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눈을 떠보니 전혀 다른 세계였다.


먼 옛날 시골집보다 더욱 구식 방법으로 대충 만들어진 초가집. 그런 초가집들이 50여 채가 모여있는 조그만 시골마을.

조그만 대장간을 하건, 동물을 키우건, 다같이 도우며 사는 그런 시골. 그런 시골동네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고, 심지어는 말할수도 있었다.


적응하기만 거진 몇달이 지났을까, 겨우 알아낸 내 두번째 생의 장르는 무협이었다.


*


산과 강이 있는 곳에 마을이 세워지는 것은 꽤 당연한 이치였다. 먹을 것들이 풍부하니까.

우리 마을은 그런 강을 타고 하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반복되는 어느 일상 속에서, 동네 또래애들과 밭일을 끝내고 강가로 갔을 때 마주한 것은 잘 차려입은 검객들이었다.


가볍게 몸을 씻기 위해 탈의한 상체엔 근육이 잘게 차있었고, 이내 강가에서 올라오며 걸쳐지는 멋들어진 옷.

수수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멋들어지는 검이 옆구리에 자리했다.


꼬죄죄한 우리들이 그저 선망의 시선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씨익 웃으며 다가온 그는,


'무공', 심법에 대해 알려줬다.


배운 심법을 써보겠다고 신나서 앉아서 조잘재는 친구들.

그런 친구들의 옆에 앉아서 한참을 생각에 빠졌다.


'무협이라..'


그저 다시 태어난 것이라면 몰라도, '심법'과 '무공'이 존재하는 무협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는 어느 소설 속에 들어온 것일수도 있으니.


마음을 다스리는 심법을 어느 검객에게 배웠지만, 그 이상으로 심란해지는 날이었다.


*


어릴 적 어느 검객에게 배웠던 심법.

그냥 단순히 감각을 죽이고, 숨을 내쉬고 뱉는 과정에서 기를 느끼고 흡수하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기가 없었던 현대에서 살았던 만큼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기초가 없어 흡수하기 보단 몸 안을 훑고 지나가는 수준이었지만.


꽤 오랜 기간 수련하다보니 능숙해졌을 때, 그리고 어느날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길을 나서기로 했다.


*


"진짜 가는거야?"

"응. 지금 안 가면 더 늦을 것 같아."

"그래도.. 그냥 우리 마을에서 계속 같이 살면 안 돼?"

"돌아올게. 우리 집이 있던 곳이니까."

"언제 올 거야..?"


아침 일찍 길을 떠나기로 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꼬맹이 하나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더라.


"나쁜 사람들이 올 수 있으니까 알려줬던 것들. 계속 수련하고."

"응.. 그 하얀 탈은 꼭 쓰고 갈 거야?"

"응. 난 못 생겼으니까."

"안 못 생겼는데.."

"그래? 그럼 잘 생긴 거야? 고맙다."


하얀 탈.

하얀 하회탈에서 하관을 자르고, 연지 곤지를 찍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알아볼 가면.


"내가, 아니, 마을 사람들 중에 오라버니 따라,"

"안 돼. 따라오지마."

"아니, 그럼 여행을 간다고 하면! 그러다가 오라버니 근처라면! 소식을 듣고 찾아갈 수 있잖아. 그럴 수 있잖아!"

"그래, 그럼. 나는 '나그네'로 살아갈 거야. 그 이름이 들리면 찾으러 와."

"나그네.."


나그네.

나간 사람이란 뜻의 순우리말.

혹시 모를 고향사람을 찾기 위해, 혹은 먼 옛날의 나를 남기기 위한 이름.


"오라버니! 또 봐!"

"..그래, 지나가다 들릴게."


숨을 크게 들이쉬자,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같은 공기가 폐부로 깊게 들어왔다.


*


내가 가진 것이라곤 심법 하나와 대장간에서 다같이 모여 만든 철검 하나.


심법이라고 배운 것은, 어른이 아이에게 맛난 군것질 거리를 알려준 정도. 기껏해야 기를 느낄 수 있을 뿐인 감각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이 무협이라는 세상에서, 칼밥으로 먹고사는 이야기에서 나는 그것이라도 잡아야했다. 그렇게 수년간 단순히 수련해온 심법을 내 것으로 만들었으니.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다.


