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은 지지 않는다.


어떤 풍파가 세상을 휩쓸고, 그 어떤 풍랑이 세월에 굽이칠지라도.


그 만고에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별은 지지 않는다.


굽히지 않는다. 타협하지 않는다.


그저 그 심상을 검에 녹여내었더니.


그를 검의 별, 검성이라 칭하더라.



*



“세간에서 이르길, 검의 별. 검성이라도 별 수 없나 보오.”


거뭇한 흑의를 입은 노인이 혀를 끌끌차며 읊조렸다.


시조마냥 가락이 바뀌는 그 어조를 따라. 항거하기 힘든 거대한 예기를 띤 기운이 의식으로 빗발쳐 들어왔다.


명백한 음공.


이미 기력을 다 소모한 몸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탈진시키려는 의도였다.


아무렇지 않게 쓴 가면 뒤에 숨겨진 흉악한 본심.


그 의도를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노인의 근처로 입가에 기다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백의인들이 간헐적으로 진동했다.


살아있었다면 대다수의 의식을 찢어 발겼을 기파가 노인을 중심에 두고 원의 형태로 퍼져나갔다.


노인이 흥얼거린 말소리가 명백한 음공이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또 다른 증거.


“저 밤하늘의 별은 저렇게 밝을 수가 없는데.”


살며시 눈에 하늘을 담은 노인이 고개를 이리 저리 젓는다.


“명운이...”


콰앙!


그와 함께, 찰나를 격하고 날아온 한 중년인이 땅바닥을 부서뜨리며 착지한다.


어마어마한 굉음이 발생하며 피어오른 황톳빛의 분진이 어스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흐릿한 운무 사이로 검은빛의 형상이 조금 비쳤다.


노인과 마찬가지로 흑의를 입은 모습.


어마어마한 거구다. 생기 없는 핏물이 말라붙은 흑의 위로, 호쾌함을 가장하는 미소가 돋보였다.


탁탁.


어느새 손을 거칠게 마주치며 먼지를 털어낸 중년인이, 커다란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


“검성! 너와 맞붙기 위해 이 정마대전에 참가했다. 나는 맨손박투를 즐기는데. 어때, 적수공법에는 소질이 있는가?”


노인만으로 이 일대를 가득 채울 듯 했던 존재감이, 중년인이 합세하자 그 곱을 한 듯 더욱 거세진다.


담담히 서 있는 것만으로 기력을 소모해야 된다.


가끔씩 주위를 스치는 바람이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스러진다. 노인과 중년인, 둘이 뿜어대는 기파가 천지만물에 대한 인력을 발생시키기 때문이었다.


마도의 최고수 둘의 압박감이란, 그러했다.


“설마 이 정도가 우리 전력의 끝이라고 어림짐작하는 겐가?”


노인이 음공 계열 마공을 익힌 자들 특유의 불쾌한 쇳소리와 함께 말했다.


검성. 검의 화신. 낭인. 하벽훈은 그 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시체의 산을 쌓은 곳에. 수많은 흑의가 모여 아득한 심연으로 보이는 곳에 걸터앉으며.


심유한 눈으로 이 일대를 장악할 뿐이었다.


그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노인이 불안감을 상쇄시키려는 듯 다시금 입을 뗐다.


“어디까지나 이곳에 모여 있는 세력은 마도의 삼분지 일뿐일세. 곧 현현하실 당대 천마를 제외하고 합산하면 말이지.”


노인의 말은 거짓이 없었다.


그 이후로도 흑의를 몸에 걸친 강대한 기운들이 속속들이 착지했다.


하나같이 아는 면면들의 수급을 손에 들고 말이다.


중에 특별히 적색의 옷을 걸친 놈은 이렇게 말했다.


“정도 놈들의 저항이 하나같이 거세어 본교의 혈시로 제련되는 위대한 영광을 누리진 못하겠다. 어찌나 날뛰던지 그 반항이 혼백에까지 남아 있어.”


적색의 말이 썩 재미있어 보였는지 뒤이어 도착한 흑의의 자들도 앞 다투어 몇 마디를 던졌다.


패전국의 병사를 조롱하는 승전국 병사의 기분일까.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던 중 적색의 장포가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저 놈. 지금까지 우리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벽훈이 지금껏 바라보던 허공이 송두리째 뜯겨나갔다.


검.


