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월검 이금(李昑).

강호의 3대 고수이자, 월도문(月渡門)의 개파조사.

평생 검을 붙잡고 살아오신 나의 아버지.


그분은 달이 뜬 날마다 불콰하게 취하여, 내 귀에 운율 깃든 문장을 속삭이시곤 했다.


-기억해라, 아들아. 노력하면 세상에 이룰 수 없는 게 없다.


그것은 격려이자 설득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아버지 본인에게도 향하는 설득.


-의지를 먹물 삼고, 검을 붓 삼아, 세상이란 도화지에 그려낸다면. 저 영근(靈根) 없이도 뜻을 행할 수 있는 게야.


약관(弱冠, 20세)이 되었음에도 영근을 각성하지 못한 실패자.

수도의 길을 걷지 못하게 된 낙오자.

그럼에도 검 한 자루로 단련을 잊지 않아 축기경 수도자와 맞설 수 있게 된 입지전적 범인(凡人).


그런 나의 아버지는, 길 가다 어깨가 부딪혔다는 이유로 결단경 수도자에게 오체분시되었다.


*


아버지의 장례는 약소하게 치러졌다.

조각난 시체를 간신히 수습하여 불에 태웠다.

나는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깨달았다.


아, 절세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무공조차 수선에는 이길 수 없구나.


달을 찢는다는 패도적 검법은 내려치는 번개를 가르지 못했다.

구름 위를 노닌다는 경공은 땅을 접는 축지법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바람과 태극을 본딴 이화접목의 수법은 수도자의 영기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는 사람의 부족함도 노력의 부족함도 아니다.

그저 그런 법칙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수도자를 이길 수 없다는 그 자명한 법칙.


'...아버지.'


세상의 진실은 예상보다도 차가웠다.

아마 아버지는 이 한기를 견디지 못해 밤마다 취기로 도피한 것이었겠지.

달빛 아래 무의 묘리를 들으며 크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의 그림자는, 저 타닥이는 장작 속에서 연기처럼 날아갔다.


보라. 강호의 삼절이자 천고의 기재라 불리는 그분이 어떻게 끝을 맞이했는지.


월도문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남은 건 날 위해 남긴 한 권의 서책 뿐이었다.


그분이 깨달은 모든 무학을 집대성한 비법서.


[월도신공]


무림인이라면 모두가 탐낼 서적이었으나 나는 그 책을 펼치지도 않았다.

이미 마음 속에 굳건한 의지와 이해가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무공이라는 방법은 틀렸다. 적어도 수선보다 비효율적인 방식임이 확실하다.

이미 갈 길을 정했으니 괜히 눈을 돌릴 필요는 없을 터.


하여 나는 분노, 복수심, 억울함, 자기 혐오 등의 모든 감정을 담아. 

아버지를 죽인 결단경 수도자의 제자가 되었다.


*


영근의 개화는 말 그대로의 무작위다.

아버지는 끝끝내 가지지 못했던 영근을 나는 걸음마를 뗄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천영근. 수도자 중에서도 귀하다는 재능.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고위 수도자의 수제자가 될 수 있는 재능이다.

다만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었던지라. 영근의 보유를 밝히지 않았다. 


월도의 무학에 심취했던 탓이다.  

수선 없이 무공으로 뜻을 관철한다는 말이 어린 내게는 퍽 매력적이었다.

하여 그 가르침을 온전히 받기 위해.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세상 모두에게 영근의 보유를 숨겼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 거리낄 것도 없겠지.'


은거하며 기다렸다.

세상이 날 잊고, 파월검을 잊고, 월악문을 잊을 때까지 기다렸다.

언제나 새 소식이 넘치는 강호인 만큼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후 결단경 수도자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신분을 속이는 건 쉬웠다. 수도자가 관심을 가지는 건 영근의 보유자 뿐. 

영약의 재료조차 되지 않는 범인들은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는 결단경 수도자 밑에서 수선을 시작했다.


초기 20년. 


