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세상살이가 어려웠다.


타고나길 우둔해서였을까, 그는 살아가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이해했던 적이 손에 꼽았다.



그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 하선우였을 때도 그는 어째서 자신의 가족이 도적떼에게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집없이 떠돌아다니는 고아 소년 하선우였을 때도 그는 어째서 마을의 아이들이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협행중이던 화산의 도사에게 거두어졌을 때도, 얼마나 검을 휘두르든 그의 검에서 피어난 매화 하나 피워낼 수 없었을 때도, 자그마한 양민 마을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의 스승과 친우들과 그가 마교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도, 그 후 그가 어느 대저택의 여자아이가 되어 눈을 떴을 때도.


그는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귀족의 아름다운 옷에 진흙 한 방울을 튀겼다는 이유로, 작은 소녀에게서 피 수백, 수천 방울을 흘리게 만드는 저 행위가 옳은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




그가 이 새로운 세상에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 이후 가장 먼저 다짐했던 것은 흐르는 대로, 불의에 굽히고 속세와 야합하며 살아가자는 것이었다.


언제나 매화는 바람에 흔들리되 꿋꿋해야 한다고 말하던 그의 스승이 알았다면 경을 칠 생각이었지만, 선우는 전생처럼 단단한 가지처럼 살다 부러지고 싶지 않았다.


타고나길 우둔했던 그에게 스승이 말하던 협과 매화의 이치란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기에 더더욱 이해도 못할 가치에 인생을 바쳐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매화꽃도 피워내지 못하던 반쪽짜리 매화검수가 아니었는가. 그러니 무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매화를 잊고 지낸다 한들 그것을 질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령 이번 생에도 그의 집안이 한미했다면 그는 제 밥벌이를 위해 다시 칼을 잡고 이 세상에선 마나라 불리던 기를 이용해 매화를 흉내냈을지도 모르나, 다행히도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인 제국, 그러한 제국의 주인인 황실 아래 가장 위대한 세 공작가 중 하나.


하선우가, 아니 이제는 로젤리아 뮴 프루누스가 태어난 프루누스 공작가란 그런 곳이었다.



그러한 공작가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났기에 그녀는 전생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다.


다음 해의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닭이 울지도 않았을 때 밭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매 맞을 각오를 하고서 잔치를 벌이던 부잣집에 기웃거리지 않아도 되었고


피어나지도 않을 매화를 피우기 위해 이해하지도 못할 협과 매화의 기치를 배우며 손이 부르트도록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그녀가 그저 아름답고 고귀하게 있는 것, 그것 하나 뿐이면 그녀는 하선우였을 적 상상도 못해본 진미와 지보들을 즐길 자격이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다고 그녀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게 그녀가 태어난 후 프루누스 공작가의 아름답기로 소문난 정원과 눈이 16번 만났을 때, 그녀는 고귀한 귀족으로서의 의무 중 하나인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곳은 귀족 여인들에게는 사교계의 입문, 귀족 남아들에게는 기사의 의무를 지기 시작하는 곳.


그만큼 아카데미 주위의 거리에는 상업시설이 다양하고, 그러하니 인구가 몰리고, 인구가 몰리는 곳에는 언제나 길거리 상인이 있다.


꽃이나 잡동사니나 파는 길거리 상인들은 보통 빈민층. 그러니 귀족에게 피해는 커녕 섣불리 말을 거는 것도 용서받지 못할 죄일 수 있다.


중원에서 역시 부모없는 거지 꼬맹이가 잔칫집에 발을 들이는 것이 흠씬 두들겨 맞을만한 죄이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이는 당연한 일이리라.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다시는… 윽!”


퍽-


“이 옷이 얼마나 하는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 네 년 뿐만 아니라 네 년의 가족들 목숨값을 전부 합쳐도 이 옷의 소매 하나만 못하단 말이다!”



그의 말은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보통 광산에서 일하던 평민의 사망 보상금은 1골드 남짓. 반면 귀족들이 입는 옷들은 드는 옷감만 해도 10골드 이상이니.


한창 광산사업으로 번창하고 있는 산타라스 백작가의 차남이 입는 옷이라면 정말 기껏해야 꽃이나 파는 저 소녀의 온 가족 값이 옷의 소매만도 못할지 모른다.



그러니… 이는 합당한 일이다.



퍼억- 퍽!



“죄송합니.. 윽! 제발 목숨만은… 커억!”



마치 부모를 잃은 고아에게 돌을 던진 부잣집 아이를 고아가 살짝 밀자


그 하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 소년을 두드려 패던 것처럼


마나조차 쓰지 못하는, 아마 비교적 키가 작은 그녀의 가슴께쪽에야 올 소녀가


아카데미 기사학부 차석의 마나를 두른 발길질에 얻어맞아 피를 쏟아내는 것도.



