 살아있다고 해도 지금 나처럼 어딘가에 억류되어서 꼴이 말이 아니겠지.

-다들 나만큼은 생각할걸.

-제시카는... 뭐라고 해야 하나. 그, 있잖아, 원래 수색대원들은 각자 맡은 방향으로 흩어져서 혼자 다니는 게 룰인데. 뭐야, 너네는 안 그래?

-신기하네. 서곶은 그게 규칙이다. 한 번에 여러 명의 수색대원을 잃는 건 진짜 곤란한 일이라 우린 다 혼자 다녀. 누군가가 특별히 위험한 곳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오기로 한 시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구조대는 파견하지 않아. 로드팩 채워서 정착지에 돌아오거나, 아니면 영원히 다시는 얼굴을 못 보거나 둘 중 하나야.

-맞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제시카는 말이야, 규칙에 얽매이는 성격이 아니야.

-자기 맡은 구역만 혼자 돌아다니는 전형적인 수색대원이 아니라는 거지.

-아니, 같이 다니는 건 아니야. 그런데 진짜 꼼짝없이 죽겠다 싶은 위기에 처하면 어김없이 걔가 나타나서 구해줘. 그게 뭐든 간에. 호버킬러, 왕관파리지옥, 대왕문어, 다른 적대적인 수색자까지. 제시카가 처리하지 못하는 건 없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나타나서,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일을 해결하고는, 대장한테 비밀이라면서 자기 할일 하러 휙 떠나버려. 그 뒤에 정착지에 돌아가면 제시카가 아무 일도 없던 척 도서관에 앉아있는 거지. 다들 그런 식으로 제시카한테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도움을 받았을걸.

-각자 짐작해보기도 하고, 제시카한테 직접 물어보기도 했었지. 그래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냥, 다들 제시카를 숭배하다시피 해. 제시카처럼 되고 싶어하기도 하고.

-이름이 중요한가? 아무도 걔 혈통에는 관심 없어.

-별 수 없지. 그냥 살아가야하는 거야.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아니, 없어. 너희들에게서는 포로를 잡지 않는 게 이쪽 정책이야.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너희도 우리 사람들 포로로 잡을 마음 전혀 없잖아. 당장 나만 해도 머리 갈라서 죽이려고 했으면서.

-미추홀 포로는 좀 있었지.

-교환했어.

-미추홀 쪽이랑은 평화협정을 맺었으니까. 밖에서 수틀리면 서로 총질 좀 해대더라도 죽이지는 않기로 했어.

-아, 날카롭네. 그래. 목격자가 있을 때는 죽이지 않기로 했어. 그래도 포로로 잡은 것을 살려보낸다는데 의의가 있는 거지.

-아니. 우리 쪽 사람들은 너희들하고 그냥 평화협정을 맺는 수준이 아니라 항구적인 동맹이 되길 원하고 있어. 그러지 못하면 너희를 죄다 죽여야 한다는 게 우리 쪽의 지배적인 의견이야.

-있잖아. 뭘 물어보든 다 얘기해줄 텐데 말이야. 그 전에 나도 하나 물어보자. 나 살려주는 거 맞지?

-인간은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면 조리있게 말을 잘하거든. 필요한 정보도 더 빨리 떠올릴 수 있고.

-아, 칭찬 고마워. 그런 소리 자주 듣곤 해.

-왜들 그래? 난 칭찬은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편이야. 그리고 기분이 좋은 게 나쁜 것보다 낫거든.

-아무렴.

-열한 명 있어. 수색대장 한 명을 제외하고.

-구역을 나누어 배당하지.

-서곶 일대와 부평 해역을 수색하는 게 한 명, 고양 해역에 한 명, 까치울에서 관악 사이 고척 해역을 돌아보는 게 한 명, 미추홀과 아이페즈 일대에 한 명, 너희 섬과 김포를 오가는 게 한 명, 시화 해역에 한 명, 마지막으로 영종 군도와 공항 해역에 한 명. 나머지는 굳이 그렇게 구역을 배정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도는 베테랑들.

