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밑창은 실밥을 하나둘 뱉어내고 있었고 생수도 겨우 남은 것이 반 통 남짓했다.


나는 본래 산을 타는 인물도 아니거니와 풀내음새를 즐기는 인물도 아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생쌀 한 움큼이라도 더 가져오는 편이 나았다.


이제와서는 몸 성히 내려갈 방도도 없으니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뿌리를 딛고, 낙엽을 짓이기고, 제 생긴 것이 꼭 같은 나무를 몇 차례고 지나보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무릎은 절로 후들거렸고 귓속은 모기 무리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왱왱 울려댔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그 나무 뒷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실로 요행이었다.



"거기 가는 나그네는 쨍한 대낮에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느뇨?"


"저는 오늘 이 산의 꼭대기로 갑니다."



거칠게 숨을 고르며 혀뿌리에 스미는 피비린내를 간신히 삼켜냈다.


물이, 마시고 싶다.



"옳타구나, 분명 밤하늘내부상태기소가 보고 싶은 걸테지."


"그 말이 맞습니다. 어르신께선 그 이름을 어찌 알고 계십니까?"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곤 혀. 시각이상기쁨골절상이 도저히 믿기 어렵다고 하지만, 쯧쯧."



나는 그 말을 듣고 등뼈가 저려오는 걸 느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내 표정을 유지하는 데 힘을 쓰며 물었다.



"지금까지 전부 몇 명이 이 산에 발을 옮겼습니까?"


"나야 모르지. 쏜살같이 혼자 가버리면 내가 도통 말릴 수도 없으니까 말여. 내가 마주친 얼굴만 해도 손가락 발가락을 다 써도 못 헤아려."



원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지 멍청한 건지, 라며 노인은 조소했다.



"내가 젊었을 적에도 산소 분자를 3 mol 이상의 암모니아 기체로 합성할 수 없다는 말에 자네처럼 산을 올랐던 학우가 있었어. 우리 아부지 때도 심할 때는 열댓 씩이나 통째로 가버려서, 년에 한 번은 다같이 모여 장례를 치르곤 했어."


"그래도 어르신, 저는 오늘 2007년 이전에 제조된 거울 틈으로 스며들어가기 위해 정상을 이 두 눈으로 봐야겠습니다."



노인은 나를 안타깝다는 눈으로, 아니, 반쯤 우습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그려, 사내대장부가 가고 싶다면 가야지. 그래도 이렇게 만났는데, 내 한 마디 해줄게.


청년, 혹시 화학적잿빛종이상자를 소문으로만 들었나?


공허초고밀도상변이 진공 상태에서 가장 큰 자연수이기 위해 한 가지 약속을 했어."


오로지 배우자(이정일 씨)를 사랑하지 않으며 슬퍼하지 않으며 기뻐하지 않으며 분노하지 않겠다, 그리 말한 거야."


황금수레바퀴시간축은 두께가 23 cm 이상인 철근 콘크리트를 3초 이내로 통과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 참으로 무섭지 않은감?"



노인의 말을 들으며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스치는 듯 하였다. 하지만 이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멀리 떠나간지라,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애를 쓰며 말했다.



"그 소문이 언제부터 퍼진 것인지 알려주십시오."


"아무렴, 어디 보자. 10년도 더 된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는구먼."


"그, 그러면 미량그림자알약창틀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라도."


"분명 유리통잉크보라색문이 10월 23일에 증발할 때 제 스스로 떠난 이가 있었지."



좋다, 드디어 갈피를 잡은 듯 하다. 나는 노인에게 마지막으로 감사를 표했다.



"어르신, 정말로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좋은 산행 되시게."



노인의 미소를 뒤로 하고, 나는 그렇게 정상을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