“쯧, 지저분하긴. 이래서 배운 것도 없는 평민들이란. 이봐, 평민 마법사.”


“예? 예! 이 아이를 치료하면 되겠습니까?”



남자는 그 말을 듣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옆에 서있던 안경쓴 남자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짝-



“더럽혀진 이 옷을 세탁하라고 부른 것이다! 이깟 평민 계집을 신경쓸 정도로 마나가 남아돈다면 곧 대성할테니 우리 가문의 지원은 필요 없겠군?”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당장 클린 마법을 옷에 행하겠습니다.”



계속 소녀를 걱정스런 눈으로 보고 있던 마법사가 뺨을 얻어맞고도 순순히 남자의 소매를 어떤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만드는 것도.


모두 이 아카데미란 곳의 수칙에 맞는 일이기에


그 어떠한 것도 어긋난 일이 없을 것이다.



“공녀님, 바람이 찹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줄곧 곁에 서있던 시종의 그 말에, 무언가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던 그녀의 뺨엔 바람에 실린 꽃잎이 내려앉았다.


아마 저 작은 소녀가 팔기 위해 가져온 꽃이 사내의 우악스런 발길질에 흩어져, 꽃잎 한장이 자신에게 온 것이리라.


그녀는 꽃잎이 날아갈까 조심스레 손을 들어 꽃잎을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분홍빛의 자그마한 봉우리와도 같은 모양, 매화였다.


이 꽃과 자신은 특별한 운명이라도 있는 걸까. 그리 생각하며 꽃잎을 바라보고 있자 어디선가 다시 바람이 불어와 꽃잎으로 그녀의 코 끝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그녀에게 매화향기를 맡게한 바람은, 이번엔 이 세상엔 없는 사제의 대화를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선우야. 너는 네가 왜 매화를 피우지 못한다 생각하느냐.’


‘그야 재능이 없어서겠지요. 평범한 농민이었던 제 재능으로 일류에 도달한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허, 재능이라니. 검을 든지 1년만에 일류 끝자락에 이르렀던 녀석이 재능의 부족을 논해? 지나가던 개방도가 웃겠구나.’


‘그렇지 않으면 달리 연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늘이 제게 허락한 운명이 여기까지라 생각하려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땐 내게 하늘이 무슨 운명을 주었든 자기대로 살아가겠다 하였던 놈이 이제 와서 그런 소리냐.

네놈은 검이 아니라 재담을 업으로 삼았어도 대성했겠구나.’



그녀는 이 대화를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늦게 일류에 도달했던 친우가 검에 매화를 피워냈을 적, 산에 흩날리던 꽃잎만을 멍하니 바라보던 때였다.


그때는 도사들 특유의 이해 못할 선문답이라 여겨 흘려들었을 뿐인데, 왜 지금 생각나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네가 매화를 피우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아무리 비옥한 옥토라도 매화씨 하나 품지 않았으면서 매화가 피길 바라는 꼴이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제자야. 너는 매화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아, 고민하지 말거라. 그저 네 생각을 듣고 싶을 뿐이다.’



그때, 하선우는 이리 대답했었다.


매화란 꽃이자, 화산파의 검법에 서려있는 향기라고. 


그것은 스승이 그를 처음 거두었을 때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느냐?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구나.’


‘이는 매화를 피우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이 정답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뭐, 원래는 네 스스로 찾길 바랐다만 이토록 우둔하니 이 스승이 다시 한번 가르침을 줄 수 밖에 없겠구나.


매화란, 곧 협이다.’



그 말을 들은 선우는 이리 말했던 것 같다.



‘그게 무슨 헛소리입니까?’



스승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같은 검수들은 검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저 무당의 재미없는 말코들은 태극을, 남궁의 오만한 놈들은 하늘을, 점창의 쾌만 머리에 가득찬 놈들은 태양을, 하다못해 마교놈들도 검에 마라를 담는다.


다른 곳의 검수들은 모두 그런 거창한 것을 검에 넣으려 하나,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화산이 검에 담는 것은 저 힘없이 흔들리는 매화일 뿐이다.


왜 그런지 알겠느냐?’



그때 선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아서였을까, 그 어떤 답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기대하진 않았다. 언젠간 너도 답할 수 있게 되겠지. 깨달음이란 그리 오는 법이니.


아무튼, 우리가 이 검에 매화를 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향기롭기 때문이다.’




바람이 들려준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허나 우둔하지만 검로와 구결을 외우는 능력 하나는 출중했던 그녀의 오성은 스승의 그 뒤 모습을 기억하게 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 태극의 조화를  얼마나 볼 수 있겠느냐?’


