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하지 못 할 정도로 큰 부조리를 겪으면 사람이 바뀐다는 글을 X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글을 좋아한다.

-유출된 녹동의 일기장 중-

 

"세레브랴코프 하사!"

 

칙칙한 하늘을 보며 담배를 피우기를 잠시, 아침 점호를 시작하기도 전에 상사의 부름을 받으며 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예! 데그레챠프 소위님!"

"뭐냐, 마저 태우고 오지."

"소위 님이 부르시는데 어찌 늑장을 부리겠습니까?"

 

자신보다 배는 커 보이는 소녀의 배시시한 표정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던 유녀는 이내 콧바람을 내쉬며 웃었다.

 

"확실히 사람이 바뀌었어. 귀관도 그렇게 느끼나?"

 

뜨끔. 최대한 소설 속 빅토리야 이바노프나 세레브랴코프 하사처럼 행동했는데, 역시 눈치 빠른 주인공한테는 의미가 없었던 걸까?

 

유녀는 여전히 옅은 웃음을 유지하며 점점 다가왔고, 그녀의 콧등이 내 복부에 닿기 직전에 다행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데 그 후 그녀의 행동은 분명 소설 속 타냐 데그레챠프의 행동이 아니었다.

 

킁킁. 그녀는 내 군복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있었다.

 

"저... 소위 님?"

"아, 아무것도 아니다.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나서 말이지."


역시 훗날 악마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신경을 가져서일까? 나는 이때다 싶어 품에서 어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물건을 꺼냈다.

 

"혹시 여기서 나는 냄새 아닙니까?"

"이건?!!"

 

이름하야 특제 버기타...ㄴ이 아니고, 현대 한국인의 정수가 담긴 인스턴트 커피 되시겠다! 주인공 녀석, 일본인이었지만 전생에서 이 냄새를 한 번이라도 맡았다면 틀림없이 반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답이었다.

 

저거 보라고. 눈깔 뒤집어져서 주전자를 찾는 꼴을 보라고. 낄낄.
 

잠시 뒤, 나와 타냐는 소대장 막사에서 오붓하게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홀짝. 홀짝. 차분히 커피를 넘기는 저 모습을 보고 누가 꽈리를 튼 괴물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 누가 저 속에 고약한 남자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소설을 읽었고, 실수로 세레브랴코프가 그려진 삽화를 찢은 뒤 이 세계로 빨려 들어온 난 그녀(그)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바뀌어도 너무 바뀐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난 지금 인지부조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총탄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남자(전생)끼리 커피 데이트는 아무래도 좀 그렇다고. 그런데 눈앞의 유녀는 그저 달디단 커피를 들이켜면서 배실배실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녀석, 속으로는 부정했지만 사실 진작 여자가 된 게 아닐까?

 

“아! 그렇군. 귀관의 커피가 너무 좋아서 잠시 잊고 있었어. 미안하네.”

 

타냐는 헛기침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서부전선 지도가 올려진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한 손에는 커피가 담긴 컵을 들고 있는 모습은 시커먼 속내를 알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다.

 

“어젯밤, 수색대가 이곳에 공화국 마도 병사가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렇습니까?”

“…귀관 덕분이라고 볼 수 있지.”

“하하.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이곳에 배속 받고 TS된 상사를 만난 날, 난 마도 병사로 구성된 수색대를 편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도 그럴 게, 개개인이 강력한 슈-퍼 솔져를 총알 앞 고기방패로 쓰기는 아깝잖아.

 

“그때는 별 이상한 놈이 다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나보다 미친 놈은 자네였어. 세레브랴코프 하사. 왜 내 나이대에 입대하지 않았지?”

“…농담이시죠?”

“하하. 아무렴. 여튼! 저곳을 타격하는 임무에 제205강습마도중대가 포함되었다. 그리고 우리 소대는 나랑 귀관이 참가하게 되었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당연히 없어 야지. 적어도 치트키 남발한 당신 곁에 있어야 나 같은 일반인이 살 수 있을 거 아냐?

 

“좋아. 오늘 밤에 출동할 예정이지 준비할 수 있도록!”

“옙! 그럼 나가보겠… 소위 님?”

 

나는 경례를 하고 막사를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타냐가 무언가를 매우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난 저 모습이 비추는 미래를 알고 있다.

 

미친 녹은 자식. 또 이상한 짓거리를 하려는 게 틀림없다.

 

“소위 님? 저 나갑니다?”

“잠깐, 하사.”

 

난 적당히 둘러대고 나가려 했지만 결국 잡히고 말았다. 아, 제발! 난 네놈의 괴상한 작전에 휘말려 죽기 싫다고!

 

그런데… 그녀답지 않게 오래 주저한 끝에 입에서 나온 말은 묘하게 ‘그’ 답지 않았다.

 

“그… 커피 남는 거 있나?”

“아… 있습니다. 금방 가지고 오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딱 그녀다운 부끄럼 담긴 말이었다.

 

소대장 막사와 소대원 막사는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바로 관물대에 모셔 놓은 인스턴트 커피를 챙기려고 했는데, 전혀 익숙하지 않은 말을 듣고 말았다.

 

“그보다 세레브랴코프 하사 녀석, 몸매 죽이지 않냐?”

 

뭐뭐뭐무머뭣! 지금 남자가 남자 몸매를 품평하는 뒷담화를 들은 건가? 그것도 심지어 내 몸을?

 

아, 나 지금 여자였지. 이 몸에 영혼이 박힌 지 1년이 지났지만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게 있다면 분명 저들이 침 흘리며 바라보는 내 압도적인 상체겠지.

 

“하사는 엄청나지. 그보다 야, 소위는 어때?”

“미친놈인가?”

