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게가 17년도 5월에 녹턴에 연재한 총 4편에 약 3만자 구성의 중편 작품


근데 1편짜리 단편인 이토사야는 번역이 있었던가?

내용 비슷한걸 예전에 본 것도 같았는데

시놉시스 자체가 워낙 흔한 것도 있긴하지만



첫번째 상자

 

"안 모이네"

"안 모이네"

 아무리 통장에 시선을 집중해도 적힌 0의 수는 변함이 없다.

 결혼을 결심한 지 벌써 1년. 자금은 좀처럼 목표에 도달하지 않는다. 화려한 결혼식도, 새집을 호화로운 저택으로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아이가 생겼을 때 학비 등으로 곤란한 일이 없도록 하고 싶을 뿐이다.

"왜 안 모이는 걸까"

 통장을 조명에 비추어 본다.

"너가 써버리니까 그런거잖아"

 아키(明希)의 춉이 정수리에 꽂힌다.

"그렇게 쓴 것도 아니잖아. 새 차도 계속 참았는데"

"술이나 게임같은 사소한 거에 너무 쉽게 써버리니까 그렇잖아. 그 낭비벽을 어떻게 안 되겠어?"

 아키의 지적은 지당한 것이었다. 큰 지출은 자제하고 있지만, 소액을 정기적으로 써버린다면 저축할 것도 모이지 않는다.

 프러포즈를 계기로 절약도 겸해서 시작한 동거에서 아키가 착실한 면모를 보여준 것은 솔직히 의외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평범하게 갸루였고, 조금 차분해진 전문대 시절에도 나름대로 놀았던 것 같고, 머리도 까맣게 염색해 완전히 평범한 직장인으로 보이는 지금도 여전히 속은 옛날 그대로라 어딘지 모르게 방탕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특히 가계에 대해선 꼼꼼하게 관리하는 내면을 동거하게 된 후에야 처음 알았다.

"우리 집 말야~, 아버지가 그런 걸 잘 못해서~, 어쩔 수 없이 꼼꼼해진다고~"

"믿고 있다고"

 윙크로 답하자 두 번째 춉이 꽂힌다.

"있다고, 가 아니잖아. 언제쯤에나 정식으로 결혼할 수 있는거야?"

"역시 혼인신고 먼저 해버려?"

"안 돼. 처음에 세운 계획 정도도 전부 못하면 어떡해"

"쳇. 어른인 척 하기는. 지금도 사석에서는 옛날의 그 분위기 그대로면서"

"그건 친구 사이에서나 하는 거잖아. 너와는 이제 부부로서 잘 지내야 하니까"

"그렇다고 없는 소매를 걷어올릴 수도 없고"

 서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몸. 복권이라도 당첨되지 않는 한 단번에 큰 돈을 벌 수 없다.

"역시 차곡차곡 모으는 수밖에 없지 않아?"

"성미에 맞지 않는데...... 응? 잠깐만"

"말해두겠지만, 도박은 용납못해"

"알고있어. 그게 아니라. 맞다 아키. 로보야마(ロボ山) 기억해?"

"고등학교 때? 로산(魯山) 군이었나? 엄청 큰 사람이었지. 2m 정도 되지 않았나?"

"그 정도는 아냐. 190될까 말까 정도. 아무튼, 저번에 동창회 있었잖아. 네가 일 있어서 못 왔던 거. 그때 뭐라고 했더라? 일손이 부족해서 어쩌고 저쩌고. 술 때문에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냥 사람 구하는 거잖아"

 아키는 글로스를 바르며 흥미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게 말야, 로보야마는 로산제약의 후계자라고"

"아아, 그 유명한. 그러고 보니 그랬지"

"돈 냄새가 난다"

"어차피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는 거잖아"

"나도 진짜로 뭔가 기대하는 건 아니야. 밑져야 본전. 대기업 후계자와 인맥을 가질 수 있으면 돈벌이가 될지도"

 글로스를 다 바른 아키는 "흐흥" 하고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너의 그런 긍정적인 면이 좋아" 라며 볼에 키스를 했다.

 

 

 로보야마의 별명은 단지 로산의 어감만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각진 형태는 덩치 큰 체격에 그치지 않고 윤곽에도 이르렀고, 감정을 일절 배제한 듯한 표정과 몸가짐, 그리고 고장난 라디오 같은 말투는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한 전투 로봇을 연상케 했다.

"타케시(毅) 군. 연락해줘서, 고마워. 아키 쨩은,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이네"

 우리 집 (비록 1LDK의 싼 월세지만) 에 초대받은 로보야마는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강철 같은 몸에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안녕 로보야마 군. 잘 지냈어? 연료는 제대로 넣었어?"

 몇 년 만이든 초면이든 거리감 없이 대할 수 있는 것은 천성이 밝은 아키답다. 결코 품격이 있다고 할 수 없는 말투도 다른 의도를 품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불쾌하게 하는 일이 적다. 직장에서는 꽤나 능숙하게 내숭을 떨고 있다고 한다.