그 때, 스승의 기다란 머리칼을 바람 한 점이 훑고 갔다.


‘그러한 사람들이 저 하늘엔 닿을 수는 있을 것이요, 저 빛나는 태양을 바로 마주할 수 있을 성 싶느냐?’


그녀의 기다란 머리카락은 흩날리는 매화 꽃잎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마라의 유혹조차 선행을 베풀지 말지 고민하는 이들이 아닌, 내일 끼니를 때울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사람들에겐 닿지 않는 법이다.’


마치 지금처럼, 스승의 등 뒤에는 아직 노을은 지지 않았던 늦은 오후의 태양이 비추고 있었고.


‘허나 저 산에, 들에, 그리고 길가에 널린 매화는 그 어떤 이든 향을 맡을 수 있고, 또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으니.


그것이 화산파가 담고자 하는 매화이자, 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스승의 말에서 매화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리고 그 뒤 스승은 늘상 짓는 장난스런 웃음을 내보이며 그에게 다가왔다.



‘뭐, 네겐 어려울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호의는 커녕 적대나 받지 않으면 다행인 삶을 살아온 네가 타인을 위해 곧게 서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겠지.


허나 네게도 소중한 사람이 있고, 너를 소중히 대하는 사람이 있듯 세상 사람 모두 그렇다는 것만 잊지 말거라.’


‘...제가, 그러할 수 있을까요?’


‘무얼 걱정하느냐? 네 곁엔 네 스승과 네 친우들과 네 후배들이 있을텐데.


그리고, 설령 우리가 없다해도 너는 무척 선하고 어리숙하니 언제나 너를 아끼는 이가 한명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잡념 말고 어서 가서 물이나 떠오너라. 네게 오랜만에 가르침을 베풀었더니 목이 말라 죽겠구나.’



그 말에 자신이 그런 잡일을 할 배분이냐며 툴툴거리다 결국 우물가로 갔더랬지.


그녀는 마교에 의해 스승을 잃기 일주일 전, 그 즐거웠던 추억을 다시 되새기며 눈을 떴다.



그녀의 콧등을 간지럽히던 꽃잎은 그 오랜 회상에도 그녀의 콧잔등을 떠나지 않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에야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회상동안 바람이 꽃잎을 데려가지 않았던 것인가? 그렇다기엔 바람은 끊기지 않았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수초가 수시간처럼 느껴지는 무아지경에 잠시 발을 들여놓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아지경이란 보통 깨달음의 순간에 온다는 것은 모든 무림인들의 상식.


그녀는 어째서 그 이해도 못했던 대화가 깨달음인지 알 수 없었으나, 무언가 간질거림을 느꼈다. 이번엔 코가 아닌, 마음에서.



그녀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방금 자신에게 바람이 차니 들어가자 말했던 시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시녀는 아주 오래전, 공녀가 아주 어려 분뇨를 가리지 못해 수치심에 몸부림칠 때부터 그녀를 돌보아왔다는 것이 기억 한편에 남아있었다.


하선우가 스승과 함께한 시간은 많아야 10년 남짓, 다른 친우들과 함께한 시간은 그 아래다.


10년도 같이 지내지 않았고 16년간 만나지 못했던 친우들의 얼굴과 이름 뿐만 아니라 사소한 습관이나 특징도 생생히 떠올랐다.


허나, 16년간 같이 지내왔고 당장 오늘 아침에도 그녀의 도움을 받아 식사를 한 시녀의 이름은 기억할 수 없었다.



16년간 부대낀다면 설령 천지라도 이름을 외우는 법. 즉, 그녀가 저 시녀의 이름을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단 의미기에 공녀는 문득 부끄러움을 느꼈다.


동시에, 마음 속에서 자그마한 무언가가 솟아났다. 매화가지 같이, 단단한 무언가가.



그 매화가지는 속삭였다. 너는 무림인이며, 협을 행하고 싶어 한다고. 그러니 행하면 되지 무얼 망설이냐고.


공녀는 답했다. 이 세상엔 협도, 무림도 아는 이가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거기다 자신은 섣불리 자기 기분에 따라 명예를 해치는 행동을 하다 그 때 스승님처럼 꺾이고 싶진 않다고.


가지는 웃음기를 띄며 말했다.


네가 꺾이고 싶지 않은 연유는,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냐고.


설령 네가 이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간다 한들, 협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한 이상 저 아이를 잊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그녀, 아니 미혹에게 가지, 아니 깨달음이 대답했다.



‘그리고, 무림과 협을 기억하는 사람이 왜 없는가. 여기, 그 협을 기억하는 여인이 단 한명 남아있지 않는가. 그 한명이면, 협을 행할 충분한 이유다.’