-반드시 각자 구역에만 머무는 건 아니야. 본인구역에 날마다 특이사항이 있는지만 확인하면 수색이 쉬운 다른 구역으로 옮겨갈 수 있어. 특별히 부족한 물자가 있으면 그걸 구하기 쉬운 방면으로 한 곳에 여러 수색대원을 털어넣기도 하고.

-한 곳에 여러 명을 투입한다고 했지, 걔네가 다 같이 다닌다고 한 적은 없어.

-난 구역 같은 거 없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도 서곶 일대고, 제일 경험없는 수색대원에게 맡기는 것도 서곶 쪽이야.

-서곶에 정착지가 있으니까. 다른 수색대원들이 나가고 돌아오면서 서곶을 살필 수밖에 없어. 집 앞이라 제일 중요한 동시에, 제일 안전한 곳이라 풋내기 훈련하는 장소로 쓰는 거지.

-제일 위험한 곳? 글쎄, 등급을 매기는 게 의미가 있으려나. 어디든 죽기 딱 좋은 곳이라서 말이야. 그래도 한 곳만 콕 집어본다면 고척 해역이겠지. '서울에 가까울수록 지옥에 가깝다.' 다들 하는 말이잖아.

-그것도 그냥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제일 경험 많은 너희 수색자보다 우리 쪽 신참이 더 나을걸.

-왜냐면... 실력이 좋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으니까? 아무도 수색대원 자리를 강요하진 않아. 결말이 정해진 거니까. 그래도 하겠다고 나서는 애들한테서는 여러 가능성이 엿보이지.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서는 게 용기고, 그러면서도 살 것이라 믿는 게 희망이야. 둘을 합쳐놓으면 희한하리만치 우수하게 기능하는 슈퍼 인간이 탄생하지.

-서곶은 너희 같은 여유가 없어. 가진 것에만 의지해서는 하루도 버틸 수 없지.

-너흰 오염되지 않은 넓은 땅이 있고, 거기서 키울 종자랑 가축도 있고, 지하에 수경재배 시설도 있잖아. 걱정할 거라고 해봐야 뭍으로 올라오는 문어나 가끔 지나가는 립타이드 무리가 전부에, 그마저도 고기 몇 덩이 던져주면서 쫓아내겠지. 우리 쪽은 사정이 달라. 석남항이 바로 옆에 있고, 계양 쪽에는 잠들어있는 드론 기지가 있어. 남쪽의 미추홀하고는 요즘에 조금 덜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고, 유일한 동맹인 제물포는 약해빠져서 우리가 보호해줘야 하지. 봄에는 문어들이 알 낳기 좋은 내해로 들어가려 우리 정착지 앞에 개떼처럼 몰리고, 겨울이 되면 서울에 잠들어 있던 것들이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사냥을 나와. 서곶은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에게 포위된 형국인데, 그것들이 하나같이 정착지 벽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죄다 죽여버리려고 하지. 강화에서 다음달의 작황을 걱정하는 동안 서곶에서는 내일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걱정해. 너희에게 외부로 나가는 건 선택의 문제겠지만, 이쪽 사람들에겐 생존의 유일한 길이야. 삶에 임하는 태도부터가 다른데 너희 수색자와 우리 수색대원의 수준이 어떻게 똑같겠냐.

-불가능하진 않아. 아주 간단한 훈련법만 도입해도 너희 수색자들 실력이 껑충 뛸걸.

-간단해. 아무것도 못 찾은 수색자에게는 그날 아무것도 먹이지마. 돌아오지 않는 수색자는 죽은 걸로 치고 잊어버려.

-가혹한 건, 세상살이랑 너희가 아까 나한테 하려고 했던 짓이 가혹한 거고.