화속성의 영근을 어찌 다루어야 하는지 터득했다.

불에 닿아도 피부가 무르지 않았으며, 피를 끓게 만들어 체온을 높일 수 있었다.


손이 닿는 것만으로 물이 증발하게 될 때.

단수기를 돌파하여 연기경에 올랐다.


다음 30년. 


화속성의 기를 쌓기 위해 화산으로 동부를 옮겼다.

삼영근인 스승은 날 금지옥엽으로 대했다. 검은 속셈이 눈에 훤했으나, 일단 주는 지원은 거부하지 않았다. 


손끝에서 붉은 꽃이 타오르기 시작할 때.

나는 축기경에 올랐다.


'고작 50년만에 삼매진화(三昧眞火)인가.'


무공으로는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전설 속의 경지조차 수도에서는 거쳐가는 한 단계에 불과했다.

천영근의 효력 덕에 수행이 빠른 덕도 있다지만.

한때 무의 길을 걸었던 입장에서는 참 한숨이 나올 만큼 압도적인 성취였다.


'...역시. 무공은 무의미하구나.'


나는 품 안에 숨겨둔 월도신공을 어루만졌다.

한 번쯤 꺼내 읽어볼까 싶기도 하였으나. 내 길의 옳음을 확인할 때마다 책의 유혹은 얇아졌다.


자연과 이치 그 자체를 다루는 선법(仙法) 앞에서 인간의 무공은 하찮을 뿐.

아버지의 유산을 다시 품 안에 넣으며 수행에 집중했다. 


또다시 50년.


마침내 스승이 속내를 드러냈다.

검고 얕은 속내였다. 그의 수작은 모두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충동적인 이였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100년간 복수를 잊지 않은 내게는 웃음이 나올 만큼 뻔했다. 


모든 수작은 역으로 돌려 주었다. 

무수한 저주와 통째로 빼앗은 저물도 덕에 경지 차이가 있음에도 승부가 수월했다. 

결판이 나기까지는 5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이름조차 외우지 않은 스승의 이름을 베며.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스승님, 이금이란 이를 기억하십니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영문 모를 표정만이 생뚱맞을 뿐.

그걸로 충분한 답이 되었다. 


'아버지. 당신은 이자의 기억에조차 남지 못했습니다.'


그대로 손을 휘둘렀다. 

화속성의 영기가 스승의 내단을 태우기 시작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내단이 육신의 모든 영기를 응집했다.

자연스럽게 단약이 형성된다. 짙은 불꽃의 영기를 담은 영약이었다.


나는 충분히 기다렸다가 내단 단약을 씹어 삼켰다. 

꼴에 결단경 수도자라는 걸까. 먹어본 어떤 내단 단약보다 효력이 좋았다.

덕분에 막혀 있던 길이 순식간에 뚫렸다.


수선 100년차. 

나는 이례적인 속도로 결단경에 도달했다. 


*


결단경 이후부터는 수선의 속도가 느려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손수 영기를 인도하며 가르쳐 주는 스승이 없어졌으니까.


그러나 은혜로운 스승님은 사후에도 내게 도움을 주었다.

본인의 허접한 명성과 과분한 제자 자랑이 단약의 공급을 도운 덕분이었다.


'또 오는군.'


나는 화산 동부에 가부좌를 틀고 다가오는 수도자를 감지했다.

이번에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이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갓 승급한 결단경 수도자.

이 매력적인 미끼의 유혹을 참을 수 있는 이는 세상에 많지 않다.


'슬슬 모일 이들은 다 모인 건가.'


나는 적당히 때를 기다리다가, 수도자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할 때쯤 공법을 발동했다.


화산대멸진(火山大滅嗔). 


동부가 자리한 화산의 영맥 자체를 뒤틀어, 막대한 화기를 그대로 쏘아 보내는 공법.


통상적인 수도자라면 영맥의 준동에 몸이 터질 위험이 동반하지만.

천영근인 내게는 아무 부작용 없이 화산의 출력만을 부여하는 공법이었다.


