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인 법국의 최심부. 슬레인 법국 최고집행기관 면면이 복제된 편지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 내용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내용뿐이었으나 편지를 읽은 누구 하나 내용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한 것이 점성천리에 의해 제국 근방에서 일어났던 일을 직접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밍 나쁘게도 아인즈는 그 점성천리가 감시마법을 해제한 직후에 탐지 방어계 마법을 사용했기에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점성천리의 말 대로군요. "


불의 신관장 베레니스가 말했다. 편지를 천천히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고개를 저었다.


" 누가봐도 자작극이 뻔하지 않나. "


바람의 신관장 도미니크가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것을 물의 신관장 지네딘과 빛의 신관장 이본이 고개를 끄덕여 함께 수긍했다.


" 언데드가 언데드를 물리치다니 그것도 혼자서 데스 나이트를 비롯한 수천 이상을 말입니까. "


" 제국 황제의 편지에 의하면 그 아인즈 울 고운 이라는 언데드는 데스 나이트를 만들고 사역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


" 그것이 거짓이 아님은 점성천리가 보아낸 전투를 보면 알 수 있겠지. "


마법 단 하나의 일격에 데스 나이트를 제외한 모든 언데드를 일격사 시킨 마법을 보며 그들은 이것이 10 위계 이상의 마법이 아닌가, 그것은 신의 재림이 아닌가, 이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 그 문제가 당장 법국에도 미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아인즈 울 고운이 바라는 것은 에 란텔 이라고 들었습니다만. "


어둠의 신관장 막시밀리언이 말했다.


" 에 란텔을 순순히 넘겨주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만 따로 빼내오는 방법은 불가능 하렵니까. "


" 왕국은 매직 캐스터를 등한시한다고 들었습니다. 그자가 얼마나 강한지 그들은 모를 것입니다. "


" 그렇다면 정보를 몰래 전달해 주는 것은 불가능 한가? "


" 정보가 왕국 쪽에 새어나가면 전쟁을 멈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럼, 사람들을 빼낼 시간도 부족할 겁니다. 더불어 전쟁을 갑자기 멈추고 항복한다면 그 누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유를 찾을테고 그 이유로 정보가 새어 나간 장소를 찾는다면 제국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국의 황제는 추궁받을 테고. 결국 법국으로 손길이 미치는 것은 시간문제. 거기에다가 언데드가 지배자인 나라를 세워 준다는 것조차 말이 안 되는 문제입니다. "


" 불의 신관장의 말에 동의하오. 언데드의 말에 따를 필요는 없지. "


" 그렇다면, 황제의 의견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 제국은 도움을 받은 쪽이니 섣불리 나설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저 핑계로 법국을 끌어들이려는 속셈으로 보이는군. "


" 그렇지만 언데드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


잠깐의 침묵, 그러나 모두는 마음속으로 이미 같은 결정을 내려 고개를 끄덕였다.


" 황제에게는 3일 후에 간다고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



***



황제가 법국에 편지를 보내고 나서 3일, 트레이시가 투기장을 그만둔 지 하루가 되는 날이었다. 법국에서 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황제는 잠시 황궁을 비웠다. 바지우드와 님블을 함께 대동해 일부의 측근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가는 길을 알리지 않았다.


" 하암~ "


그리고 황궁에는 빈둥거리는 두 명의 소녀가 남아 있었다. 매일 같이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해오다가 갑자기 쉬려고 하니 어떻게 쉬어야 할지, 또 방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심심해? "


" 응. 아르셰는 시간이 남을 때 뭐하고 보냈어? "


아르셰는 고개를 올려 기억을 더듬었다.


" 글쎄... 나는 그다지 시간이 남지 않았거든. 워커로 일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대부분 저녁에서 밤이고. 저녁에는 동생들과 놀아주느라 바빴고, 밤이되면 피곤해서 누워서 잤거든. "


" 으음... 집인가... "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자신이었지만, 문득 떠올려보니 나자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어딜 가더라도 그곳보다 좋은 장소는 없었다. 나자릭의 일원들보다 좋은 이들은 없었다. 아르셰처럼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이들은 있지만 그건 애착이 가는 자신의 소유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당장도 아인즈가 아르셰를 죽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죽일 의향이 있다. 새로운 장난감을 찾으면 된다는 생각뿐이다. 이런 생각을 자신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셰 또한 자신은 트레이시의 소유물일 뿐이며 언제든지 버림패로 사용될 각오는 되어있었다.