그 한마디로 으레 저잣거리 소설의 주인공마냥 모든 미혹이 눈 녹듯 사라진 건 아니었다. 


허나, 미혹이 사라진 공간만큼 가지가, 혹은 의지가 조금 커졌고, 조금 단단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그녀는 시녀에게 물었다.


“그, 이름이 어떻게 되죠?”


“...엠마입니다. 공녀님.”



시녀의 말에서 숨길 수 없는 서운함이 묻어나왔다. 16년간 주위를 살피지 않은 자신의 업보이 감수하리라, 그리 생각하며 공녀는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지금 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나아간다면 엠마는 어찌 하시겠나요?”



그 말에 엠마는 저 앞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더러운 것이 아직 사라지지 않기라도 한 양 진흙의 흔적도 없는 부위를 계속 손수건으로 문지르고 있는 공자 앞에 의식 없이 쓰러져 있는 소녀를.



별 특별할 것은 없어보였다. 그렇다고 공녀와 일면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녀의 외출 때는 항상 그녀가 동행했고, 공녀가 마주친 모든 사람은 그녀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저 소녀에게 무언가 특별한 가치가 있는가? 그것 역시 아니었다. 꽃을 판다는 것은 곧 이렇다 할 상품을 마련할 자본조차 없는 빈민이라는 것. 도리어 저 소녀를 구타하는 백작가의 차남을 지지하는 것이 더 나을 지경이다.


엠마의 머리는 곧 판단을 끝마쳤다. 소녀는 이성적으로 보았을 때 구할만한 그 어떤 가치도 없으며, 구한다는 행동을 할 근거는 오직 자신의 이름도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외우지 못한 공녀가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 뿐.


그러므로, 엠마가 내뱉을 말은 단 한가지였다.



“언제나, 설령 공녀님께서 공녀님이 아니게 된다 할지라도, 전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10년이란 긴 세월이다. 누군가에겐 이름 하나 외우지 못할 정도로 짧은 세월일지 모르겠으나, 엠마에겐 자신보다 어린 한 여인을 가족처럼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엠마는 가족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인물이었다.



공녀는 엠마의 목소리에서 자신에 대한 단단한 신뢰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애정을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그녀의 탓이었기에, 자신의 우둔함을 되새기며 이리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그리 믿어줘서.”



그저 말 없이 미소로 화답하는 엠마를 바라보며 공녀는 숨을 들이쉬며 발걸음을 떼었다. 허나 그것은 늘상 내쉬던 호흡과는 달랐다.


지금껏 검을 다시 잡을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겨 무시하고 있던 공기중의 기, 마나. 그것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있었다.



몸 속으로 들어온 기를 납(納)하고선 단중, 중완을 거쳐 기해혈에 머무르게 하고, 그 뒤 불순한 기운을 걸러 회음, 명문, 영대, 백회, 인당혈을 거쳐 몸 밖으로 토(吐)한다. 기를 쌓는 토납(吐納)법의 기초다.


토납을 통한 신체라는 하늘을 두루 도는 작은 회전, 이르기를 소주천(小周天)이라 하며, 기해에 모인 기, 그것을 말하길 하단전(下丹田)이라 부른다.


하선우는 우둔했으나 무재가 없지는 않았다. 신체를 움직이며 기를 쌓는 동공은 그에겐 일상과도 같았기에 그녀가 소주천을 통해 하단전을 만들기엔 한 걸음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며 옆에 서있던 어느 병사의 칼집에 꽂힌 검을 조심스레 뽑았다.


특별할 것 없는 철검이 마치 원래 주인을 만났다는 양 부드러이 손에 들어왔다. 


당황한 병사에게 공녀는 웃으며 한마디를 전했다.



“실례합니다. 이 검, 잠시 빌리겠습니다.”



병사가 검을 가져간 여인이 공녀라는 것을 알지는 못했으나, 그녀에게 들린 검은 그것이 본모습인 듯 자연스러워 감히 따져 물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손수건으로 소매를 문지르고 있는 공자의 근처에 섰다.


백작가 차남이 소녀를 구타하는 걸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공녀는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아직 소녀에게 더한 위해가 가해지고 있지 않음에 안심한 공녀는 조용히 호흡을 시작했다.


기해혈의 하단전에 모인 기를 조금씩 회음혈 쪽으로 흘려보낸다. 허나 이전 소주천과 같은 약식의 작은 흐름이 아니다.


회음을 향한 기가 석문, 구미, 선기, 염천혈을 넘어 아문, 백회혈에 달하고 총회, 소료혈을 지나 단중혈, 다른 말로 중단전에 기를 모은다.


다시 그 기를 내려보내 하완, 척중, 명문혈에 달해 다시 기해혈로 돌아오니, 이를 우주와도 같은 몸을 도는 기의 커다란 흐름, 대주천(大周天)이라 이른다.