'자. 내 단약이 되어라.'


나는 용암류에 휩쓸리는 수도자들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수십년. 나는 영맥과 공법에 익숙해졌으며.

더 시간이 지난 뒤로는 스스로 영맥을 끌고 다니며 수도자 사냥을 시작했다.


결단경 승급 이후 150년 뒤. 

나는 마침내 원영경에 도달했다. 


비승의 때가 가까워졌다.


*


사실 이 세상은 수도에 그리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영석도 영기도 부족하다. 유의미한 성취를 얻기 위해서는 같은 수도자를 단약 삼아 고아 먹어야 한다.


다행히 나는 천영근과 화속성 공법 덕에 내단을 단약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그조차 슬슬 한계를 느끼는 중이었다.


'더 많은 영기가 필요하다. 결국 비승은 필수적이야.'


나는 수도자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비승 장소에 찾아갔다.

사막의 한복판. 

수도자의 눈으로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이 뚫린 검은 구멍.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인력이 몸을 잡아 끌었다.

저런 곳을 통과해야 한다니. 약간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였으나.

망설임은 짧았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라면 목숨 정도야 걸 수 있다.


'물론. 수선을 위해서라면 목숨 정도야.'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동시에, 딱히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왼손으로 가슴팍의 책 한 권을 어루만졌다.


수백의 세월을 거치며 표지조차 너덜너덜해진 서책이 사각거렸다.

차라리 종이 뭉치라는 명칭이 더 적합할 뭉텅이.

나는 뒤늦게 이것이 아버지의 유산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오래도 가지고 다녔군.'


종이 뭉치를 만진다고 하여 애틋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그런 인간의 정을 초월한 것이 원영경 수사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 스스로 완전하거늘 타인을 탐할 이유가 없다. 


하여 순간 서책을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나.

어째서인지 조금은 꺼리낌이 느껴졌다.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혹은 알고 싶지 않았거나. 

나는 그대로 서책을 품 안에 간직했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꽤 길어진 상념 덕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의지를 바로한 나는 검은 구멍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졌다.


비승한 이후의 선계가 어떤 모습일지 그리며 부유감을 만끽했다.

축지법을 사용할 때와는 또 다른 인력이 날 저 아래로 잡아 끌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수도 생활을 합친 것만큼 길면서도, 동시에 눈 깜빡이는 것처럼 짧은 시간이 지났을 때.


'이곳이 선계인가.'


나는 완벽하게 다른 세상에 도달해 있었다.


영기가 농밀하다. 기체가 아닌 액체가 몸을 감싸고 있는 듯하다. 

어떤 경지 이상부터는 단약을 먹어야만 쌓이던 영기가 이곳에서는 매 호흡마다 축적되었다.


그 농도 탓일까. 환경 또한 크게 달랐다.

모든 것이 거대했다. 강력했다. 수도자의 감각으로 느끼길, 태양의 힘만 해도 수백 배는 강한 듯했다.


다만 짜릿한 태양조차 쉬이 땅에 닿지 못했다.

빼곡한 원시의 수목이 영역을 다투듯 뻗은 잎 덕분이었다. 

수 겹의 잎에 산란된 탓에 태양빛이 언뜻 녹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인계에 비할 수 없는 놀라움. 신비감.

그러나 압도적인 경외감 속에서도 나는 어떤 이질감을 느꼈다.


'...왜 아무도 없지?'


확실히 선계의 풍경은 놀라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분명 있어야 할 게' 존재하지 않았다.


먼저 비승한 수도자들. 원래부터 선계에서 태어났을 인간들.

고위 수도자들의 의식 영역과 권능을 생각하면, 여기까지 문명이 닿아 있어야 마땅할 터인데.


어째서인지. 

선계에서는 어떤 문명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지. 숨어서 날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나는 반사적으로 의식 영역을 키웠다.

기본적으로 감지되던 감각을 뛰어 너머, 용맥의 힘을 빌려 인지를 넓힌다.

