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략) ... 그 말에 안단이 분노하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가난하지만 아직 인륜을 저버릴 수는 없나이다. 노옹께서 나를 마음에 두어 화를 면케 하는 것은 만 번 죽어 못 갚을 은혜이나, 노옹의 말을 그대로 따른다면 낮에는 사람이 두려워 살아갈 수 없을 것이요, 밤에는 달빛이 무서워 두 다리 뻗고 잠에 들 수 없을 것 같아 두렵나이다. 노옹은 마음을 푸시고 나를 용서하소서."


하는데, 손발은 덜덜 떨리고 목소리는 바람에 날릴 듯이 힘이 없어 보는 사람이 절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노옹은 끝내 탄식하며 안단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걱정이 그리도 많은가. 내 하는 말 들어보고 옳은 결정을 하여 그대 앞날을 평안케 하소. 나는 그대가 오늘 이 길을 밟을 것을 열 해도 전에 알고 있었는지라. 때는 임술년 모 날 모 시요, 건넛마을 저자에 갔다가 얼굴은 반지르르하고 수염은 허옇게 기른 스님을 보았소. 비상한 기운에 넋이 나가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는데, 눈을 뜨니 해가 지고 있더구려. 자취도 없이 사라진 자리에는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 있었는데, 그 제목이 『기용』이니 참으로 신묘한 글자라. 첫째 장은 산 사람도 죽이는 글이요, 둘째 장은 명나라의 산도 한낱 모래알로 만드는 글이요, 셋째 장은 하늘과 땅을 뒤엎는 글이요, 넷째 장은 쇠로 만든 나무도 시들게 하는 글이라. 나는 이를 능히 활용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폐하께 인정을 받았거늘, 그대는 어째서 굴러온 복을 걷어차는가? 서둘러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위업을 행하라."


하였다. 어느새 안단이 오르던 언덕은 저문 해에 물들어 붉게 변해 있었다. 십 리 떨어진 봉우리에서 순간 번쩍이는 빛이 나더니 곧장 사라져 버렸다. 안단이 놀라 남쪽을 바라보니 강물에는 민들레가 어리었고 북쪽을 바라보니 도화(桃花)에 사과가 열려 놀라움이 가히 측량없었다. 안단은 너무도 두려워 노옹에게 몸을 떨며 말했다.


"설령 노옹의 말이 맞다 쳐도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나이다. 남은 재산이라곤 이 헤진 옷과 구멍 숭숭난 엿판 뿐이니, 내 무슨 재주로 위업을 행하리오? 노옹은 마음을 푸시고 나를 용서하소서."


노옹은 그 말을 듣고 허리를 굽혀 돌을 하나 주웠는데, 곧 주위로 구름이 피어나더니 돌밭이 그윽한 향취를 풍기는 평원이 되었다. 군데군데에는 붉고 푸른 꽃들이 피어나 안단에게 속살거렸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기이하였다. 노인은 신을 홀랑 벗고 풀을 한 움큼 뜯어내 안단을 달래며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도다. 내 듣기로 안(安)씨 성은 수백 년을 평안하게 살아 배가 주릴 때는 입에 단 과일을, 목이 마를 때는 천상선관 선녀들이 매일 한 방울씩 모은 이슬을 마시며 겨울에도 더운 방에서 살 팔자라 안씨요, 단(丹)은 일편단심의 단이라 그 지혜로 하여금 사람에게 사랑받아 천하를 밑에 둘 이름이라. 내 천명(天命)을 깨달아 그대에게 득이 될 말만 하거늘, 백 번 죽어 돌아오지 않을 복이라. 그대는 내 말을 듣고 덕을 실천하여 지엄한 뜻을 따르라."


안단은 그젯날 꿈에서 보았던 선동의 당부를 떠올리곤 옷섶을 조금 뜯어내어 노옹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노옹은 이걸 받고 나를 용서하소서."


하였다. 노옹이 입을 눈꼬리까지 끌어올리고는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게 무엇인지 말하고 평안을 찾으라."

"하늘의 거룩한 증표이나이다."


하니, 노옹이 뒤를 돌고 말하기를,


"그대는 날짜를 잡아 앞 마을의 민물고기 두 마리를 잡아 말리고, 가장 어두운 그믐달을 모아 새끼를 엮으라. 그리하면 만사가 자연 흘러갈 것이니 무슨 우환이 있으리오."


하고선 손에 쥔 잡초를 안단에게 뿌렸다. 안단이 눈을 감고 뜨자, 노옹은 순식간에 양안(兩眼)을 안단과 아주 가까이 하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대의 어리석음을 용서할 수 없소. 선동의 간언을 듣고도 그 증표를 건넨 것은 그대의 가장 큰 패착이라. 내가 폐하의 은덕으로 세상에 난 지 오늘로 정확히 육십 해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오. 하늘이 도왔으니 그대의 남은 목숨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안단은 노옹의 두 검은자를 정면에서 바라보며 뼈를 뒤흔드는 공포감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가 일어났을 때, 이미 해는 중천이었고 노옹은 온데간데 없었다. 안단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저고리가 뜯겨 나가, 더 이상 선동과의 약속을 지킬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단이 힘없이 말하기를,


"내가 너무 경솔하였다. 거룩한 약속을 깼으니 곧 나를 찾아오리라."


하며 하릴없이 언덕을 내려갔다.





ㅡ 작자 미상, 『안단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