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안 봤으면 먼저 보고 오셈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최소 두 달 간격으로 들어오던 신입이 몇 주도 되지 않아 들어왔을 때?

그 막내 사원이 채팅방 링크를 그 여자에게 전달해줬을 때?

아니면 그 여자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기관장실로 달려갔을 때?


어느 때였더라도 나는 막을 수 있었다. 막아야만 했다. 설령 나 자신이 대신 죽게 되더라도.


...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난 살고 싶었으니까.

침묵은 최고의 대처이며 유일무이한 해결방안이니까.


그래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산처럼 쌓인 사람들의 시체 위를 꾹꾹 밟아가면서라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그들은 사무실 안을 마음껏 휘젓더니 결국은 하나둘씩 잡혀가고 말았다. 하얀 대리석 바닥이 서서히 붉은 액체로 물들었다.


주위에서 한참이나 웃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마침내 경리의 머리채를 잡고는 내 앞까지 억지로 끌고 왔다.

난 여전히, 아직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자마자 이리 공을 세울 수 있게 되다니. 어떻게,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 할까요!"


내 발밑으로 경리가 힘없이 밀려 쓰러졌다.


"아악!!"


"..."

"어라. 그러고 보니 팀장님은 왜 안 웃으세요?"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경리는 괜찮다는 듯 바보처럼 실실 웃어보였다.


"...헤헤."


그래서 나도 따라 웃었다.


"하하."


"흐하하하하하하하하."


그 여자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그만 가시죠, 선배님. 인간을 찾아냈으니 해고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짐작하는 바가 있다는 듯 그 여자는 굳이 내게 경리를 건물 밖으로 끌고 나가도록 시켰다.


나는 경리의 손을 처음으로 맞잡았다.

경리는 나를 지지대 삼아 바닥에서 겨우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모습이 자꾸 마음 한구석을 쿡쿡 찔러댔다. 아프게도.


잡은 손에 방울방울 맺힌, 축축한 땀의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불쾌하고도 싫었다.

결코 이런 식으로 잡고 싶었던 손이 아니었다.


경리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발을 떼었다.

그 여자는 감시라도 하는 건지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라왔다.


.

머리가 일순간 멍해졌다.


"..."

"그 사람 성격에 지금쯤 엄청 자책하고 있을 텐데."


"..."

"있죠, 그래도 난 여기 입사한 거 후회 안해요."


경리가 절뚝거리며 걷는다. 그녀의 구두 한 쪽 굽이 어느새 부러져 있었다.


"..."

"아무리 거지같은 직장생활이었더래도 그 사람 덕분에 행복했거든."


잠깐 멈춰 서서는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아 구두를 벗겼다. 퉁퉁 부은 발목이 눈에 띄었다.


"..."

"이것 봐! 비록 감정 표현도 못하고 말 한 마디 내뱉는 것조차 차갑고 날카로운 바보 둔탱이지만,"


그는 그러든 말든 묵묵히 자신이 신고 있던 남성용 구두를 그녀에게 신겨줄 뿐이었다.


"..."

"그치만, 내겐 이토록 상냥한걸~"


그 여자가 갑작스레 경리를 노려보았다. 빨리 가라며 나를 계속 재촉했다. 도대체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헤헤. 응. 사실 나도 좋아했어요."


다시 복도를 걷는다. 주변은 참 사무치도록 조용했다.


"..."

"하. 고백을 여자 쪽에서 하게 두다니! 진짜 바보 멍청이 해삼 말미잘!"


"..."

"이제 됐어요. 뭐 어때. 시간이 없잖아요."


"..."

"나 이제 다른 회사로 이직할 거거든요?"


"..."

"그래서 다음 주 금요일에 연차 맞춰서 놀러가자는 약속, 못 지킬 거 같아요."


분홍빛 구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그러니까 저번처럼 혼자 약속 장소에 나와서 하릴없이 기다리지 말라고요. 이럴 때 보면 사람이 참 바보같애."


복지관 정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사무치도록 눈부신 아침 햇살이 세 사람을 맞이한다.


"..."

"...근데 있잖아요. 나 이제 조금 무, 무서운데."


경리의 발걸음이 잠깐 멈추었다.


"..."

"알았어요! 떼 안 쓸게요. 안 쓴다고요.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

"제발요. 어렵지 않을 거에요. 이게 진짜로 마지막이에요."


"..."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


"..."

"좀 이기적인 부탁이죠. 그쵸. 그래도..."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경리의 손이 멋대로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입이 마음대로 열리지 않는 탓에 무고한 아랫입술만 까득까득 씹었다.


"..."

"그거면 됐어요.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이네요. 고마워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화물차량의 뒷문이 활짝 열렸다.


경리는 천천히 화물칸에 탑승했다.

너머로 다른 사람들의 실루엣이 힐끗힐끗 보였다.


"..."

"아아~ 참치회 한번 더 얻어먹어야 하는데!"

"으... 으윽... 안돼.....!!!!!!! 제발!!!"

"...혀 밑을 보십쇼."

"그럼 안녕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팀장님."


이윽고 화물칸의 뒷문이 빠르게 닫혔다.