새하얀 검신을 자랑하는 한 자루의 검이 공간을 가르고 튀어나온다.


세상의 모든 마.


압도적인 위신을 자랑하는 천마의 기운이 튀어나오려던 허공 근처를 포악하게 움켜쥔다.


어둑하고 짙은 무형의 기운이 허공에서 추적추적 떨어지는데 그 기운과 맞닿은 시체가 속살을 파고들며 썩어갔다.


이윽고, 장대한 밤하늘을 담은 듯한 흑단 같은 머리칼과 함께, 당대의 천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부연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존재 자체가 마도의 종주인 마의 화신.


뭇 천마를 바라보고 있자니 경애가 차오르는지, 대략 아홉 명쯤 달하는 흑의인들이 천천히 부복한다.


[수고했다.]


듣는 이를 자신도 모르게 매료시킬 듯한 마성.


평탄한 어조로 정마대전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하며 수하들을 치하한다.


그리고 사뿐히 공간을 격하고 날아와 순식간에 하벽훈의 코앞에 자리한다.


“오랜만이구나.”


내공을 사용하는 육합전성이 아닌 진성.


자리한 장소와, 시기가 아니었다면 평탄한 인사말이었을 테다.


다만 이 곳은 수천수만의 명운이 엇갈리는 전장이고, 저 자는 천마이기에.


검성, 하벽훈은 검을 들어 천마의 목을 겨눴다.


천마의 눈길이 일순간 목 근처에 기대진 검을 흥미롭게 훑는다.


무에 문외한인 민초가 평해도, 머리에 당장 칼이 겨눠진 사람이 할 법한 행동은 아니었다.


다만 하늘의 손길로 제단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종잡을 수 없기에 마.


천마의 입매가 고혹적인 웃음과 함께 휘어져 올라갔다.


그리곤 곧 광소를 터뜨린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부하들의 의문 어린 시선 따위는 바닥에 메어두고 광소한다.


흑의인들의 의문 어린 시선이 슬슬 천마에 대한 불신으로 화하기 직전.


광소하는 천마를 앞에 둔 무림맹주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지기 직전에.


“모두 물렀거라.”


천마가 입을 열었다.


순간 흑의인들 사이로 보이지 않는 파장이 일었다. 흑의를 걸친 대다수의 마인들이 그랬는데 특히 적의와 음공을 사용하는 노인은 그 반향이 컸다.


“천마시여! 이 하늘의 명운이 결정되는 중한 시기에 어찌 그런 결단을..!”


“저 간악한 낭인 무뢰배가 어떤 짓을 할지 모릅니다!”


동요는 길게 가지 않았다. 마는 그 자체로 더욱 강한 마를 숭상한다. 의견에 부합하고 싶지 않다면, 마도의 진전을 이어받아 천마에게 도전장을 내밀면 된다.


다만 적의와 노인은 그러지 못했다.


권태로운 표정의 천마가 오른 손을 살짝 손짓하자 억울한 표정으로 항소하던 노인의 머리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를 훑어보지도 않았다.


“물렀거라.”


담담히 같은 말을 반복한다.


약육강식. 유아독존.


천마를 넘고 싶다면 천마가 되어라. 흑의인들은 그 종주의 힘에 감복하며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 전장에 남은 자는 천마를 제외해 하나가 되었다.


잠깐 하늘의 별을 흘깃한 천마가 천천히 말한다.


“말투를 편하게 해도 되나?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지? 어릴 적의 소꿉친구? 낭인? 검성? 그것도 아니면 하벽훈?”


수하들에게 퇴각을 지시한 목소리와 다르게 웃음기가 서린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휘어지며 하벽훈에게 정체성을 묻는 게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생기발랄한 천마와는 다르게 하벽훈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질긴 악연이다. 네가 논한 것 중 서로가 서로에게 합의된 칭호가 없으니. 철천지원수쯤이 좋겠다.”


“철천지원수? 원수? 원수라.. 알겠어 원수.”


과장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가벼운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날려 그녀의 입술 근처에 묻었다.


“원수. 그래서, 나 벨거야?”


천마를 베다니. 당연한 이치다. 벨 수 있으면 베는 게 옳다.


“당연하다. 난 수백만 민생을 등에 업은 검성이고, 넌 천마기에. 우리는 언젠가 충돌할 운명이었다.”


“검성? 그러면 그건 네 안 속의 몇 번째 자아야?”


