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춘은 그녀가 기른 식물들처럼, 그곳에 서 있기만 해도 반쯤은 봄이 돌아온 느낌이 들 만큼 온화하고 눈부시다. 아무리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도 수춘을를 만나면 그녀의 아우라를 받아 저절로 마음이 누그러지고 만다.

리우 시우란 박사는 수춘의 특성이 마음에 들어, 나중에 42Lab에 연락하여 수춘의 특성이 인위적으로 설정된 것이냐고 물었고, 뜻밖에도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

"아니었어요. 수춘은 찻잎에만 주력하도록 설계된 인형이 아니라, 실제로는 식물학 전체에 대응하도록 만들어진 모델이었죠."
"찻잎에 몰두하는 건 우연의 일치였어요. 그 애를 막 깨웠을 때, 그러니까, 음, 전 그 애를 사람으로 봤어요. 그 때는 인형에 대해 잘 몰랐거든요. 수리학 전공이 아니라서 인형을 접할 일도 많지 않았고."
"그리고 제게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정말 부드럽고 정말 정숙한 느낌이었어요. 한 떨기 수춘 (薮春) 같았죠. 동백꽃이에요, 동백꽃의 일종."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애는 그냥 커다란 컴퓨터인 게 아니라, 사실 뭐든지 할 수 있었던 거예요. 마침 저도 이 아이한테 호기심이 많았죠. 그래서 차라리 찻잎 연구를 맡겨 보자 싶었죠. 문·이과적 감성이 둘 다 필요한 분야니까요."
"그래요, 맡기자마자 성과가 나왔죠. 정말 대단해요."

──리우 시우란 박사의 인터뷰 중.

대형 프로젝트가 하나 끝난 후, 리우 박사는 실험실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야유회를 나갔다. 수춘은 그 외출로 차밭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찻잎과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레 그녀는 찻잎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 길로 리우 박사에게 한동안 휴가를 신청했다.

파종, 수확, 볶기까지, 수춘은 오랜 기간 찻잎을 경작하는 농경 생활을 했다. 나중에 리우 박사는 아예 사람들을 보내 수춘이 그곳에 새로운 실험실을 차리고 차를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수춘도 박사의 기대에 부응하여, 그녀의 지시와 영향 하에 차를 중심으로 한 생태 단지가 차츰 조성되었고, 이는 덩달아 주변 지역 경제까지 발전시켜 지역 전체를 하나의 차 연구센터로 변모시켰다.

농경 생활을 체험하면서 수춘은 현지인들에게 옛날식 다과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다소 시골 느낌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 다과에도 찻잎처럼 인류의 유구한 역사가 스며들어 있었으니까.

그녀는 틈틈이 각양각색의 다과를 만들어 새로 딴 찻잎과 함께 현지인들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 독특한 선물을 맏은 사람들은 모두 수춘의 솜씨에 찬사를 보냈다.

새로운 시대의 다양한 문화 충격으로 낡아빠진 다과는 점점 퇴색되어 가고 있었지만, 수춘은 추억이 완전히 빛바랜 페이지가 되기 전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수춘은 과학연구계 인형이었지만, 차학 쪽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된 이후로 그녀의 관심은 차의 역사, 문화, 문예작품 같은 문과적인 내용에 쏠려 있었다.

그녀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이미 수많은 관련 지식과 그래픽이 저장돼 있었지만, 수춘은 인간처럼 책을 읽고, 실제로 경험하는 것을 통해 그녀가 본 아름다운 사물들을 다시 한 번 이해하고 싶어했다.

수춘은 또한 사이버 미디어 사의 엔터테인먼트 인형들의 도움을 받아, 오래되었지만 의미가 깊은 이런 것들을 현대식으로 잘 포장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차 문화를 전승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사쿠야의 도움으로 수춘은 오아시스에 차밭을 만들었다. 비록 연산량 부족과 데이터 복원의 어려움 등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아직 재배 중인 차의 종류는 적지만, 수춘은 시간이 지나면 클라우드를 차의 바다로 만들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다.

당분간 마그라세아를 떠나지 못하게 된 상황에 대해 불편함과 걱정이 있을 법도 했지만, 그래도 수춘은 서두르지 않았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수춘은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 그녀는 무의미한 초조함은 버리고 먼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수춘은 현재 교수와 인형들의 입맛에 맞춘 차 레시피 실험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