-아하, 언제 물어볼까 싶었지. 근데 그거 좀 민감한 질문인데.

-어, 진짜 말해?

-지금? 당장? 여기서?

-답하지 못할 질문 같은 건 없어. 난 살고 싶다니까. 하지만, 뭐랄까.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다 같이 함께 들어도 되겠어?

-생각해봐. 내 입에서 나오는 이름 주인이 여기 이 자리에 있다고 치자. 그럼 서로 얼굴 보기 되게 민망하지 않을까? 이런 거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만, 너희들 서로 믿고 있을 거 아냐.

-그게 말이야. 내가 수색대 회의 중에 이름은 몇 개 주워들었어도 얼굴까지는 잘 모르거든.

-날 믿어. 서곶은 스파이 활동도 엄청 활발히 해.

-///// 아, 아, 아! 지금 날 죽이면 스파이가 있는지, 없는지, 그게 누군지도 영영 모를텐데. 그럼 계속 서로를 의심하면서 피곤하게 살아야하지 않겠어?

-바로 그거지. 지금 이 타이밍에 날 죽이자고 하는 사람은 아주, 아아주, 아아아아아주 수상한 사람이야.

-그런 말 해봐야 아무 의미 없어. 난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다고. 그러려고 너희들한테 내가 아는 것부터 다 말해주고 있잖아. 우리 정착지에 정말로 치명적인 내용까지 밝히려고 하고 있고. 이게 내 개수작이야. 너희한테 비밀이란 비밀은 죄다 다 불어버리는 거, 너희가 내 이용가치를 인정하게 만들어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거. 이게 내 계획이라고. 저 거짓말 탐지기 봐. 여태까지 한 번도 안 울렸잖아. 내가 계속 사실만 말하고 있다는 뜻이지. 너희 엔지니어가 바보라서 저 기계가 맛이 간 게 아니라면 말야.

-참 보기 좋네. 포로 앞에서 수뇌부끼리 서로 이름 불러가며 정다운 말도 나누고.

-알았어. 아무 말도 안할게. 하던 거 계속 해.

-있잖아, 저기 미안한데 나 물 한 잔만 주지 않을래? 아까 말을 많이 해서 목이 마르네.

-오, 고마워.

-흠, 꽤 길게 대화할 모양인데.

-저녁 먹을 시간 되기 전에 결론 나는 거 맞지?

-그럼 답도 이미 정해진 것 같은데 왜 계속 질질 끄는 거야?

-이봐, 서로 감정이 격해지는 것 같은데 둘 다 일단 좀 앉는 게 어때?

-좀 말려봐. 저러다가 진짜 싸우겠어.

-오우.

-에헤이, 진정해. 이게 서로 주먹다툼까지 할 일이야?

-좀 앉으라고. 점잖게 좀 얘기들 해.

-그 얘기는 아까 끝난 일 아니었어? 이제 와서 다시 꺼낼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그래, 말 한 번 잘했어. 따질 건 따지고 넘어가야지.

-말이 너무 심하잖아. 같은 정착지 사람들끼리 꼭 그렇게 상처 줘야겠어?

-나도 똑똑히 들었어. 서곶식 사고방식으로도 분명히 그건 사과해야 할 일이 맞다고 생각해.

-잠깐. 그건 좋지 못한 아이디어 같은데.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는 건 혼자 있는다는 뜻이잖아. 누군가는 자기가 스파이라는 게 들통날까봐 탈출을 준비할 수도 있지.

-워, 워. 다시 말하지만, 지금 내 입을 다물게 하려는 사람은 의심받기 딱 좋다고.

-그래, 그게 제일 좋겠어. 내가 최고지도자와 독대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다 같이 다른 방에서 대기하는 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 이름이 '개수작'인 줄 알겠어. 내 손 묶여있는 거 안 보여?

-후, 이제 좀 조용하네. 진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겠어.

-사람이 적을수록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기 쉬워.