분명 어딘가에 있을 선인(先人)들을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작 넓힌 의식 영역에 감지된 것은.

도무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거체(巨體)와. 

그보다 더욱 압도적인 기운을 지닌 무언가였으니.


내가 행한 감지를 느끼고 역으로 추적한 그것. 


"크아아아아!"


선계 공룡이 울부짓었다.


*


그것이 포효함과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수선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감각.


피식자의 공포.


그것이, 직접 대면한 것도 아니고 고작 감지한 것으로 잔뜩 차올랐다.


'...무언가. 무언가 잘못되었다.'


공룡이라는 존재는 알고 있다. 

종종 마도 수선자들이 뼈를 일으켜 자신의 수족으로 쓰곤 했다.

범인들 사이에서는 그 소문이 퍼져 용(龍)이라는 환상의 동물로 전해졌다지.


허나 그렇게 본 공룡은 결코 저런 존재가 아니었다.


결코 저런, 존재만으로 척수를 차갑게 식히는 괴물이 아니었단 말이다...!


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축지법으로 땅을 접어 달리며 공룡에게서 멀어졌다.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짙은 영기 덕에 내 축지법의 효율은 좋아졌으나, 기본적으로 체격의 차이부터가 막대했다.

내가 한 걸음을 걸어 1리를 간신히 뛰어넘을 때 공룡은 능히 4리를 뛰어넘었다.


'제기랄, 어차피 도망은 불가능하다. 맞서야 해!'


스스로 다짐하며 몸을 돌렸다.

곧장 용맥을 분출시키며 익숙한 용암류를 쏟아냈다.

뭉근한 불의 진액이 공룡의 사방을 태웠다.


그리고.


"크아아아아!"


수도자 공룡이 울부짓었다.


동시에 작달만한 앞발을 능숙하게 허공에 휘둘렀다.

얼핏 우스워 보이는 헛손질.

허나 영기의 흐름을 목도한 나는 차마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공법을... 소멸시키다니.'


화산대멸진. 

전력으로 펼친 파괴 특화의 전투 공법이.

몇 번의 손짓과 한 번의 울부짖음으로 완벽히 파훼된다.


울컥-


공법의 파괴로 인해 역류된 영기가 몸 안에서 뛰놀았다. 

나는 검은 피를 한 사발 토하며 생각했다. 


'크윽... 단순히 신체만 괴물인 게 아니야. 분명한 수선의 지식을 알고 있다!'


말도 없이 달려들기에 당연히 무식한 괴물일 거라 여겼거늘.

우습게도 저 공룡의 경지는 나보다 깊었던 것이다.


'차이가 너무 극명해.'


숙련된 수도자들은 한 수만으로 서로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나도 그렇다. 한 수. 놈의 선도(仙道)를 본 순간.

놈의 내력과 내공이 어렴풋이 전해졌다.


'인간이 탄생하기도 전 태어나,지금까지 영기를 비축한 수선자...'


선계에는 영력이 넘쳐난다.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경지를 높일 정도의 농밀한 영력이 가득하다.

그런 세상에서 괴물이 태어났다면. 

그리고 기나긴 수명 동안 끝없이 호흡하며 경지를 쌓았다면.


'...인간의 전성기가 올 수 있을 리 없지.'


선인(先人)들 또한 괴물의 앞에서 잡아먹혔을 터.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비승한 선계. 

그곳의 주인은 인류가 아니었다. 


*


도망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거리가 줄어들수록 포효가 가까워졌다. 포효가 이어질수록 몸이 굳어갔다.


포식자에 대한 공포를 원류로 삼은 선도 공법의 일종.

안 그래도 좁혀지던 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0에 수렴했다. 


"크르르..."


완벽히 멈춰버린 내 몸을 앞두고 공룡이 그르렁거렸다.

거대 파충류의 말 따위 알지 못하지만, 분명 만족과 허기가 깃든 말이었으리라.

놈은 잠시 날 바라보며 침을 흘리다가 턱을 내질렀다.


