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와 같은, 몸이 수면 아래에서 머리부터 끄집어내지는 기분과 함께 나는 되돌아왔다.


"...아, 너무 많이 빨았나."


일이 하도 안 풀려서 이번 회차에는 그냥 때려치우고 스트레스나 풀자-하면서 사치란 사치는 다 부리고 하루하루를 약과 술로 보내며 침대에서 뒹굴었는데, 아마 어제...라고 해야할지. 여하튼 회귀 직전에 약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한 탓인지 깜빡 숨이 멎어버렸나보다.


혹자는 신에게 세상을 구하라는 사명을 받고 회귀라는 반칙같은 특전을 얻은 우리가 귀중한 회차를 방탕하게 놀면서 내다버리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 개새끼한테는 이딴 회귀 너한테 줄 테니까 네가 와서 그 좆같은 마왕인지 마신인지 잡으라고 말하겠다.


씨발, 아무리 해도 안 되는데 우리보고 어쩌라고.


처음 열댓 번 정도는 우리도 그러려니 했다. 나나 엘리나나 적당히 호신용으로 검술과 마법 조금 깔짝거린 정도였으니 마왕군과 맞설 정도로 제대로 무예를 익히는 데는 오래 걸릴 것이라 예상했다. 실제로 회차가 쌓일수록 우리는 점점 강해져서, 대략 17회차 즈음에는 큰 무리 없이 사천왕 전부를 토벌하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 개 같은 마왕 새끼가 토악질 나올 정도로 더럽게 세다는 것이었다.


사천왕을 아슬아슬하게 쓰러뜨리고 휴식한 뒤 마왕에게 도전했다. 일행 전부가 5초만에 전멸했다.


힘의 격차를 실감하고, 다음 다섯 회차 정도를 지식을 축적하고 극한까지 검술, 마법, 전술, 격투술, 주술...하여튼 전투에 도움 될만한 비급이나 고서를 섭렵하고 최고급 마도구를 긁어모으는데 사용하고, 다시 도전했다. 2분 버텼다.


아예 죽을 각오로 영혼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물로 바치는 주술을 파티 전체에 걸어서 완성한 파괴마법을 날려봤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던 엘리나 왈: 옷이 조금 그을리는게 끝이었다.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아서, 회차 열 네번을 마왕에 대한 조사 하나를 위해 몰빵했다. 흔히 알려진 신화부터 아주 오래되고 잊혀진 미신까지도 달달 외울 정도로 공부했지만, 도무지 약점이란 걸 찾을 수 없었다. 이야기들이 약점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마왕에게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회차가 오십이 넘어가자, 슬슬 맛이 가기 시작한 우리는 미친 척 하고 수도의 모든 인간을 제물로 바쳐버리는 끔찍한 흑마법을 완성해 마왕성에 갈겼다. 치료한 건지, 아니면 아무런 타격을 안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보니까 딱히 다친 기색이 없었다.


다음엔 연구에 집중해 아예 남들이 상상조차 못할 수준의 마법과 극의조차 넘어선 검술을 완성했다. 이 즈음에는 나나 엘리나나 단신으로 쳐들어가도 사천왕 따위는 한꺼번에 덤빈다 한들 일격에 목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물론 그 직후에 마왕한테 박살났다. 그래도 둘이 협공하면 한 십 분 조금 넘게 버티긴 했으니 이걸 발전이라고 해야 할 지.


그래서, 우리는 이후에는 반쯤 놓아버렸다. 도전을 하긴 했지만...더 이상 억지로 노력할 의욕이 나질 않았다. 거기서 뭘 더 해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너무 막막해서, 지난 회차 한 번은 서로 진탕 놀자고 합의했다. 약혼했다가 결혼했던 우리는 이미 서로 침대에서 뒹군 적은 수없이 많았기에, 이번에는 사치, 술, 약이 함께였다. 정신이 몽롱한 동안에는 이 개 같은 사명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너 왜 이렇게 조용해? 약 기운 덜 깼어?"


나는 턱을 괴며 엘리나에게 물었다. 회귀해서 언제나 돌아오는, 엘리나와 먼 과거 처음 만났던 이 정원에서 우리는 온갖 짓을 했다.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정원을 통채로 날려버린 적도 있었고. 하여튼 회귀 직후에 이곳에서 주변 사용인들을 재운 뒤 마왕과 신에게 온갖 쌍욕을 박는 게 일상이었다.


"...네?"


"왠 존댓말? 아, 그런 컨셉으로 하고 싶어? 그런데 너나 나나 그런 거에 몰입이 되겠냐? 서로 너무 오래 봐서 질린다며."


내가 낄낄거리며 놓인 음료수를 들이키자, 엘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무슨 플레이 따위에 이렇게 몰입을 해?


"무례하군요, 공자. 아버님이 분명 당신이 예의바르고 올곧은 청년이라 하셨건만. 혼담이 오가는 자리에서 대뜸 반말이라니. 말투조차 상스럽기 그지없네요."


"재미 없으니까 관둬. 그런 헛짓거리는 그만하고...우리도 이제 할 일 해야지. 놀 만큼 놀았잖아."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아무래도 이 혼담은 없던 일로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네요. 그럼 이만."


"야, 잠깐...!"


"아악!"


불쾌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엘리나를 본 내가 당황해서 그녀의 손을 붙잡자, 엘리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내가 놀라서 손목을 놓아주자, 그녀는 붙잡혔던 손목을 문지르며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놀란 사용인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녀의 손목은, 내가 쥔 부분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가씨, 대체 무슨...!"


"당장 떠나야겠어요. 마크 경, 마차를..."


"잠깐 전부 멈춰."


나는 우리가 만들어냈던 정지 마법을 펼쳤다. 사용하면 주변의 모든 인간은 완전히 멈춰버리기에, 잠입같은 일에 우리가 애용했던 마법이었다. 당연히, 우리 둘은 이 마법을 막을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엘리나와 단 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완전히 멈춰버린 엘리나였다. 나와 같이 회귀하던 그녀라면 결코 당할 리가 없는 마법에 무력하게 당한 채.


"...설마, 진짜로? 야, 진짜야 이거?! 야 이 미친 신 새끼야 대답해!"


심장이 미칠듯이 두근거려, 나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이제 깨달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엘리나의 회귀가,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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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나는, 힘없이 넘어진 루크의 멱살을 잡고 미친듯이 흔들었다.


"기억한다고 말해. 말하라고 루크 이 개자식아!"


"엘리나, 대체 이게 뭐 하시는 짓...!"


혼란스럽다는 듯이 반응하는 그를 내팽겨치고, 그녀는 울분에 가득 찬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함쳤다.


"이게 대체 무슨 개 같은 짓이야,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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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막으려 함께 회귀하던 두 연인이 도저히 답이 없는 상황에 절망해 반쯤 포기하자 열 받은 신이 둘을 따로 회귀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이야기. 언제나 자기 곁에 있을 것 같았던 연인/배우자/동료가 어느 순간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공포와 상실감이 얼마나 클 지...난 잘 모르겠음.


그러니까 이걸 본 네가 이해해서 써 오면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