-서로 안면 튼 건 한참 전인데 이제야 내 이름을 물어보네. 여기 이쪽에, 내 명찰 보여?

-그건 제시카가 특이했던 거지, 서곶 사람들도 다 평범한 이름 써.

-아, 그래. 그 얘기를 하고 있었지. 이제 단둘만 남았으니 얘기해줄게. 강화에는 우리 쪽 정보원이 없어.

-진짜야. 거짓말 탐지기 좀 봐. 쟤도 사실이래잖아.

-난 스파이가 있다고 말한 적 없어.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다들 듣는 앞에서 해도 되겠냐고 물어봤지.

-이 편이 서로에게 더 좋지 않겠어? 난 방해꾼 없이 내 견해를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고, 당신도 이 기회를 활용할 수 있을지 모르지.

-눈치 없는 척 연기하는 거야?

-당신 조언자들, 아님, 신하들? 내각? 내각 좋네. 당신 각료들 말이야, 지금 다른 방에서 열심히 서로를 의심하느라 아무 생각도 없을 거야. 기껏해야 이 방에서 나간 뒤에 당신이 뭐라고 할지가 궁금하겠지. 걱정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뒤가 켕기는 짓을 했다면.

-다른 정착지들에 대한 건 몰라. 하지만 적어도 서곶은 여기에 첩보원을 파견한 적이 없어.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귀중한 자원은 식량이지 정보가 아니니까.

-음, 이런 말 미안하지만, 강화가 대단한 외교중심지나 기술적으로 앞선 정착지는 아니야. 그건 당신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죽이면 죽이는대로 픽픽 죽어주는 단순한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첩보원을 파견하는 수고를 들일 이유는 없지.

-이런, 기분 나빠하지 마. 구구절절 사실이거든. 미추홀이나 용산 같은 정착지에 비하면 당신들은 아주 단순해. 비옥한 농지가 있어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으니, 문 단단히 걸어잠그고 바깥과는 아주 제한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살겠다는 거잖아. 너희들이 수색자 훈련에 그리 많은 공을 들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건 제 3자 입장에서 볼 때, 겁에 질린 나머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혼자 서서히 죽어가겠다는 걸로 보여.

-아니. 비난하거나 얕보는 게 아냐.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도 있다는 거지.

-바로 그거야. 무역, 거래, 상업. 강화와 서곶이 오래된 원한을 청산하고 서로가 필요한 걸 교환하는 거.

-선물? 선물은 이미 하나 준 것 같은데.

-지금 이 상황 말이야.

-유능한 리더는 자기 측근을 모두 신뢰하지 않아. 당신도 예외는 아닐 것 같은데. 지금 다른 방에서 서로 눈알 부라리면서 모여앉아있을 각료들을 생각해봐. 그 중 몇은 죽었으면 좋겠지? 이번 기회를 이용하는 건 어때?

-어떻게 알긴. 인간들 정치하는 거야 다 비슷비슷하지 뭐.

-내가 그 사람 이름을 말했다고 해. 그것만큼 좋은 명분이 어디 있겠어. 적당히 거슬리던 놈 스파이로 몰아서 처형하고 당신 권위는 드높이는 거야.

-날 죽여서 각료들에게 신뢰를 얻으면 이번 기회는 날아간다. 눈엣가시 같은 놈을 뽑아낼 기회인데 이렇게 날릴 거야?

-그럼 녹음기도 숨겨. 망가뜨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 차라리 아예 못쓰게 만드는 걸 추천해. 특정인의 목소리만 녹음하는 기계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변태같아.

-저 거짓말 탐지기로 충분해. 아직 한 번도 울린 적 없지? 앞으로도 울릴 일 없을 거야. 저게 켜진 뒤로 난 계속 진실만 말하고 있거든. 의문을 가지는 친구들에게는 저 기계 작동 이력만 보여줘도 될 것 같은데. '봐라. 거짓말 탐지기가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저 포로는 계속 사실대로 얘기했다.' 그것보다 부정하기 힘든 증거가 어딨겠어.