수각류의 거대하고도 날카로운 이빨이 쇄도한다.

들숨으로 날 잡아 올리며. 우렁찬 포효로 마비를 잇는다. 


죽음을 앞둔 탓일까. 

다가오는 공룡의 이빨과 목구멍이 이상하리만치 천천히 보였다.

나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꼈다. 억지로. 무엇이라도 하라며 몸을 재촉했다. 


그 순간. 


-사각


낡은 책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공포에 신음하던 몸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지와는 무관한 반사 반응. 스스로도 놀라운 와중, 근육 기억이니 어쩌니 하는 생각들이 스쳤다. 


그리고 저절로 움직인 나의 몸은.

가장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움직임을 취하기 시작한다.


'...이건.'


다리를 뻗고. 지지하여. 반동을 허리로. 균형을 맞추고. 탄력을 어깨로 올려 보내. 그대로 휘두르는.


수백 년의 수선에서 취한 가부좌도, 수백의 수사를 죽인 화산대멸진도 아닌.


고작 수 년. 수도자의 인생에서 1푼을 간신히 넘을 짧은 시간 동안 겪였던.  


아버지와 함께 달빛 아래에서 수련했던. 


월도신공의 초식.


추억이, 어쩌면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저 내리쬐는 햇살이 은은한 달빛으로 흔들리고.

풀 내음은 달큰한 주향(酒香)으로 변모한 채.


바람과 태극을 본뜬 이화접목의 수를 실행한다.


---사각


낡은 책장. 아니,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유산이 바스라졌다.

수백 년 묵은 서책의 각 장이 새털구름처럼 흩날렸다.


바람이 그친 것은 접목의 수가 끝난 뒤였다.

잦아든 서책의 구름 너머. 머리에 땅을 박고 기절한 공룡의 모습이 보였다. 


"...!"


괴물은 죽지 않았다. 그저 예상치 못한 수에 당황하여 기절했을 뿐이다.

내 공력으로는 저 거친 피부를 뚫지 못하니. 여기서 숨을 끊을 수도 없겠지.

남은 길은 추하게 꼬리 내리고 도망치는 것 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속에는 새로운 색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수선 앞에 무공은 무의미하다 생각했다. 자연과 이치를 다루는 영역에서 몸의 묘리는 뒤떨어졌다고 업신여겼다. 


아버지를 죽인 수선자의 제자가 된 것도.

다른 수선자를 단약으로 갈아 먹은 것도.

더없이 충실히 수선의 방식에 임했던 것도.


모두. 무공이 무의미하리라는 강박 때문이었다. 


허나 어찌 모르고 있었던가.


무(武)의 본질은 극복.

자신보다 강한 적에게 맞서 싸우기 위한 날카로운 창칼이었음을.


'...틀리지 않으셨던 겁니까.'


그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운이, 약간의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다.

무(武)는 극복할 수 있다. 


의지를 먹물 삼고, 검을 붓 삼아, 세상이란 도화지에 그려낸다면. 

괴물의 몸과 선계의 시간이 없이도 뜻을 관철할 수 있을 터.


공룡 수도자가 판치는 원시의 선계(仙界)에서.

나는 비로소.

무(武)의 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


이후 해야 할 일로-


렙터 등 약한 공룡부터 찬찬히 공략.

원시 부족처럼 숨어 사는 원주민들에게 무공 전수. 당연히 똑똑하고 예쁜 히로인에게 '특별' 수업

월도문 선계 지부 개설.

(중요) 익룡을 길들여 날탈것으로 활용. 

하계로 내려가 아버지 유산 탐색

다른 선계에서 공룡 깽판

...

..

.

등등이 있지만 여백이 부족하여 적지 않겠다!




선협과 무협을 어떻게 섞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투명 드래곤 급 티라노'에서 영감을 받음. 

귀신이 되기 위해서는 공룡 귀신과 싸워 이겨야 하듯.

고고한 수도자가 무공을 쓰려면 티라노 도우 정도는 나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