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신거리는 두통. 차가운 한기. 비릿한 바다의 냄새.

이성과 비이성 사이에서 나는 내 자리를 찾았다. 한 오두막집. 문 앞에는 SECURITY GUARD라고 적힌 팻말이 붙어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지근거리는 두통에 머리를 잡으려니 머리에 둔탁한 기분이 들었다. 칼이다. 손에 꽉 쥐어진 군용 대검. 방아쇠 같은 것이 달려있는 물건. 밀리터리에 관한 걸 주로 다루는 유튜브에서 본 족이 있었다. 스프링으로 칼날을 날리는 물건이다.


"라디노프. 괜찮나? 역시 그때 박스에 머리를 박은게 잘못된 건가?"

"소령! 정 몸 상태가 안 좋다면 비켜. 우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꾸할 틈도 없이 문이 열렸다. 케나다 국기를 단 털옷을 입은 중년 남성. 어떻게 해야할까. 분명 공무원처럼 보인다. 나보다는 키가 작다. 아니. 내가 키가 더 큰 걸까. 


반사적으로 칼을 그의 목에 들이민다. 오두막 속으로 밀고 들어간다. 

"내가 지금 머리가 아파서 그런데."

본능은. 이 피 묻은 손에 서려있는 본능은 이 남자를 찔러 죽이라고 하고 있다. 사람을 이렇게나 쉽게 죽인다는 발상을 하려면 어디까지 추락해야 하는가. 


"뭐.. 무슨 짓이오!"

"두통약은 가지고 있겠지. 그 총도 바닥에 버리고."


목덜미에 날붙이가 붙은 경비원은 마지못해 건밸트를 바닥에 내버렸다. 그리곤 슬금슬금 서랍장 쪽으로 향했다. 타이레놀이면 좋을 거다. 


경비원의 건밸트를 주워들어 살펴본가. 두꺼운 총알. "44. 매그넘."

캐나다. 중년 남자. 이 장면을 분명 어디에선가 본 것 같았다. 총. 그리고 고양이. 


건 스미스 캣츠. 그 만화. 그리고 그 만화의 3화짜리 OVA.

거기에는 악역 한명이 나온다. 이런 칼로 사람을 죽이는 스페츠나츠 출신 살인청부업자.

나타샤 라디노프. 오두막 한켠에 놓여있는 전신 거울 너머로 바로 그 여자가 서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에는 이 남자를 죽이고. 돈을 받는 장면이 기억난다.

다음 장면은 ATF 요원들을 죽이며 보호받는 증인을 죽이는 장면. 살인의 연속. 난 그래야 할까?


"여... 여기 있네..."


중년 남자는 약통을 나에게 조심스레 건넨다. 나는 약통을 열어 알약 하나를 꺼내 씹어 삼켰다. 두통이 가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터다. 


"그..."

"살고 싶나?"

"뭐...?"


나는 건밸트를 찼다. 중년 남자는 나를 바라본다. 분명 이 사람도 가정이 있는 사람일 터다. 만화 속에서는 단역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건 살아있는 사람이다.


 만약 여기서 이 사람의 머리에 총알 구멍을 낸다면 어떨까. 모든게 원작대로 돌아갈까? 그렇게 살인들을 저지르고. 최후에는 결국 총알 수 발을 얻어맞고 죽는 꼴을 맞이하게 되고. 그럼 어떻게 될까. 나는 원래대로 돌아갈까? 아니면 죽을까? 


아니. 아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나는 경비원에게 말했다. 


"가끔은. 인생에서 운이 좋을 때도 있지.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그러니 머리를 푹 숙이고 오두막에서 나오지 마."


그리고 오두막을 나섰다.


"좀 오래 걸렸군 소령. 설마 그런 중년 남자가 취향-"


44구경 매그넘이 불을 뿜었다. 계단 밑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검은 코트의 남자가 고꾸라진다. 밝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뒤늦게 품 속에서 권총을 꺼내려 하지만. 이 살인에 익숙한 여자의 몸놀림이 더 빨랐다. 두번째 총성에 두번째 남자가 고꾸라졌다.