-당신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라면 지금 이 곳에 나한테 위협적인 건 아무것도 없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필요한 이름을 말해. 난 그저 말해줄 뿐이야.

-'장필순', '이길정'.

-당연히 안 울리지. 난 당신 질문에 답한 게 아니라 그냥 이름만 말했거든.

-바로 날 의심하기 시작하는 건가.

-아, 이런. 딱 걸렸네. 그래, 저건 거짓말 탐지기지, 개수작 탐지기가 아니니까. 당신은 날 신뢰할 수 없어. 나도 내 이익을 추구하거든.

-다른 모든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나만의 어젠다가 있어.

-그게 뭔지 듣고 나면 당신 정착지에서 나를 내보내고 싶을걸. 하지만 내 어젠다와 당신의 이익이 정면으로 충돌할 일은 없다고 약속할게.

-아니. 당신이 계속 물어보면 결국은 말해줄 거야. 그리고 당신은 후회하겠지.

-웃는 모습이 예쁘네. 매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건가?

-이런. 다들 의미 없는 농담 몇 마디만 하면 태도가 누그러지던데, 당신은 참 단호하네.

-그럼 내 마스크 좀 벗겨보는 게 어때?

-어. 왜냐면 내 손은 보다시피 묶여있으니까?

-아, 그걸 묻는 거였구나. 왜냐면 내 얼굴을 보면 당신도 번식욕에 사로잡힐 거거든. 우리 둘 다 서로한테 조금 더 우호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왜? 이미 당신 교미 상대가 정해졌나? 아니면 내가 외부인이라 믿을 수 없어서?

-그래, 질문하는 건 당신이지. 하지만 이제 궁금하잖아. 안 그래?

-흠.

-약속할 수 있어.

-맹세?

-특이하군. 뭐, 못할 것도 없겠지. '나는 이 방에서 오간 대화에 관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방 안에서 알게 되는 비밀을 절대로 외부에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피차일반이야. 그래도 저 거짓말 탐지기가 켜져있는 동안은 우리 서로 거짓말 하지 말자고. 걸리면 서로 얼마나 어색하겠어.

-그렇게 불편하면 이걸 일종의 기회로 생각하는 건 어때?

-서곶에서는 정착지 리더가 사형이 확정된 죄수하고 단 둘이 얘기를 나누기도 해. 곧 죽을 사람한테 무슨 얘기든 못하겠냐는 거지. 그렇게라도 속마음을 털어놔야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게 리더의 자리라잖아.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가끔은 말하는 내용이 절대 새어나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되거든. 그럴 때는 그 어떤 대답도, 제안도 필요 없어. 영원히 혼자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사실을 본인 목소리가 읊어대는 것만 들어도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니까.

-자, 거짓말 탐지기 잘 봐. 난 당신을 판단하지 않아. 봐. 안울렸지?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비난하거나 칭찬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별로라면 하던 대로 질문이나 해. 계속 답해줄게.

-이것도 선물이라도 해두지.

-잠깐만. 말하고 나니까 문득 든 생각인데, 나 살려줄 거지?

-이봐, 사형수 이야기는 그냥 비유였다고. 난 죽이기에 너무 쓸모있지 않아?

-하, 정치인처럼 말하네. 잘 어울려.

-내가 보통 인간이었다면 지금쯤 슬슬 불안해하고 있겠지.

-난 이런 걸로 심장박동이 빨라지기에는 끔찍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어.

-가장 창의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도살하는 기계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야생에 적응해서 생태계의 일부가 된 생물병기들, 악몽에나 나올 법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다른 정착지들 등등.