“말 돌리지 마라. 지금은 정마대전의 끝자락이고 네가 어떤 연유로 수하들을 물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베야 한다.”


“그곳에 네 자유의지는 얼마 쯤 계량되어 있지?”


마. 천마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 정신까지 마로 침식되는 기분이다.


더 이상 말을 섞으면 무언가 이상행동을 할지도 모를 것 같다.


진절머리가 나며 한 걸음 물러선다.


더 이상의 문답은 소용이 없다. 하벽훈은 그렇게 직감했고 천마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느끼며 검에 강기를 불어넣는다. 정밀한 내공운용이 강기에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검을 두르는 순백색의 검극이 어두운 새벽빛 사이로 삐죽 튀어나왔다.


천마는 더 이상 고혹적인 마성을 뽐내지 않았다.


허공을 뜯어버릴 때 사용했던 새하얀 검을 머리칼과 함께 늘어뜨릴 뿐이었다.


선공을 잡아야 한다.


발바닥에 기파를 모으고 순간적으로 발출한다.


하벽훈이 걸터앉았던 시체의 산이 일시에 휘청거렸다.


빛살같이 쏘아져 심장을 꿰뚫을 기세.


흐릿해진 신형이 천마의 가슴팍까지 도달한다.


“...”


천마의 심연을 담은 듯한 눈이 나지막하게 하벽훈을 내려다본다.


휙!


하벽훈의 선공이 그대로 허공을 가른다.


마교 특유의 묘리가 담긴 발걸음으로 일격을 피하고, 그대로 검을 들어올린다.


천마가 내딛는 보법 사이사이에 거침이 없다.


‘내리찍는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기 무섭게 어마어마한 자연지기가 천마의 검 끝에 응집한다.


검을 휩쌓은 마기가 마치 성화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즉발의 일격.


‘이런.’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이런 강대한 자연지기를 소모하는 일격을 사용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서둘러 호신강기로 상체를 감싸고 하강하는 검을 빗겨쳐 최대한 힘을 분산시킨다. 최대한 흘리긴 하였으나 천마의 내공이 마치 벼락처럼 전신을 파고든다.


혈도 세맥 하나하나에 꽂힌 천마의 내공이 요란스럽게 흔들린다.


일격을 허용했음에도 멈춰선 안 된다. 후속타가 날아온다.


예지에 가까운 본능. 천마의 내려찍기를 막아낸 반탄력으로 한 바퀴 돌아 복부 쪽을 걷어찬다.


파앙!


삽시간에 복부를 걷어차인 천마가 저 뒤로 밀려난다.


하벽훈과 천마 사이의 긴 고랑이 생겼다.


이번에는 천마가 선공을 가져갔다.


“흡!”


일순간 정적이 일더니 온 몸을 비틀며 쥐던 검을 던져버린다.


저 멀리서 점으로 번뜩인 빛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하벽훈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카앙!


손아귀에 힘을 단단히 쥐고 쳐낸다.


무시무시한 내공의 여파가 손잡이를 타고 체내로 짓쳐들어왔다.


검을 다시 고쳐 잡는 순간. 검신의 뒤로 발을 내치는 천마의 모습이 비친다.


고개를 숙여 두개골에 발길질을 허용하는 불상사는 피했지만, 아직 가속도를 줄이지 않은 다리가 손에 쥔 검을 그대로 차버린다.


검을 날리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는 듯.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아직 허공을 유영중인 천마를 눈에 담는다.


오른 손에 지금까지 수련해온 내공을 담아다, 복부 쪽에 내뻗는다.


천마가 땅을 디디려는 때를 이용한 절묘한 공격.


분명 피할 수 없다. 헌데 방금까지 공중에 떠 있던 몸체가 이지러지더니 하벽훈의 등 뒤에서 경시할 수 없는 기파를 드러낸다.


공간을 찢는 한 수. 천마의 잔상을 따라서 지상을 내리쬐는 별빛이 은은하게 아롱졌다.


커헉!


척추를 발차기에 얻어맞았다. 공중을 잠시 부유한 하벽훈의 신체가 엄청난 속도로 대지를 가로지른다.


멈추지 않을 듯 했던 신체의 질주가 마침내 움푹 파인 계곡을 만나 저지된다.


콰앙!


진탕한 충격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목 아래를 찰박거리는 차가운 물결이 어루만졌다.