숨과 함께 들어온 기는 폐부를 거쳐 심장에서 온 몸으로, 혈관을 타고 흐른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다.


조금씩 빠르게 호흡하자 심장이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작은 흐름은 거대한 물길이 되어간다.

그 흐름 속에서 내 몸이 기로 가득차는 것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름모를 산적의 검이 터무니 없는 거리에서 내게 휘둘러진다.


단순히 위협용이었을까, 휘둘러진 검은 자신의 검을 뽐내기 위함이었을까.

반응이 없는 내 모습을 보고선, 의기양양했던 산적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점점 흐름이 빨라진다.


점점 세상이 가속된다.


날아오던 칼이 느려진다거나 하는 그런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도 그만큼 빨라진다.


그래, 언젠가 다리가 걸려서 넘어질 뻔할 때 반대쪽 다리를 내딛었을 때.

작물을 털다가 나타난 곤충에게 휘두른 것이, 그 곤충을 반으로 갈랐을 때.

그럴 때처럼, 가속된 세상만큼 나도 가속하며, 의식은 마치 파도처럼 거기에 휩쓸린다.


이 파도같은 흐름에 서핑을 하듯 중심을 잡으면 꽤 짜릿한 스포츠가 되어버린다.


숨을 내쉬며, 한걸음.


크게 내딛은 걸음과 함께 몸을 숙이자, 머리 위로 휘둘러지는 칼날에 서린 기가 느껴진다.


숨을 크게 삼키며, .


가슴팍에 정확하게 꽂힌 정권.


"끝."


아, 이런 대사. 해보고 싶었단 말이지.

친구들과 놀면서도 해봤지만 영 맛이 살지 않았다.


쿨럭-,


각혈하는 모습을, 시퍼렇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후련함이나 안타까움을 느끼진 않았다.


'남을 죽이려했다면, 죽을 각오는 해야지.'


후우-,


그것은 내 죽음에도 마찬가지인 법칙이겠지. 어느 순간 사라질 수 있는 목숨, 혹은 이 긴 꿈에서 깨어나는..

어차피 죽는다면 이번엔 후회없이, 마음 편하게 살아보고 싶다.


스읍, 후우-,


입 밖으로 뿜어지는 숨결에도 기가 실려있으리라.


뜨거운 숨을 내뱉는 것과 함께, 거칠게 회오리치던 기는 온 몸의 근육을 때리면서 흩어졌다.

헬스장에서 온 몸을 조진 날처럼, 뜨거운 온탕에 몸을 담굴 때처럼, 뜨거운 시원함.


쩔그렁-,


산적이 들고 있던 거대한 칼이 떨어졌다.


쭈그려 앉아 살펴보자, 한쪽 날만 서있는 도.

꽤 잘 만들어진 것이 마음에 들었다.


풀썩-,


손잡이의 그립감을 살펴보고 있던 도중 옆으로 산적이 널부러졌다.


"너, 너는 쿨럭-, 누구.."

"나? 나그네라고 해. 잘 부탁해, 친구."


돈이 많으면 좋으련만.


*


"나, 나그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돈이 없으면 좋으련만.


무협지에서 읽었던 바로는, 수상한 자가 외성에 들어설 때 돈을 찔러줘야한다는 게 있었는데..

마을을 떠날 때처럼 땡푼거지였으면 몰라도 산적친구의 도움을 받아 두둑하니 마음이 찔렸다.


"히, 히익.. 무, 무림인이십니까?"

"어.. 네."


엄밀히 따지자면 칼도 2개나 매달아놓고 다니고, 기도 쓰면서 사람도 죽여봤으니 일반인은 아니리라.


"어쩐, 연유로.."

"아.. 관광? 아랫마을 사람이라서.."

"통과! 다, 다음!"


그렇게 들어선 외성의 외곽은 마을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저 너머, 내성의 모습이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빼면.


"히익-,"

"어머나,"


길을 나서는데 


'아니면 가면이 그렇게나 혐오스럽나?'


문득 의뭉스런 느낌에 가면을 벗어 살펴보니,


새하얀 가면 위로, 나무열매로 낸 상큼한 붉은 색의 연지.

그 위를 소름돋게 덮은, 일전에 마주했던 산적의 각혈.


"아."


가을이었다.


*


지나가다 광고배너에서 보고, 가볍게 딱 3천자 맞춰서 참가해봅니다. 부끄럽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