아주 작은 단전이긴 하나, 공녀가 중단전을 형성하기엔 열 호흡이면 충분했다.



이곳까진 전생에서 걸어왔던 길. 허나 이번엔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


그녀의 마음 속엔, 매화가지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깨달음, 아니 그리 부르기도 민망한 당연한 것. 나는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며, 저 소녀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람이라는, 그 누구나 알 법한 상식.


그 사실을 잊었던 무인의 가슴에, 다시는 그것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매화나무처럼 솟아오르니.


그녀의 마음 속엔 매화꽃이 피었고, 그 중 작은 한송이가 바람과 같은 내공에 실려 검의 끝에 내려앉았다.




“쯧. 기껏 나온 외출인데 몹시 불쾌해졌군. 네가 내 소매에 흙을 튀겨 씻지 못할 죄를 지었으니 나도 너의 소매 위를 가져가야 수지가 맞겠다.”




만약 빈민이 손목이 잘릴 정도의 중상을 입는다면 십중팔구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하다.


백작가의 차남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야 명예로운 귀족의 옷을 저열한 빈민이 더럽힌 죄는 그리해야 마땅하니까.


그렇게 공자는 아래로 검을 휘둘렀으나, 그 검은 소녀의 손목에 닿지 못했다.



챙-



마치 매화가지와도 같은 검 한 자루가 내리쳐진 검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야는 곧 검을 쥐고 있는 여린 손과 그 주인을 포착할 수 있었다. 프루누스 공작가의 금지옥엽, 로젤리아 뮴 프루누스였다.



그는 곧 눈 앞의 이 여인이 검을 배운 적 있다는 소식을 들었나 기억의 창고를 찬찬히 뒤졌다.


사람의 뼈는 보편적 인식보다 더 단단한 법. 그는 전력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나름 힘을 준 검격을 내질렀었다.


허나 이 여인을 보라. 검은 커녕 무거운 물체 하나 들어보지 못한 듯한 장갑 뒤 고운 팔로 검을 지탱한 채 마치 그의 검이 가로막히는 것이 섭리라는 듯 어떤 흔들림도 없이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 않는가.



그녀의 육체와 그의 기억은 그녀가 검을 다뤄본 적 없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자세와 눈은 그녀가 숙련된 검사임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 부조화에 잠시 그가 혼란에 빠진 사이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말을 내뱉었다.



“이 아이를… 해치지 않을 순 없겠습니까?”


“예?”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손목을 잃는 것은 이 아이의 실수에 비해 너무 큰 대가가 아닙니까. 이 정도면 다시는 귀족에게 무례를 저질러선 안된다는 것은 확실히 깨달았을 터. 이정도로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검 한번 잡아보지 못했을 것 같은 고귀한 공녀가 검을 든 이유가 고작 이 빈민 때문이란 말인가.


태생부터 귀족이었고, 지금까지도 귀족으로서 살아온 그의 세상속에서 그건 일어나선 안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검을 거둬 물러난 뒤 이리 질문하는 것은 당연했다.



“...혹시 그 아이가 무슨 특별한 재능이나 인맥이라도 가지고 있는 겁니까?”


“예?”


“뭐 마법 같이 검사인 제가 알아보지 못하나 공녀님 눈에는 보일 재능이라든지, 무슨 고위 귀족이나 거대 상단주의 혼외자식이란 배경이든지. 그런 게 이 아이에게 있냐 묻고 있습니다.”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제 보잘 것 없는 안목으론 이 아이에게서 특별한 재능을 찾을 수 없고, 이름조차 모르기 때문에 특별한 배경이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럼 대체 왜 그 년을 감싸시는 겁니까? 그대에겐 하등 이익볼 일 없는, 아니 오히려 손해를 볼 행동 아닙니까?”



그리 묻는 그의 눈동자에는 순수한 의문만이 남아있었다.


검집이 없어 거둔 검을 꽂지 못하고 그저 옆으로 제친 그녀는 순수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했다.



가장 먼저, 그녀는 이 아이를 전생의 그와 겹쳐보았기에 돕고 싶었다.


혹은, 이 아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기에 그 보답으로 돕고 싶었다.


또는, 이 아이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일 것이기에 돕고 싶었다.


그 외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를 도울 수많은 이유가 그녀에게 있었지만,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러한 힘없는 아이에게 작은 그림자라도 드리워주는 것. 그것이 매화이며, 협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애초에 들어본 적도 없는 협이란 단어는 무엇이며, 그것이 왜 이 아이를 도울 이유가 된단 말인가?


