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군.'
누군가 그러던가,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라고.
고개를 틀지도 않고, 음속에 가까웠던 일격을 막아낸 여유.
거기다가...그에게 친숙한 대형 전쟁병기들, 이 곳에 떨어진 후 박살낸 고철들, 심지어는 얼마 전 상대했던 도마뱀은 '따위'로 만들 정도로.
단 한 번 주먹을 부딪혔을 뿐인데, 심장의 나노머신이 공명할 정도로 느껴지는 압도적인 출력의 에너지.
강자로써 암스트롱은 느낄 수 있었다.
눈 앞의 이 소녀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사벨?! 노아!"
'승률은...높진 않나. 하긴 저것들이 전부 당할 정도면 그럴 만도 하지.'
등에 매달려 있다 처참하게 당한 동료들을 보고 소리치는 도로시.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무투파 이외에도 전략적인 면모를 지닌 그로썬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간다.
심지어 뒤에 나불거리는 빌어먹을 오징어들을 보니, 상대는 해상전에도 능할 터.
그는 호쾌하고 전투적인 아메리칸일지언정, 승산도 제대로 모르는 싸움에 무턱대고 달려드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보아하니, 상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고 말이다.
"...흐아암, 니힐리스타가 그 몰골이 된 이유를 알겠네. 그래도 큰소리 칠 정도는 되는 거였구나, 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잠이 쏟아지는 건가, 오만하기 짝이 없군 그래."
"오만한 게 아니라 여유겠지. 너 정도 되는 인간이면...그래도 알 것 같은데."
어느덧 방벽을 이뤘던 촉수를 거두면서, 느긋하게 전용 기체에서 자세를 고치는 리버렐리오.
그녀도 비슷하게 한번 합을 겨룬 것으로 대략적이나마 눈 앞의 중년 남성을 가늠하고...인정하긴 한다.
방주나 지상이나, 깡통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 이 정도 힘을 내는 건 결코 예삿일이 아니었으니.
허나 그건 그거요 이건 이것.
잠깐의 대화를 멈추고 어느새 고개를 돌리며 본론으로 돌아가는 그녀였다.
"그래서 질문으로 되돌아가...어떻게 할 거야? 이 곳의 지휘관."
"...헬레틱...!"
"이렇게 시간 끌어봤자 둘 다 좋은 일도 아니잖아? 화룡을 넘겨주던, 물고기밥이 되던...빨리 선택해 줘."
"내 인내심은, 그렇게 길지가 않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가까스로 유지하던 평정심이 무너지며 표정이 일그러지는 요한.
무력감, 분노, 증오. 그리고...걱정.
오만가지 인간군상의 감정이 한 인간의 표정에 담겨있었으나...그녀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다고 해서, 지금의 그가 뭘 할 수 있는데?
찰나의 순간이 흐르고, 고개가 옆으로 돌려지며...위로 한 번 턱이 젖혀지며 보내지는 신호.
자연스레 그 뜻을 알아들은 인간들의 움직임에, 주변이 갑자기 분산해진다.
"현명한 선택이야."
"...쯧."
"저 쪽은 나름 해결된 거 같고, 그럼..."
이 쪽만 남았나?
여전히 촉수의 방벽에서 떨어지지 않는 암스트롱의 주먹.
그 뒤에서 겨눠지는 필그림의 총구에도, 소녀의 눈길은 꿈쩍 하나 하지 않는다.
어차피, '지금'의 그녀에게 싸울 생각도 없었고.
"여전히 넌, 싸울 생각으로 가득한 것 같네."
"꽁무니를 내뺄 거였음 주먹을 내지른건 아니네만."
"...한 가지, 충고를 해 줄까? 용감하고 무모한 인간."
약간의 시간도 남겠다, 원래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퀸의 명령이기도 하고, 어차피 눈 앞의 남자는 생사결단을 내야 할 상대.
원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졸린 눈으로, 그녀는 느릿느릿 말을 이어나간다.
"넌 분명 강해. 그 알 수 없는 힘, 니힐리스타를 혼자 격퇴시킨 시점에서 이미 충분히 증명했지."
"하지만...이거 하나는 알아둬. 퀸의 명령하에 이 지상을 지배해온 지 어인 백년."
"무수한 인간들이 지상탈환이니, 정의구현이니 나에게 덤벼들었었지."
이어질 말이 짐작이 가는 듯, 더욱더 힘이 들어가는 암스트롱의 주먹.
허나 그의 의지를 비웃는 듯,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이 방벽을 감싸면서, 미약하게, 허나 서서히 그의 힘을 앗아간다.
"나에게 덤벼드는 게 너가 처음도 아니요...하물며, 마지막은 더더욱 아닐 거야."
'개같은 년이...!'
쿵---!
다시 한 번 격돌이 채 일어나기도 전, 순식간에 그들의 앞에 던져지는 무언가.