" 집에... 가고 싶어졌을지도 모르겠네... "


프레이야라는 칠드런의 등장으로 움직임도 막힌 채, 나자릭이 구해주길 기다리는 신세 같아서 트레이시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 저기, 할 거 없으면... 또... 할까? "


그런 트레이시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르셰가 말했다. 부끄러운 표정으로 쭈뼛거리며 아르셰가 두 팔을 배배 꼬았다.


" 그럴... "


자신에게 먼저 선뜻 부탁한 아르셰가 기특해 트레이시가 웃으며 답하려던 순간에 방문을 크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 열어라! 열지 않으면 억지로 열겠다! "


제국의 기사들이었다. 흘리던 침을 팔로 스윽 닦아내고, 트레이시가 문을 열었다.


" 무슨일인데. "


" 너희들은 퇴출이다. 나가라. 폐하의 명령이시다. "


" 뭐? "


진심으로 당황해 트레이시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내부에서 스파이 노릇을 하라고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와서 퇴출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데미우르고스와 아인즈의 명령은 제국 내에서 조용히 지내라는 것이었음에도 첫번째 위기가 벌써 찾아온 것이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 이유는 말할 것 없다. 폐하의 명령이시니까. 두 시간 내로 짐을 싸서 나가라. "


그 말만을 남기고 기사들은 떠나갔다. 갑작스럽게 뒤바뀐 대우에 아르셰 또한 벙찐얼굴로 트레이시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 ... 어떻게 하지? "



***



정신을 차렸을 땐, 적당히 짐을 챙겨 일반인이 들기엔 꽤 무거운 상자와 함께 제국의 거리 한가운데로 내팽개쳐진 채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이곳에서의 명령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가지고 있던 돈은 투기장 입장료를 제외하면 아인즈에게 반환시킨지 오래며 해는 중천이라 당장이라도 지낼 장소를 찾아내야만 했다.


" 아르셰, 우선은 전언을... "


" 그 스크롤 이제 없는데...? "


" 뭐!? 벌써 다 썼어? "


" 받은 건 15장뿐이었고... 정기적으로 연락할 때를 제외하곤 비상용으로 받은 3개도 다 써버렸어. "


" 하아... 진짜 어떡하지... "


상자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천천히 고민해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 일부가 특이한 행동에 눈독 들여 조금씩 쳐다보며 지나가기는 했으나 그뿐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트레이시는 그런 시선에도 신경 쓰지 않고 무언가 생각이 나오지는 않을까 머리를 흔들었다.


" 나자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지... 아! 당장 워커 공고라도 찾아볼까? "


" 무리야, 우리는 죽은 사람 취급이라서... 살아 돌아와도 더 큰일일거야... "


" 그, 그럼 아르셰네 집은 어때? "


" ... 전에 전부 불타버렸어. "


섀도우 데몬을 보낸 지 30분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야기가 오고 가려면 두 시간은 걸릴 것이다.


' 며칠 전이었다면 누군가 탐지 마법으로 봐주고 있었을텐데... 다들 임무를 위해 바쁜 상태니까... 우선은 프레이야라는 녀석한테 들키지 않는게 중요한가. '


" 우선은 이동하자,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라면 분명 숨기도 편할 거고 그 녀석이 찾아와도 금방 볼 수 있을 거야. "


" 응. "



***



트레이시의 생각과는 다르게 원격투시경을 띄워둔 채로 아인즈는 트레이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칠드런이 나타나 트레이시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은 플레이어의 가능성을 나타내기에 그것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 이런 때일수록 언데드인 육체가 좋단 말이지. 쉬지않고 볼 수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


" 황제는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


' 황제는 아직 나를 신용하지 못하고 있을텐데... 그러니까 더더욱 트레이시라는 존재를 나와 자신 사이의 이중 스파이로 사용할 생각이 아니었던건가? '


별일도 없던 며칠 사이에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자신이 내린 방침으로 효과가 나오려면 최소한 며칠은 걸릴 것이다. 그러니 이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후속 조치 혹은 방금 벌어진 큰 사건과 이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아인즈는 추후에 데미우르고스에게 제국의 정황을 물어보기로 생각했다.