"덕분에"

 로보야마도 무표정한 얼굴로 알통을 만들어 보인다.

"우와, 대단하네~. 이거 내 허리 정도 되는 거 아니야?"

 흥미로워하며 알통을 툭툭 때린다.

"그 정도는 아니다. 아키의 허리가, 굵다"

"천연 디스 진심 웃겨. 여심을 감지하는 센서도 달아두라고"

 아키는 깔깔대며 유쾌하게 웃는다. 말에 가식이 없는 이 두 사람은 의외로 상성이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바로 얘기 좀 해봐"

"아아 그래. 그렇군. 아니 뭐, 간단한 이야기야. 우리 로산제약의 어떤 시제품의 피험자를 찾고 있는데, 좀처럼 찾지 못해서 있다"

"임상 시험이란 거야? 그런 건 평범하게 구인광고로 모을 수 있잖아"

 나는 조금 실망했다. 역시나 단순한 아르바이트 모집이었던 것이다.

"조금 특수하다"

"돈이 될까?"

"이 정도, 일까"

 로보야마는 가져온 수표에 금액를 써서 우리 눈앞에 내밀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나와 아키의 목소리가 겹친다.

 무심코 0을 세어본다. 결혼자금으로 충분하고도 남는 액수다.

"이거 고용기간은?"

"시간으로 환산하면 열 시간 정도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열 시간!"

"그렇다고 해도 한 번에 한 시간씩 열 번이라는 계산이라 구속 시간은 조금 더 늘어난다. 그 외에도 오차가 발생할 수 있는 요인도 예측하고 있다"

 연간 소득 수준의 금액을 그저 실질 반나절 만에 벌어들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땡긴다고 생각하지 않고,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것은 당연하다.

"부작용이 심하다던가?"

 아키가 내 속마음을 대변했다.

"그런 건 없다. 애초에 약이 아니다"

"뭐? 그럼 뭐야?"

"내가 지금 배속된 부서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이것"

 로보야마가 주머니에서 꺼낸 그것을 보여주며 "우리 회사 기대의 신제품" 이라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한 사각형 패키지.

"......콘돔?"

"그래"

"그걸 어떻게 할 건데?"

"실제 여성으로 사용감을 조사하고 싶다"

 나와 아키는 얼굴을 마주보았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음~. 그럼 나와 타케시가 모니터링를 한다는 거야?"

"아니다. 내가, 아키 짱으로, 시험해 본다"

"뭐라고!"

"뭐라고!"

 로보야마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당연하다. 제대로 의도한 상품이 되었는지 개발한 쪽에서 테스트를 해야 한다"

"잠깐잠깐잠깐. 그런거면 네가 소프든 뭐든 가면 되잖아?"

"안된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성매매 행위는 불법. 사내 데이터로서 공식적으로 결과를 남기고 싶으니, 어디까지나 모니터링이라는 명목으로 성관계를 해야 한다. 풍속업소에서 품질 검사를 했다고 발설할 수 없다. 물론 구인 모집도 할 수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사생활은 보호된다. 아키 쨩의 이름이나 얼굴은 사외비로 처리될 테니 안심해라"

 

 

 나와 타케시는 무심코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이렇게 깊은 정적이 찾아온 것은 처음일 것이다.

 마음을 굳게 먹고 나부터 입을 열었다.

"……타케시는 어떻게 생각해?"

"어떻고 뭐고 그야...... 싫은 게 당연하지"

 타케시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난 너한테 푹 빠져있으니까" 라고 내뱉듯이 말해주었다. 섬세함도 사려도 부족한 우리들이 어떻게든 오래 이어지고 있는 건, 이런 솔직함.

"나 말야, 해도 될까?"

"뭐! 바보냐 너"

"바보야. 하지만 그런 바보라도 알잖아. 이런 쏠쏠한 이야기는 두 번 다시 없을 거라는 걸"

"으윽"

 타케시도 고민하고 있었다. 그야 고민되지.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타케시가 그만큼 고민해 주었으면 충분하다.

"넌 괜찮은거야?"

"그치만 바람을 피운다거나 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테스트이고. 게다가 상대는 로보야마라고? 로봇라고? 바이브로 자위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걸. 써본 적은 없지만 말이야"

 언제까지나 우물쭈물하고 멈춰있는 것은 성질에 맞지 않는다. 길이 뚫렸다면 달리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망설임이 없네"

 타케시는 힘없이 웃으며 "좋아. 그렇게 정했다면 나도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지" 라며 평소의 멋있고 자랑스러운 남자친구로 돌아와 주었다.

"너가 그렇게까지 한다면 책임지고 결혼해야지. 돈 때문에 제대로 혼인신고 하는 것도 미루고 있었는데, 나중에 같이 관공서에 가자"

 나는 당연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