그것은 차마 형태도 알아보기 힘든 고철의 덩어리요, 보는 이가 눈쌀이 자연스레 찌부려질 광경이었지만.
듬성듬성 보이는 붉은빛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하는 데 그리 어렵진 않았다.
"약속은 지켰다. 인질은 내려놓고 얼른 사라져라."
"...상태가 좀 안 좋네. 많이 험하게 굴렸구나."
"그 입을 꿰메버려야 조용해질 거냐...!"
안 그래도 눈 앞의 헬레틱에게 당하는 수모가 얼마인데,
평소의 냉정함이 사라질 정도로 조용히 분노하는 요한.
물론 그녀 스스로도 상당히 지략가라고 자부하는 만큼,
채찍질을 멈추며, 조용히 촉수를 뻗어 니힐리스타를 회수하고, 동시에 포박하고 있던 인질을 옮긴다.
"...쿨, 럭! 지휘관...!"
"의외군요, 헬레틱이 약속을 지킬 줄이야."
"난 거짓말을 싫어해. 이미 한 번 한 말을 어기는 것도 역겹고---"
"지금의 너희로썬, 몇 명이 오더라도 나에게 위험이 될 일은 없을 거야."
손짓 한 번에 에덴을 내리찍을 듯 움직이던 해안가의 촉수들이 물러간다.
주변이 어느 정도 깨끗해지자, 다시 한 번 그녀의 손가락이 딱 튕기고,
----고고고고고----!
순간 주변에 전개되는 나노머신의 집합체.
무수한 기체들이 부숴지고 합쳐지며, 이윽고 하늘에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는 것은...
마치 거대한 열기구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또 하나의 모습이자 본체.
고요하게 허공에 떠있는 보랏빛 기체의 해파리였다.
찰캉!
"그럼, 잘 있어 스티븐 암스트롱. 다음에 만날 때를...기대하고 있으라고."
"..."
덩어리가 되어버린 니힐리스타와 스스로를 내려온 촉수에 링크한 리버렐리오.
그 말 한마디만을 짤막하게 남기며, 마치 조용하게 찾아왔듯, 해파리는 조용히 떠나간다.
얼마 안 가 완전히 사라지는 인근 랩쳐들의 반응.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은 침묵만이 맴돌 뿐이었다.
굳게 닫혀있었던 도로시의 입이 열리기 전까지.
"당신답지 않게, 많이 참았군요 암스트롱."
"...허허허."
"???"
순간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중년의 헛웃음.
물론 주변에서 어리둥절하거나 말거나, 암스트롱의 너털웃음은 계속 이어진다.
"참는다, 라...정말 그렇게 보였나 도로시?"
"...그럼, 아닌 건가요?"
"난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들이 아주 많아. 그 중에 최악은, 아무것도 안 한 채 주변에 기대면서 큰소리만 칠 줄 아는 개돼지들이고."
"그 다음으론, 뒤에 숨은 채 제가 전지전능한 것마냥 게임을 해대는 버러지 년놈들이지!"
콰지직!
어느덧 그의 손에 들려있다, 순수한 완력에 완전히 찌그러지고 마는 헬레틱의 파편.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 말인가.
그도 인정한다. 그 불닭 도마뱀이 병신이었을 뿐, 진짜배기는 따로 있었다고.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 곳에 떨어져 깨달은 것들 중 하나였으니.
옛날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요한, 도로시 양? 작전을 좀 짜야 할 것 같군."
"!!"
'너 같은 멧돼지가?' 라는 표정이 말이 없음에도 절로 튀어나오는 주변의 경악.
이젠 반응하는 것도 지치고, 그럴 시간도 없다.
속전속결로 밀어붙이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으니까!
"저 쪽이 대가리를 굴리겠다 선포했으면...이 쪽도 걸맞게 대가리를 굴려야 비비기라도 하지 않겠나?"
"그 말은..."
"세실을 불러주게! 생각해둔 바가 몇 개 있으니 공유하고 싶군."
"그리고 인헤르트 스쿼드 전원은...이 몸의 공짜 특훈 시간이다! 참고로 거절은 거절한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이 굴욕감.
물론 복수심에 타오르는 암스트롱과는 별개로, 지옥문이 펼쳐진 필그림 전원은...
그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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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
"쿨...럭...! 여긴..."
"드디어 눈을 떴구나."
서서히 몸에 되돌아오는, 시력 청력 촉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들.
마치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깨어나는 기분을 느끼며, 니힐리스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좇같은 목소리, 드럽게 힘 빠지는 눈...리버렐리오,냐..."
"입이 산 걸 봐선 아직 팔팔한 모양이네. 따로 나노머신을 줄 필요가 없었나 봐?"
나노머신. 그 단어 하나를 시작으로, 서서히 거슬러 올라가는 그녀의 기억.
전신이 찌그러진 채, 에덴의 실험장에서 고통받던 기간들.