-최근? 최근이라면... 서곶 사람들을 죄다 미칠 지경으로 몰고 간 일이 하나 있지. 정착지 의료 창고에 불이 났었어. 약품이나 수술용 도구 같은 것들은 대부분 무사했지만, 혈액팩은 죄다 터져버렸더라. 그걸 만회하기 위해 한동안 돌아가면서 꼬박꼬박 피를 뽑아야 했어.

-왜 자꾸 이런 걸 묻지? 무서운 이야기라도 듣고 싶어?

-어디보자.

-좀 기다려봐. 뭐라고 말해야 좀 점잖게 들릴지 생각 중이야.

-인간. 인간이 가장 공포스러워 할만한 짓을 할 수 있는 건 역시 인간일 거야.

-기계와 생물병기들은 철저히 필요에 의해서 인간을 죽이지만, 인간들은 살인을 즐기기도 하니까.

-학대를 즐기는 건 모든 고등동물에게서 발견되는 특성이야. 그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창의적으로 고통을 줄 수 있어.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야. 설마하니 당신 쪽이나 우리 쪽처럼 인천 군도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는 조그마한 정착지들이 기술적으로 가장 발달한 세력이라고 생각하나?

-많은 정착지들에게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인간 세력들도 있어. 멸망지능들의 눈을 피해서 몇몇 인간들이 마지막 로켓을 타고 저 달로 도망가는데 성공했다는 소문도 있고, 절대 침몰하지 않는 배를 타고 영원히 바다를 떠도는 사람들도 있다지. 그런 인간들은 멸망 전의 기술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

-맞아. 그냥 소문에 불과했으면 우리 정착지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겠지.

-모르긴 몰라도, 조용히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이 인천 해역 전체를. 서울에 잠들어있던 것이 기어나온다면 가장 먼저 여기를 들를 테니까.

-지금은 그렇다고 해도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몰라. 당신들은 바깥에 관심이 없지만, 바깥은 지금도 당신들한테 아주 관심이 많거든.

-갑작스럽군.

-마음대로 해.

-괜찮은 거야?

-그래? 그것뿐인가?

-이상하네.

-왜냐면 그냥 숨만 차는 게 아닐 거거든. 살짝 어지럽기도 하고, 손발은 저릴 거야. 아무리 숨을 깊게 들이마셔도 공기가 모자란 것 같겠지. 그리고 이 상황이 계속되면 넌 결국 정신을 잃을 거야.

-표정 좀 봐. 누가 보면 배신이라도 당한 줄 알겠다.

-당황하지마. 당신한테 내가 무슨 짓을 한 게 아니야. 과호흡이라는 거지.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지내다가 풍족한 산소에 노출되어서 그래. 사람들 다 내보내면서 이 방 산소농도도 두 사람 분으로 낮췄을 거야, 그렇지?

-심호흡 하지 마. 당신은 숨이 찬 게 아니라 혈중에 산소가 남아도는 거야. 오히려 숨을 참는 게 더 도움이 돼.

-내 손은 당신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여태까지 계속 묶여있었잖아. 내가 한 일이 아니야.

-잘 이해가 되지 않나보네. 산소가 너무 많다고.

-우리 둘이 앉아있긴 하지만, 이 방에 두 사람 분이나 넣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왜일까? 생각을 해봐.

-지금 네 표정을 네가 봐야하는데. 눈치챘어?

-정답이야. 난 호흡할 필요가 없어. 그래도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생각해서 숨쉬는 척은 하는 편인데, 어쩌면 그게 더 모욕적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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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 가장 중요해요.'와 같은 세계관이야.

'아무도 믿지 말고, 아무도 의심하지 마.'랑 비슷한 시기에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음.


포스타입에 올린 건 이 뒷내용을 더 달고 있긴 한데 꼭 읽을 필요는 없어.

그동안은 주 연재처가 이곳이었지만, 내가 쓰는 글에 달리는 특정 태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

그래서 여기에 올릴 글도 좀 선별해서 가져오기로 했음.

노골적인 건 그냥 포타에만 올리려고.


긴 글인데 읽어줘서 고마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