허나 그녀의 진지한 태도로 보아 다시 질문을 하더라도 그닥 효과가 없을 성 싶었다. 그는 공녀에게 조금 이상한 기벽이 있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넘기기로 했다.



“그렇습니까. 이유는 알겠습니다. 허나 여기서 제 말을 무른다면, 저는 권력 앞에서 어떤 말이든 취소할 수 있는 비겁자가 될 터. 만약 소매 아래를 가져가지 못하게 하신다면 지워지지 못할 상처라도 남겨야 제 명예가 그나마 보전될 듯 합니다.”



길고 장황하게 말하지만 결국 핵심은 너는 나를 권력으로 핍박하고 있으며, 자기 말에 걸린 명예는 핑계고 저 소녀에게 어떤 상흔이라도 남겨 분풀이를 해야 제 심정이 풀리겠다는 것.


그것 정도는 우둔한 공녀 역시 알아챌 수 있었지만 반박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명예를 그토록 중시하는 귀족이 명예를 핑계로 삼는다는 것은 타인에게 부담을 질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것을 행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그녀가 이후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저 권력의 핍박이 될 뿐이며 그가 그 말을 듣고 행동을 물릴 리도 없다.



그녀에겐 이 상황을 돌파할 단 하나의 방도 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명예가 손상될까 저어되어 물러나실 수 없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말씀을 존중하여 손목을 자르진 않고 적당한 선에서 끝낼테니 이제 거기서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아뇨, 그렇다면 더 나은 길이 있을 것 같네요.”


“네?”



그녀는 검을 잡고 있던 한 손을 놓고 그 손을 입가로 가져가 손을 감싸고 있던 장갑을 벗겼다.


그리고 벗겨진 장갑을 쥐고선 그것을 힘껏 눈 앞의 남자에게 던졌다.



착-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제 모든 것과, 저 소녀의 안전을 걸고.”



고급진 면으로 된 장갑이었기에 강하게 날아가지 않아 빈말로도 아프다 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차라리 공녀가 주먹으로 자신을 치는 게 덜 당황스러웠으리라 생각했다.


자세와 기세는 물론 훌륭하지만 자세야 저 공녀가 눈동냥으로 배운 것일 수도 있으며, 기세는 만용으로 인해 뿜어져 나오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근육하나 없는 팔로 보나, 장갑이 벗겨진 굳은 살 하나 없는 손의 모습으로 보나 그녀가 검을 한번도 휘두른 적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그러니 자연스레 그는 이런 말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혹시, 결투에서 패배하더라도 공작가의 권력으로 무마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리라 믿습니다. 결투란 귀족의 명예를 걸고 행하는 것. 그 어떤 귀족가도 그 결과를 존중해야 하니까요.”



공자는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을 떠올릴 수 없었다.


철없는 공녀가 결투의 신성성을 알지 못해 제멋대로 결투를 신청했다는 것.


그렇기에 가문이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금방 발을 빼리라 여겼다.



다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결투의 결과는 그 어떤 타인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공작가의 압박 역시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이 결투에 공녀가 아니라 한 명의 매화검수로 임할 것이므로.”



그리 말하며 중단세를 취하는 공녀를 보며 그는 그녀가  광증이 도졌다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말하는 협인지, 매화검수인지 하는 뜻 모를 말을 지껄이는 것도 그렇고, 숙련된 기사지망생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것은 영락없는 광인의 행태였다.



허나 광증 때문이라 할지라도 저토록 진지한 눈빛으로 검을 든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기사로서 할 일이 아닌 법.


그는 검에서 검기를 피워올리며 서서히 검을 내려 하단세를 잡자 공녀는 말했다.



“프루누스 공작가의 로젤리아 뮴 푸루누스… 아니 매화검수 로젤리아. 결투를 신청합니다.”



또 다시 뜻모를 소리를 하는 공녀의 말에 산타라스 백작가의 차남, 제이크가 화답했다.



“산타라스 백작가의 제이크 산타라스. 결투를 받아들입니다.”



구경꾼들 모두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할 진지한 분위기 아래, 아직 흩날리고 있던 꽃잎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산타라스 백작가의 차남은 그대로 돌진했다.


설령 실력이 부족한 자가 그리 했다면 토끼가 범의 아가리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는 토끼가 아니었다.



달리면서도 언제든지 수비세를 취할 수 있는 자세와 검의 위치, 공녀의 사소한 움직임조차 포착하려는 듯한 눈빛.


거기에 더해 가문의 지원 덕에 쌓았던 압도적인 마나량과 그 재능 덕에 발휘할 수 있던, 숙련된 기사들 중 하늘이 허락한 자들만 발휘할 수 있다는 검기까지.


그는, 오만할 자격이 있는, 명예로울 자격이 있는 강자였다.



반면 그의 상대인 공녀는 달랐다.