화룡의 형태로 변한 채 최후의 발악으로 내뿜는 화염의 파도.
그리고 그것조차 불도저마냥 뚫어버리며, 그녀의 시야를 메우는 검은빛 주먹---
까드득!
"어,딨어...!"
"..."
"날 이런 꼴로 만들어 놓은 그 빌어먹을 인간...! 암스트롱,은 어디 있냐고!"
본능적으로 느끼며 위축된다. 눈 앞의 헬레틱은 말만 동료지.
실제론 언제든지 그녀를 묻어버릴 수 있는 '괴물' 그 자체다. 괜히 현 최강의 헬레틱이라 불리는 게 아니란 거다.
허나...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
눈 앞의 상대가 그녀를 어떻게 쳐다보던, 이 엿같은 기분은 당초 풀리질 않는 것이었다.
"아직 회복도 안 끝났어. 큰소리는 다 낫고 나서 말해."
"...크,윽...! 씨바알..."
"처음엔 퀸의 명예에 먹칠을 한 대가로 찢어발겨주려 했는데...생각이 좀 바뀌었어."
그렇게 말하며 등에서 솟아나는 리버렐리오의 촉수 몇 줄기.
어느덧 아까 전의 방벽의 굵기로 거대화한 그것은, 니힐리스타가 경악할 정도로---
주먹이 선명히 새겨진 채, 도무지 회복할 기미를 보여주고 있지도 않았다.
"!!! 너, 그 상처..."
"네 휘하에 있던 감시형 소형 랩쳐의 기록을 봤지. 비록 완전히 똑같다곤 볼 수 없지만, 그 인간도 우리랑 본질은 같아."
"상당히 고출력의 나노머신을 직접, 그것도 심장에 박아넣은 거겠지."
"이런 미친...!"
단 한 번의 싸움이었다지만 그녀도 느꼈으니 충분히 안다.
평범한 양산형은 물론이고, 그녀랑 몇십 번 연속으로 싸워온 그 빌어먹을 유사 인간 필그림들도 이 정도로 무력화는 못 시켰다.
헌데...죽이지만 않았을 뿐, 거의 빈사상태로 몰아갔던 위력의 나노머신을, 그녀들도 기적적으로 버텼건만.
평범한 인간이 아무런 보조장치 없이 급소인 심장에 박아넣었다고?
정신이 나갔어도 단단히 나갔다고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라면 그 빌어먹을 놈들을 모조리 가라앉힐 수 있었을 텐데...!"
"목적을 달성하면 그 이상의 움직임은 낭비일 뿐. 널 회수한 시점에서 놈들을 마주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어."
만사가 귀찮은 그녀의 성격도 한몫하겠지만, 그녀는 현 헬레틱 안에서 사실상 유일한 지략가.
목적을 위해서 쓸데없는 싸움을 최소화하며, 목적의 달성이 그 무엇보다 최우선된다.
어차피 암스트롱의 제거는 나중에 벌어질 일.
지금은 그저, 2차 목표로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퀸의 명령도 있고, 그 인간의 제거는 언젠간 벌어질 일이야."
"그렇다면..."
스윽
아직 널브러진 니힐리스타를 흘끗 바라보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리버렐리오.
그녀의 본체 위에서 내려다보는 지상은, 가끔은 또 각별한 맛이 있었으니.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을 음미하며, 잠시 눈을 감고 그녀는 다음 목표를 선포한다.
"나노머신도 먹여줬으니, 지금은 그저 회복에만 집중해. 넌 나랑 방주로 갈 거니까."
"!!"
"인디빌리아...정예라곤 했다만, 고작 6명의 니케에게 고전하다 벼락맞고 널브러진 멍청이."
"하지만 그런 멍청이라 할지라도, 없는 것보단 도움이 되겠지."
겸사겸사 인간 측의 전력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적당한 타이밍.
허공에서 조용히 시그널을 뿌려대며, 읊조리는 리버렐리오였다.
"어디...3기의 헬레틱. 그 이상은 과연 어떻게 대처할 거야? 스티븐 암스트롱."
니힐리스타, 인디빌리아, 그리고 그녀 자신.
각각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그를 반영한 전술 몇 가지와 포메이션 여러 개.
미지는 악. 모든 것은 확실해야 하니.
스스로의 평안과 고요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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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크게 생각이 없었는데, 니힐/인디 등 헬레틱 행보가 워낙 머저리 천지라 답답해서 함 써봤음
밝혀진 건 없지만, 저 둘이 워낙 넘사벽으로 덤앤더머를 찍으니 리버렐이 자연스레 두뇌파? 책략가? 가 될 수 밖에 없더라.
이번에도 반응 좋으면 쓰던 거 마저 마무리해서 올릴께. ㄳㄳ.
요새 필력이 좀 떨어진 것 같은데 어떤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