쉴 틈이 없다.


문득 하늘 위에서 무언가 오싹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위로 올린다.


어두컴컴한 하늘 가운데, 빛을 발하는 만월이 떠있었다.


무언가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가운데, 만월의 중심이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한 인영에 의해 가려졌다.


보름달의 광채를 역광으로 삼아 흑색으로 타오른다.


양 손에 검을 역수로 쥔 모습.


그제서야 하벽훈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 보름달은 자연적인 순환의 하나가 아닌, 천마가 내공으로 빚어낸 의념의 일종이다.


자연지기를 흉내 내는 천마의 내공수발력.


그 경이로운 기이가 하벽훈을 향해 시전되는 순간, 생각한다.


이 싸움은 쉬이 끝나지 않겠다.



*



불철주야.


천마와 나는 촌각을 다투며 일주일간 합을 주고받았다.


본인의 내공을 온전히 상대에게만 전한 덕분에 둘이 싸우던 자연이 훼손되는 일은 없었다.


칠 주야의 마지막 밤.


언제나 그랬듯이 밤은 깊었고 달은 그윽했다. 고요한 바람이 부는 대지 위에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너와 합을 나누다가 맹세했던 적이 있지. 오늘 내가 네 손에 배어지면 전 마도 세력을 이끌고 잠적해주겠다고.”


고고함을 자랑하던 천마의 위용 어린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었다. 마성을 곁들였던 목소리도 가끔 쇳소리를 내는 불쾌한 소음으로 변해 있었다.


다만 천마의 눈은 언제나 형형한 안광을 빛내고 있어, 그 분위기를 쉽게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오늘, 나를 벨 수 있겠어?”


그와 반대편. 검성 하벽훈의 몰골도 마찬가지로 처참했다.


전신이 낭자되며 도복은 거의 만신창이가 되었다.


목소리를 꺼내려 하니, 괴악하고 괴팍한 기질을 가진 불협화음이 흘러나왔다.


“해야만 한다. 수백만 민생을 등에 업고..”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 마냥 천마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곧이어 천마의 대꾸가 바로 날아든다.


“또, 또 민생 타령. 네가 언제부터 남을 그리 신경 썼다고 그래? 그래서 낭인인 거 아니야? 누구보다 자신의 안위를 중시하니까. 민초들이 붙여준 검성이란 별호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봐.”


“..나는 그저 민생을 위해.”


“같은 말을 반복하네. 넌 무림맹주도 아니잖아? 무림맹주는 내가 죽였고, 실질적으로 민초들이 믿는 유일한 가능성이 너인 건 맞아. 근데 네가 언제부터 남을 그리 신경 썼지?”


불쑥 말을 끊은 천마가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자. 너와 함께 간다면, 혹시라도 모를 반란의 가능성을 잠재우고 천하를 통치하는 것도 가능해.”


“...”


사실상의 휴전 협상. 그 동안 정마대전에 참가해 검성의 이름으로 베어낸 사마외도들을 생각하면 그녀로서는 대범한 제안이다.


두 사람은 칠일 밤과 낮을 가리지 않는 결투 끝에 많이 지쳤다.


육체적으로 그랬고 심적으로도 그러했다.


하벽훈은 생각한다.


나는 낭인이다. 마땅히 책임질 사람도 없고, 마땅히 책임질 의무도 없다.


정도나 마도. 둘 중 무엇이 세상 위에 군림해도 유유자적하게 방랑 생활을 하면 그만이다.


낭인으로서의 자아가 가슴 한 가운데서 슬그머니 올라와 뇌리의 중앙을 콱, 틀어잡았다.


혹자는 이기심이라 평가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때의 하벽훈은 되려 그 혹자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무얼 했는가?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는가? 예로부터 낭인이란 제 목숨을 가장 중요히 생각하는 족속이었고, 하벽훈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천마가 건넨 저 제안은 꽤나 매력적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의 손이 천마를 향해 다가간다.


맞잡는다.


저 손을 맞잡으면 편해질 수 있다.


맞잡으려 했다.


끼익.


돌아가는 바퀴에 제동을 건 것처럼. 천마를 향해 나아가던 하벽훈의 손끝이 급작스레 멈춘다.


검성.


민초들에게 검의 별이라 칭송받는 그 이름이 하벽훈을 멈춰 세웠다.