검이라곤 이번 생에 한번도 잡아보지 못 해 손잡이의 거침이 신경쓰이는 가녀린 손, 결투 전 한합 만으로 벌써 중단세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지쳐버린 빈약한 체력.


직전에 단전을 형성해, 검의 끝에 은은한 매화향기를 흘려보내는 것이 고작인 축기량에 더해.


고작 평민을 위해 최근 위세가 높아지는 백작가를 적으로 돌린다는, 그런 뒷담은 공녀의 빛나는 명예를 진흙창에 처박히게 했다.



괜찮았다.


그녀는 명예를 위해 검을 든 것이 아니라 협을 위해 검을 들었으므로.


프루누스 공작가의 공녀가 아니라, 매화검수로서 이 결투에 임했으므로.


그녀가 원하는 것은 빛나는 명예가 아닌, 저 작은 소녀에게 위로가 되어줄 향기 뿐이었으므로.



백작가의 차남의, 검기가 씌여진 보검이 크게 아래에서 위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졌다.


공녀가 아닌 매화검수의, 은은한 매화향 나는 철제 검은 간신히 보검의 검로에 검등을 걸칠 뿐이었다.



허나, 그것이면 족했다.


그 매화향이 그녀의 뒤편 작은 소녀의 코 끝에 닿기 충분했으니.



끼이이이익-



“뭣..!”



그 향에 홀린 듯 보검의 칼 끝은 철제 검의 옆면만 할퀼 수 있을 뿐이었고.


충격이 전해져 얼얼한 손에도 불구하고, 검과 몸의 무게중심을 이용, 검등으로 일격을 흘려낸 매화 꽃의 검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치 꽃잎이, 어느 여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르듯 부드럽게 상대의 목을 향했다.


당황한 그는 검을 다시 올릴 새도 없이 날카로운 검날이 그의 목에 걸쳐지는 걸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사전에 합을 맞추어도 그보다 뛰어날 수 없을 듯한, 흠잡을 데 없는 초식의 시연이었다.





설령 그의 전생에서 온, 매화검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었다면 그 초식을 이리 말했으리라.


길가에 핀 매화가 향기로 길거리 모든 사람들의 근심을 빗겨나가게 하듯 공격을 흘려버리는 초식을.


24수 매화검법 제 1초식, 매화노방(梅花路傍, 매화는 길가에 핀다)이라고.




차남은 아직 현 상황이 이해되지 않은 듯 보였다. 아니, 주위의 그 어떤 인물도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오늘 처음 검을 잡은 여인이 검기를 사용하는 기사를 상대로 승리한다는, 저 먼 옛 전설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허나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승리를 믿던 이에게는 침묵이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예컨대, 아직 결투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이다.


상대의 목 바로 옆의 검을 차가운 칼날의 기운이 목덜미에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들이밀며 공녀는 말했다.



“분명 생사결이 아닌 결투의 승리요건은 상대의 제압이라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아직 부족합니까?”



목의 피부가 얕게 베여 조금씩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한 산타라스 공자는 감히 검을 다시 들어올릴 수 없었다.


이성은 검을 다시 휘두른다면 충분히 검을 뿌리치고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직감은 그에게 검이 조금이라도 위를 향한다면 머리와 목의 꼴이 바람이 강한 날 꽃과 꽃잎처럼 될 것이라 속삭이고 있었다.


자고로 무인의 목숨이란 제 이성보단 직감을 따를 때 더 떠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았기에 황급히 항복의, 패배의 신호로서 검을 내려놓았다.


공녀는 그제서야 목에서 검을 거두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울 점이 많은 결투였습니다, 산타라스 공자. 부디 그대의 명예가 계속 빛나길.”



으레 결투나 대련이 끝나면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었으나, 이제 와 듣기엔 마치 조롱처럼 들리는 언사였다.


검을 처음 잡은 아녀자에게 패배한 기사라니, 그 칭호에 명예가 어디있단 말인가.



그는 순식간에 시궁창에 떨어진 그의 명예에 대한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돌아서 검을 병사에게 돌려주고 의식이 없는 소녀를 끌어안던 공녀에게 상처를 입히길 원했다.


허나 한 합으로 자신을 제압한 그녀에 대한 두려움 역시 분노만큼이나 깊었기에, 그는 검이 아닌 말로, 육체가 아닌 명예와 마음에 흉터를 남기고자 했다.



“고작 평민 하나를 위해 같은 귀족을 다수 앞에서 망신주다뇨! 그대가 명예를 안다면 이리 행동해선 안 되었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관중들이 다시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무위를 보고 잊고 있었으나 결국 이 대결은 귀족에게 먼저 해를 끼친 평민을 옹호한 공녀에 의해 시작된 것.