"무슨 일이야!"

"저 년이 배신했다!"


총성은 계속해서 울린다. 나도 내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짐승의 본능처럼 살인을 하는 방법이 이 육체에 배어 있었다. 뜨겁게 달궈진 탄피들을 땅바닥에 뱉어내고. 다시 탄환을 밀어놓고 방아쇠를 당기며. 칼로 살과 혈관을 갈라댄다.


ATF라고 적힌 코트를 입은 이들도 뛰어나와 총을 갈겨대기 시작했다. 몇발 몸 정중앙에 총알이 박히는 기분이 들어 몸을 숙였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다. 지금 내가 걸치고 있는 이 코트. 전신 방탄복이었지. 다시 일어난 나를 보며 당황한 요원들에게 방아쇠를 차례대로 당겼다. 고꾸라지는 것은 똑같았지만. 방탄복을 입어서 목숨은 건진 것 같다.


그들이 마지막이다. 아마도. 터벅터벅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공포에 질린 상태로 더듬더듬 뒤로 기어가려고 하지만 44구경의 충격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어 보였다. 갈비뼈 먗개는 분명 부러졌으리라.


"가. 갑자기 왜 이러는 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불만이 있다면 보스에게-! 사! 살려줘!"

"자비를!"


그들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작 중에선 ATF도 이 거래와 연관이 있었다. 이렇게 등장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유명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너무 흥분해서 몇발을 쐈는지 잊어버렸던 장면을. 그래. 내가 지금 몇발을 쐈더라. 6발. 지금 이 총은 빈 총이다.


눈치가 빨랐던 요원이 손을 총으로 가져다 댔다.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 섬광은 없었다. 총을 그들에게 내던지고서 칼로 총을 들어올리던 요원의 가슴을 찔러버리곤 빼내 주춤주춤 일어나 나에게 달려들러던 놈의 가슴팍에 칼날을 발사했다. 컥 하는 소리. 그게 마지막이었다.


두꺼운 방탄 코트를 벗어버리곤 다시 오두막 앞으로 걸어간다. 차게 식은 남자가 가지고 있는 슈트케이스를 집어들었다.


작중에선 이걸 돈이라고 했었다. 내 눈에는 하얀 가루로 보이고.

나는 그걸 부두 너머 바다로 내던졌다. 검은색 수트케이스는 떠오를 듯 하다가 다시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자 이걸로... 어떻게 하지..."


이 사람들은 죽고. 나는 혼자다.

이 여자의 몸은 이렇게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딱히 부담을 느끼지 않는 모양일까. 아니면 내 정신도 맛이 가 버린 걸까. 모든게 뒤틀렸다. 원작도 그렇고.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모른다.


"다... 당신. 뭐하는 작자요?"

"나도 몰라. 이 일은 당신이 한 거니까... 44구경 하나로 무기 밀매 현장을 정리한 경비원이라. 영화로도 나올걸? 그리고 화장실좀 빌리지."


세면대 앞에 서서 손에 뭍은 피와 살점들을 닦아내고. 얼굴을 씻어내린다. 

이 여자. 상당한 미모인건 둘째 치고. 기이한 머리 염색에, 성깔이 사나워보이는 인상이다. 스페츠나츠 출신이라면 나름 납득이 가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이야기가 향하는 곳은 결국 시카고다. 

그렇다면 시카고로 향해야 하는게 정답이겠지. 거기엔 수상할 정도로 총을 잘 쓰는 총포상 점주와. 폭탄마 여자아이. 온 몸에 방탄판을 두르고 다니는 거한의 남자가 있다. 완벽한 관광지 선정이다.


일생에서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곳을 이렇게 남의 몸으로 가게 된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기 서 있는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살인은 즐거웠냐?"


제기랄. 나는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피바다가 되어있는 도크의 광경을 보며 멍하니 서있는 경비원을 지나. 앞으로 향했다.


시카고로 간다. 시카고로 가야만 한다. 거기서 이야기를.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