흉년이 머물기도 훨씬 이전에 들린 행복한 웃음소리가 한 자리에 붙박여 하벽훈을 잡아끌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뛰노는 풍경. 한 지붕 아래 세 가족이 모여 서로 떠드는 광경.


떠오르는 기억은 남의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하벽훈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보고 또한 느낀 것은 양민들 개인이 아니라 천하다.


그들과 함께 숨 쉬며 감각한다.


문득 상상도에서 눈이 마주친 아이 하나가 하벽훈에게 다가와 속삭이듯 말해주었다.


별은 사사로운 바람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다.


전장에서 죽음에 이르는 중상을 입어도, 일신의 안위에 그 어떤 변고가 생겨도 밤하늘을 끔찍하리만큼 빛낸다.


하여 검의 별이었고 그 대의는 쉽게 놓지 못할 만큼 무거웠다.


놓쳤다면 또 다시.


이제. 하벽훈의 검은 어떤 타의도 아닌 자신에 의해 휘둘러진다.


대지에 박아 넣은 검을 다시 쥔다.


만고에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오랜 세월 굳은 듯했던 심장이 박동하기 시작한다.


삶을 일수에 관통한다.


이 순간 번뜩이는 여러 갈래의 심상을 얼기설기 엮어 새로운 일수를 만들어낸다.


검을 쥠과 동시에 공기가 일변하자, 당황한 기색의 천마가 저만치 물러선다.


협상 결렬.


자연스럽게 그 네 글자를 떠올린 것일까.


입술을 짓씹음과 동시에 칠 주야의 첫날 밤 보여주었던 기술을 장전한다.


세상을 덮는 만월이 떠오른다.


보름달이 하늘의 꼭대기에 자리하기까지 융단 같은 빛길이 도처에 깔린다.


고개를 젖혀 보름달을 등에 지고 역광으로 빛나는 천마를 바라본다.


별 하나는, 다른 별을 끌어당기면 차마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린다.


누구보다 일신의 안위와 부귀를 위해 낭인이 되었음에도, 민초들이 지어준 검성이란 별호 하나에 번민하게 되는 것이 그 이유다.


대의를 포용하지 못하는 하벽훈의 그릇이기도 했다.


하나의 별이 다른 하나를 담을 수 없다.


하늘 아래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당연한 이치.


같은 크기의 그릇이라면 어떤 술수를 쓰든 다른 하나를 담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별 하나에 그치지 않고 모두를 포용하는 하늘이 된다면.


이 순간 하벽훈은 나를 번민하게 한 검성의 자아를 내려놨다.


마음 속 깊이 어두운 곳에서 희망하는 낭인의 자아도 내려놨다.


그 무엇도 내치지 않고 온전히 품는다.


주어진 명운을 따르기 거부하고 하늘을 뒤집기 희망하는 마까지도.


어느새 하벽훈의 몸과 가로로 일직선을 이룬 검 사이로 달빛을 반사하는 검광이 이리저리 뒤채인다.


천마가 칠 주야의 첫째 밤. 천마가 그 때 보였던 신위를 재현하려 드는 순간.


지상의 공기를 한 없이 머금은 하벽훈의 검이 횡으로 휘둘러졌다.


“...!”


찰나에 부릅뜬 천마의 두 안광 아래로 주홍빛의 검흔이 깊숙이 아로새겨졌다.


베인 것은 천마 뿐만이 아니다.


천마보다 아래에 자리한 하벽훈으로부터 끝을 알기 어려운 의념이 새어나온다.


인간의 몸에 하나의 자아밖에 깃들지 못한다면.


내가 그 모두를 뒤덮는 하늘이 될지니.


날붙이로 하늘을 꿈꾸어 검천.


실핏줄에 사로잡힌 천마의 눈동자에 경악이 어린다.


자칫 멍청하게 벌린 입 사이로 나오던 말은 끝내 맺지 못했다.


하늘에 비견될 만큼 크기를 불린 검이 천마와 그 뒤에 뜬 보름달을 동시에 메어낸다.


저물어가는 천마를 뒤로, 새 시대를 장악해가는 오연한 목소리가 섬광처럼 내리꽂힌다.


“작별이다. 천마.”


검천. 몇 시대 동안은 잊히지 않을 당대의 천하제일인.


천마의 가슴팍에서부터 흩뿌려진 피가, 유성우처럼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나 사실 여친 있음 만우절이니까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