“야 이 미친 놈들아!!!!!!!!!!”

 

이건 육체를 빼앗긴 세레프랴코프의 영혼의 발버둥일까? 아니면 내가 미쳐서 TS 상사에게 이상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난 건장한 남성 두어 명을 사정없이 패고 있었다.

 

“그래서, 달려들었다? 내가 들은 게 모두 사실인가?”

“…옙.”

 

가져오겠다던 커피는 온데간데없고 사고나 친 부하를 노려보던 유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 그런 싸구려 대화에 감정이 동하면 안 되지. 그것도 군대에서.”

“죄송합니다.”

“아냐. 따지고 보면 그 놈들 잘못도 있는 걸. 중대장님도 그냥 넘어가신다고 했어.”

 

상사에게 잘못을 비는 순간에도 나는 도저히 타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을 희롱하는 말에는 가만히 있다가 상사를 희롱하는 말에 득달같이 반응 했다잖아. 어우 부끄러워. 어우 혀 깨물고 싶어.

 

그러면서 최대한 시선을 아래로 내렸는데, 타냐의 손에서 익숙하지 않았지만 익숙한 것이 보였다.

 

타냐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거… 혹시 생리대 입니까?”

“윽.”

“이때부터 생리하셨습니까?”

 

아차. 말이 헛 나왔네. 나는 의심 많은 그녀가 부끄러움에서 벗어나 알아차리기 전에 대화의 화두를 바꾸었다.

 

“혹시 처음 하시는 거라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고맙네. 세레브랴코프 하사.”

 

그렇게 작디 작은 유녀의 가랑이를 붙잡고 몇 분 뒤, 유녀의 입에서 기어 나온 말이 압권이었다.

 

“하사도 생리대 처음 만지나?”

 

젠장! 나도 뿌리는 남자였다고! 그보다 내 영혼의 본능 때문에 붉어진 뺨 어쩔 건데!

 

여차저차 생리대를 입힌 뒤 난 도망치듯 막사에서 빠져나왔다. 경례도 하지 않고 도망치는 내 뒷모습을 보던 타냐가 자신도 모르게 애정 어린 웃음을 지은 건 나도 타냐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우중충한 회색 하늘은 떨어지는 태양과 이리저리 섞이더니 마침내 검은색으로 얼룩져 버렸다.

 

“제군들, 시간이 되었다! 모두 기동!”

“제국 만세!!!!!!!!”

 

완벽한 야습은 공화국에게 일말의 반항도 허용하지 않았다. 태평하게 늘어져 자고 있던 공화국 마도 병사들은 검은 도화지를 물들이는 알록달록한 직선에 불태워졌다.

 

하늘을 뒤덮는 오색 찬란한 직선의 데칼코마니는 이윽고 가장 밝고 가장 굵고 가장 매혹적인 빛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데그레챠프 소위!”

“후방은 이제 안전합니다!”

 

가장 어둡고 가장 얇고 가장 여려 보이는 귀신의 빛은 겨우 진열을 가다듬던 공화국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정말이지, 소위의 공격은 경의를 넘어 아름답군.”

“감사합니다. 그보다 세레브랴코프 하사는?”

“그녀라면 걱정 말게나. 저기 있군.”

 

중대장이 가리킨 곳에는 지옥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에 어울리는 비명이 필요한 법.

 

“이 미친 년이!”

“끄아아아아악!!! 내 팔!!”

“계집 하나에 이 무슨 추태를! 당장 사살해!”

“보호막이 너무 두껍습니다! 어? 어어, 으아아악!

“광견... 광견이야!!”

 

보호막을 이중 삼중으로 두른 세레브랴코프는 다른 제국 마도 병사들과는 달리 땅에 발을 붙인 채 적에게 피의 형벌을 내리고 있었다.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중대장 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래. 전입 첫날에는 무슨 연방 사람을 보는 듯했는데, 이제 보니 확실히 알겠군. 세레브랴코프 하사는 전장의 사람이야.”

“전장의 사람…”

“하하. 그 점에서 소위랑 닮았군. 안 그런가?”

“저는 평화를 사랑합니다만…”

“아무렴! 이제 곧 해가 뜨니 자네 부하에게 철수한다고 전해주게.”

 

중대장은 하늘에서 싸우는 부하들을 향해, 타냐는 땅에서 싸우는 부하를 향해 위치를 옮겼다.

 

타냐는 생각했다. 저 아래에서 술식이 담긴 총탄은 커녕 언제 구했는지 무시무시한 도끼를 휘두르며 적을 도륙하는 부하가 자신과 닮았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중대장의 눈이 어딘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어이, 세레프랴코프 하사. 철수할 시간이다.”

“아, 데그레챠프 소위 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뭘 하려고?”

 

세레프랴코프는 웃으며 마지막 남은 공화국 마도 병사의 목에 도끼날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살려주면 분명 우리를 죽일 테니까요.”

 

타냐는 이상함을 느꼈다. 하사가 말하는 우리는 과연 제국일까? 아니면… 아니면… 혹시?

 

“아아. 아무리 생각해도 전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소위 님만큼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거 참… 고맙군.”

“그러니까 끝까지 함께 가자고요. 어때요?”

 

타냐는 부하의 말에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유녀는 소녀가 살기 위해 자신에게 붙들리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아 참. 아침에 커피 못 드렸는데, 돌아가셔 같이 마셔요.”

 

그리고 소녀 또한 자신이 단순한 생존 본능 때문에 유녀에게 매달리는 게 아니란 걸 몰랐다. 어쩌면 유녀 내면의 존재를 알기에, 소설의 결말을 알기에, 그리고 마침내 죽을 때까지 자신은 이제 여자라는 걸 자각했기에…

 

마침내 그(그녀)를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