명예도 없는 평민을 위해 명예로운 귀족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귀족들은 여길 수 없었다.



그렇게 수군거림이 점차 커져 결국 소녀를 안아든 공녀의 발걸음을 멈처세웠다.


공녀는 고개를 살며시 돌리더니 말을 꺼냈다.



“네, 저는 명예에 관해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목소리들은 더욱 커졌다.


귀족에게 명예란 목숨이자 의무와도 같은 것.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귀족이 아니란 시인이나 다름 없었기에.


이제는 숫제 비난과 야유와도 같은 수군거림에도 흔들림 없이, 그녀는 말을 이었다.



“명예란 귀족이 고귀하기 위해 필요한 것. 그 행동에 부끄럼이 없고 마땅히 만인이 우러러 봐야하는 것. 전 빛나는 명예란 그렇다고 배웠습니다.


허나 저는, 클린마법 한번으로 사라질 얼룩에 아직 어린 한 소녀의 목숨을 앗아가려 하는 것이 왜 명예로운 행동인지


그 소녀를 위해 검을 들어 상대를 제압한 것이 왜 명예롭지 못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허나 저를 제외한 모든 귀족분들께서 그러하다고 하니, 제가 명예를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시끄럽던 장원은 어느새 조용해졌다.


감히 말 한마디에 모든 귀족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허나 그 속에서는 곧고 꺾이지 않을 듯한, 마치 매화가지 같은 의지가 느껴졌기에


그것에 압도된 좌중은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정녕 제가 그 소녀를 방치하는 것이, 만인이 우러러볼 수 밖에 없는 빛나는 명예라 한다면.


저는 명예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니, 알지 않으려합니다.”



그렇게 말을 끝마치고 뒤돌아선 그녀의 등에 다시한번 커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명예에 상처입은 백작가 차남의 목소리였다.



“공작가의 여식이 명예를 부정하다니! 귀족이란 응당 명예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야하는 법! 그대는 진정 모든 귀족의 모범인 공녀가 맞습니까?!”



내용은 조금 전의 질문과 유사했으나, 그것에 실린 감정은 달랐다.


그 전의 외침이 분노로 가득찬 울부짖음이었다면, 지금은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가 내뱉는 단말마에 가까웠다.


그러한 단말마는 호소력을 잃어, 그곳의 군중 모두, 심지어 소리를 지른 공자 자신조차도 공녀가 저 외침을 무시할 것이라 생각했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공녀라는 호칭은 제가 아버님의 여식이기에 붙여진 칭호이니, 아직 공녀라 불리울 수 있을 듯 합니다.


허나 저는 너무나 눈부셔 누구도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명예가 아니라, 그 향기를 어느 누구나 즐길 수 있을 협을 추구할 것이기에…


그래, 부족하게나마 화산파 공녀라고 자칭하겠습니다.”



그리 말하고선 그녀는 발걸음을 떼어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떠나는 그녀의 모습을 누군가는 선망의 눈빛으로, 누군가는 원망의 눈빛으로, 누군가는 두려움의 눈빛으로, 누군가는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본, 그녀의 시종 엠마가 황급히 따라가는 그녀의 등은 절묘하게 지평선 너머로 지고있는 해를 가리고 있었다.


그 빛은 여전히 뻗어나가 마치 공녀의 등이 빛나는 듯 보였지만, 희한하게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눈이 부시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빛에선 어쩐지 매화향기가 나는 듯도 했다.



그렇게 시작되는 이것이 제국의 수 많은 자랑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문파, 화산파가 세워지는 이야기.


혹은, 한 여인의 마음 속 매화가 온전히 피어 제국 만리에 향을 흩뿌리게 되는 이야기.


그 중 무엇이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가장 명예로웠던 귀족, 개파조사, 모든 협객의 스승, 화산파 공녀 로젤리아 뮴 프루누스라는 것은 변함 없으리라.




아, 사담이지만 야사에선 로젤리아 공작은 자신의 이명을 화산파 공녀로 확정한 이 순간을 제일 후회한다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뭐,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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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달에 화산파 공녀님 제목 말하기란 아이디어를 얻어서 최후반부만 먼저 썼더니 뭔가 아쉬워서 이것저것 사족을 붙이다 보니 2달이 지났다...

오히려 사족때문에 더 글의 완성도가 내려간 것 같기도 하고... 


너무 길어져서 퇴고 포기해버렸기에 맞춤법이나 비문이나 그런 게 좀 많을 수도 있음



아무튼 부족하고 존나 못쓴 1만 6천자 읽어줘서 고맙고 혹시 더 잘쓸 자신 있는 사람은 댓글로 말해줘... 이거 삭제해서 이 소재로 쓸 기회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