' 그렇지만, 오히려 잘 됐나. 트레이시를 미끼로 쓰면 그만이다. 트레이시에게 준 아이템에는 표식을 걸어뒀으니까, 언제든지 상위 전이로 갈 수 있고. 만약 프레이야가 나타나면 조금 간을 보고, 플레이어가 나타나면 직접 가야겠지 수호자들로는 상대하기 힘들테니까. '


" 그렇지만 며칠 동안은 트레이시가 고생을 좀 해야겠군, 뭐 인간 축에서는 서서히 강한 편이니까 잘 지낼 수 있겠지. 데미우르고스와 이야기할 때 정말로 위험한 경우엔 도와주라고 이야기 해둬야겠어. "


아인즈는 수십 가지의 스크롤을 꺼내 언제든지 플레이어가 나타날 경우를 대비했다. 보통의 경우에는 결코 쓰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플레이어와의 PVP가 일어날 경우라면 다르다.


' 수호자들한테는 절대로 직접 나서지 말라고 했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스스로 해결하기엔 힘들겠지. 레이드 보스로 제작된 캐릭터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플레이어라면 일대일 정도는 이길 거야. '


" 하아... 수호자들 한테서 특별한 연락은 없는 걸 보면 계획 진행에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


' 뭐, 조금 더 기다려 볼까. 이제 시작이니까. '



***



슬레인 법국에서 서쪽, 로블 성왕국 에서부터 출발한 마차가 왕국을 경유하고 있었다.


" 얼마나 남았지? "


물자를 호송하는 갑옷을 입은 병사가 투구의 안면 보호대를 걷어 올리며 기수에게 물었다.


" 도로를 따라 가면 앞으로 2일 정도 걸릴 겁니다. "


덜컹거리는 마차는 호위병 20명과 기수 둘, 대부분 물건은 식량과 기호품이었다. 절반 이상이 상인에게서 구매되어 이송되는 중이며 나머지 절반은 로블 성왕국에서 제국으로의 판매품이었다.


" 이봐, 슬슬 교대하는게 어때 어제는 하루종일 달렸잖아. "


기수의 바로 뒤, 마차의 첫 번째 칸에 앉은 남성이 말했다.


" 다음 마을까지는 내가 하기로 했잖아, 내기에서 진건 나라구. "


" 야이 그건 술 기운에 그냥 한 말이지 진짜로 알아듣냐. 뭐, 알았다. 적당히 하고 내려와. "


" 그래~ 음? 뭐지 저건. "


잠을 도통 자지 않아서 보이는 환각인가, 기수는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윽고 벌어진 일은 그러한 잠을 깨기에 충분했다. 무언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순식간에 앞으로 구른다.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커다란 마차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한 바퀴 구른다. 말은 그대로 고꾸라져 그대로 목숨을 잃어 그 위에 타고 있던 기수 또한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 뭐, 뭐야!? "


첫 번째 칸에 있던 인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호위 병력이 급하게 밖으로 나서자 수십의 인파가 검과 방패를 들고 마차 주위를 에워쌌다.


" 뭐냐 네놈들은! "


" 죽여라! 죽여! "


검과 검이 오가며 피가 흩날렸다. 호위 병력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적어 십분도 채 되지 않아서 승부가 결정 나고 말았다. 맨 뒤 칸에서 벌벌 떨며 살아남은 유일한 예비 기수가 천천히 기어 나왔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로 손바닥에 돌을 찔려 고통을 호소해 금방 들키고 말아 마차를 습격한 도적에게 마지막으로 살해당하고 만다.


" 이걸로 끝인가? "


복면을 둘러싼 남자가 물었다.


" 그런 것 같은데. 오스케스 님께서 지시한건 이게 다인가? "


오스케스. 여덟 손가락의 간부 중 하나로 여섯 팔이 모두 죽고 나자 전투 요원 관리직을 맡게된 여덟 손가락의 간부다. 여기 있는 100명의 도적은 모두 여덟 손가락의 지시, 그 위로 올라가 아우라의 지시로 조직된 별동대였다. 여기 있는 자들은 그런 여덟 손가락의 휘하에서도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말단 직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 좋아, 물자를 옮겨 그렇지만 표식은 남겨라. 어디 대충 새로운 용병 집단이 나타난 것 처럼 위장해야돼. "


" 그런데, 그러면 이 근처는 모든 국가가 다 모여있는데 왕국이나 성왕국에서 퇴치하러 오는거 아니야? "


" 걱정마, 절대로 그런 일은 없으실 거라고 장담하셨으니까. "


" 그, 그런가... "


그렇게 장담한 남성은 악마의 그림이 섞인 옷자락을 칼로 대충 찢어 근처에 버려두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둔 자신들의 옷을 입은 일반인의 시체 하나를 던져두고는 물자를 들고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