야속하게도. 아직 한 마디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는데.

침묵을 선택했으면 끝까지 침묵을 지키셔야죠, 선배님.


차량이 도로를 따라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왜일까.


그 여자가 소매로 눈가를 닦아주었다.

매몰차게 손을 뿌리치고는 다시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여자는 뭐라 투덜대더니 내 뒤를 쪼르르 따라왔다.


다시 업무를 봐야지. 쌓여있는 서류가 아직도 산더미다.

오늘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











***




오늘은 손꼽아 기다리던 휴가날이다. 휴일이다.

뭘 입고 가지? 괜찮은 옷이 있었던가?

역시 흰색 셔츠에 가디건 하나 걸치는 게 제일 깔끔하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향수도 좀 뿌리자.

어쨌든 깔끔해 보이는 게 좋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말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말이다.



2시 50분. 약속 장소에 나왔다. 오늘은 영화를 보자고 해볼까.

2시 50분. 약속 장소에 나왔다. 오늘은 뮤지컬을 보기로 했다.


영화 보고 뭘 해야 할까. 근처 공원이라도 한 바퀴 돌까.

뮤지컬 보고 뭘 해야 할까. 근처 대학로라도 걸어 볼까.


저녁은 뭘 먹이지? 애가 아직도 비쩍 말랐던데.

저녁은 뭘 먹이지? 애가 비쩍 말랐던데.


그래. 고기라도 왕창 먹여야겠다.

그래. 뭐 좋아하는지 물어봐야겠다.


발목이 어찌나 가늘던지. 곧 부러질 것처럼.

아무리 말랐어도 자기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뭐, 어쨌든 경리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뭐, 어쨌든 경리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

...


...

...


좀 늦네.

좀 늦네.


...

...


...

...


...

...


갑작스럽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나기였다.

갑작스럽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나기였다.




...

...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기껏 신경쓴 옷이 쫄딱 젖어버렸다.

기껏 신경쓴 옷이 쫄딱 젖어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

저 멀리서 경리가 우산을 쓰고 달려왔다.


...

"헉, 팀장님!"


...

"제가 카톡 남겼잖아요! 오늘 못 나올 것 같다고!"


...

"어쩐지 읽음 표시가 안 떠서 찜찜하더라니... 왜 여태까지 가만히 서 있었어요!"


왜 안 오지?

"하하."


...

"어머, 바보같이 웃긴 왜 웃어요?!"


왜 안 오지?

"어쨌든 이렇게 왔잖아. 그걸로도 좋아서."


...

"...지금 나더러 미안하라고 하는 소리죠. 그쵸?"


왜 안 오지?

"진심인데? 그렇게 미안하면 나중에 밥 사."


...

"뻔뻔해라. 애초에 핸드폰 확인 안 한 팀장님 잘못은 생각 안 하시나요?"


왜 안 오지?

"핸드폰 놓고 왔는데 어떻게 확인을 해."


...

"어휴... 됐어요. 말을 말자. 이 바보 멍청이 같으니라고!"


왜 안 오지?

"경리 너, 요새 좀 친해졌다고 말 함부로 한다?"


...

"우씨, 바보 멍청이를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요!"


...

"지도 맨날 내 이름 안 부르고 경리야~ 하면서."


...

경리의 입술이 오리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고개만 휙 돌렸다.


왜 안 오지?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 가자. 나 춥거든."


...

"맞다!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빨리 팀장님 집으로 가게 앞장서십쇼."


왜 안 오지?

"내 집에... 같이 가겠다고?!??! 너는 너대로 돌아가야지."


...

"그럼 우산도 하나밖에 없는데, 가는 길에 또 비 맞으시려고요? 절대 안 돼! 괜찮으니까 빨리 가요. 빨리!"


...

경리는 다짜고짜 내 등을 팍팍 밀었다.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며 잰 걸음을 옮겼다.


...

낑낑대며 작은 우산 안에 내 몸을 어떻게든 넣어보겠다는 모습이 참 우스웠다.


...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축축이 젖은 경리의 어깨가 왠지 좋았다.


...

둘은 그렇게 멀어져갔다.


...


...


...


...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


...






사실은 알고 있다.


경리는 이미 죽었다는 걸.


이곳에 더 이상 오지 못한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하지만 기다리고 싶다.


저번에도 왔었는걸. 기다리면


언젠가 올 것 같은데


저기 멀리서 오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안 오지?







...













***


다 읽었으면 본문 전체 드래그해서 다시 한번 읽어보셈

이미 수상함을 느끼고 진실을 마주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녀가 곧 당신을 찾아갈 것입니다


사실 이 글을 올릴까 말까 되게 많이 고민했음.

그도 그럴게 설정이 좀 구닥다리에 흔해빠진 클리셰 범벅이니까.

그래도 나는 이런게 좋다 이말이야!!!!!!

혹시 이런 설정이 거북하거나 느끼하게 생각되면 없는 설정이라고 생각해도 좋음

어차피 다음에 올라올 복지관 행동강령(개정판) 이해하는 데는 문제없을거임 ㅂ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