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의 나레이션을
따라가는 걸까요?


그게 어떤 식으로든 그들 자신의 삶에 물드는 것을
수도 없이 봐왔습니다.


항상 빛나던 당신, 그 옆에 그늘처럼 드리운 사람들조차도.


항상 바래왔어요. 매일 상상했죠.
굳센 그대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대 기억 속 한 켠을 차지하는 것.


설령 그게 불행한 각인일지라도.


기실, 그럴 일은 없어요.
저는 어디까지나 비루한 겁쟁이에 불과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이렇게 편지를 쓰거나.


진력이 날 때까지 그대의 이름을 적다 잠드는 것.


그것뿐입니다.












불현듯 스미는 고독감에 다시 깃펜을 잡았습니다.


자애로운 미소, 겸화한 말투, 곡풍에 살랑이던 금발의 머릿결.


그 어떤 것 하나라도 쉬이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조각들은 온 힘 다해 기어코 내 안에 뿌리내렸죠.


이로써 당신은 내 안에 살아 있는 겁니다.


숨을 쉬고 있다고요.


그 조각들이 싸늘하던 기억에 덧씌워져 점차 변모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고 갈망했던, 비로소 바래왔던 그림으로요.


더는.


더는 착각할 필요도, 추악한 망상을 할 필요도 없어요.


나는 오로지 당신만 있으면 되니까요.


다른 것은 무가치해요.







이쯤에서 묻고 싶습니다.


당신. 당신은 왜 그런 선택을 했나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불태우고 나면,
분노와 의문으로 점철된 잔재가 머릿속을 유영합니다.


쉬이 휘발되는 것도 아니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에 필적하는 고통을 직접 느끼거나.


그때의 상황을 재연하여 마주하는 것뿐입니다.


음, 당신의 모든 행동에 사사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정말 마지막까지도 저를 괴롭히는 유일한 사람이군요.


그대의 모든 결정에 제가 무력하게 따를 거란 걸 알면서.
내가 못 당해낼 걸 알면서. 당신은 그리도 무참했어요.


당신을 증오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답사를 바라진 않습니다. 아니. 못한다고 하는게 맞겠죠.






당신을 나의 초라한 눈에 담을 때면,


항상 심장이 뻐근하게 조여왔어요.


금방이라도 멎을 듯 말예요.


볼품없는 몸뚱아리는 고장이라도 난 듯 삐걱댔고,


열이 오른 볼은,
그대가 쉽게 알아챌 정도로 강한 홍조를 띄워냈어요.


원망스럽고 쓰레기같은 몸뚱이.
제 명이 하루라도 빨리 닳길 바랬어요.
그대를 영원히 간직할 수만 있다면 진즉 목숨을 끊었을 텐데.


그게 미련이었다는 것을 깨닫기엔,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어요.


삶의 끝의 다다른 누군가를 지켜보는 것도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었으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욕심을 내어 그대를 탐해보아도 좋았을텐데.


짓씹고 나면 끈적한 과육이라도 흐를 것만 같은 당신의 입술.


당장이라도 뜯어내어 맛보고 싶은 당신의 하얀 속살.


온갖 구멍에서 흘러나올 당신의 달콤한 체액.


준득하게 무르녹은 당신의 장기 하나하나까지도.


어느 하나 나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 없었겠지요.






비단, 당신을 사랑했던 이유가 저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불의를 가만두지 않는 지겹기 짝이 없는 성정.


쓸데없이 누구한테나 사려깊은 그대의 심성.


그놈의 선을 향해 나아가는 그대의 굳센 의지까지.


나열해보자면 파에르 숲의 나무를 모두 베어내도 모자를 거에요.





내가 이런 불량한 생각을 쏟아내고 있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죠.


나는 숨겼고, 도려내고, 지워냈어요.


그대의 말살적인 말과 행동들도 단단히 한몫했죠.





내가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했는지.


당신이 휘갈겨 찢어놓은 나는 어땠는지.


억지로 끌어올린 미소 아래로
드리운 수심을 알아채기나 했을런지.


그대를 생각하며 몇날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웠는지.


폭렬적인 고뇌와 반추로 타오르던 나의 새벽을.


그대를 갈망하던 굶주린 눈과 입,
그대를 향해 열려 있던 코와 귀.


어떻게든 충동을 해결하려 날뛰는 내 비루한 몸뚱아리.


당신의 그늘들 뒤로 숨어야만 했던 볼품없는 나를.


그대는 언젠가 잊어버리게 될까요. 아니. 기억하기나 할까요?







이젠, 이 모든 것들이 전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요.


더는 이루어질 수도, 바랄 수도 없죠.   




아, 아쉽기도 해라.




애써 일궈낸 모래성이 손을 쓸 새도 없이 바스라져 버렸어요.


당신을 다시 만나면, 전하고 싶은 말들이 있어요.


많지는 않아요. 개중엔 내가 놓아버린 것들도 다수 있겠지만.


뭐, 어찌됐든 결과만 좋으면 되니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K?


언젠가, 그런 행운이 내게도 찾아오길.





                                                  경애하는 K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