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짐승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뭘."



 그 말을 들은 승려 정유가 되물었다.



 "뭐라 하셨소?"


 "짐승 냄새가 이리 나는데 짐승을 잡지도 못하고 헤매고만 있으니 답답해서 그럽디다~"



 정유가 그 말을 한 거지에게 더 캐물으려던 찰나에 제남 이가의 주인, 이지신이 만류했다.



 "거, 며칠 전부터 집 앞에 죽치고 있던 거지인데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저희 집에 짐승이 있니 어쩌니 하더군요."


 "허어.."



 정유는 그 말에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도, 거지의 기도가 범상치않아 거지의 말을 뇌리에 새겨넣었다.



 이가에 짐승이 있다?


 제남 이가는 제남 굴지의 명문가 중 하나로, 수많은 고위 무관들을 배출한 무가였다. 대단한 세력과 무력은 그간 이가를 제남제일가문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던가. 영원할 것만 같던 제남 이가의 위세를 해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가문에 퍼지기 시작한 갑작스러운 병이었다.


 소가주 이진철의 의문스러운 와병. 그 뒤를 이은 것은 둘째 며느리 진아련의 와병. 그 뿐만이 아니었다. 총관, 시녀 둘, 둘째 아들, 태상 가주, 가주의 첫째 부인까지...


 원인모를 질병에 시름시름 앓게 되자 사람들은 제남 이가를 멀리 했고, 가문의 힘은 쇠약해져갔다.


 가주 이지신은 병을 고치려 백방으로 치료법을 강구했지만, 저 사천의 당가도 병의 정체조차 알지 못하자 고명한 승려와 도사들을 부른 것이었다.



 의식을 잃은 제 아들의 맥을 짚는 정유를 보며 이지신이 물었다.



 "그래서..정유 대사께선 어찌 보십니까?"


 "글쎄, 제가 의학에 정통하지는 않아 잘 알지는 못하나...내가기공을 배운 수련자로서 보자면 온몸의 기가 꼬여있습니다."


 "예, 당가의 가주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러나.."



 그뿐이었다. 병의 치료법은 커녕 원인도 규명 못하고 손을 들었으니..


 정유가 조심스레 물었다.



 "집을 거쳐간 사람들이 멀쩡하니 일반적인 돌림병은 아니고, 핏줄이 아닌 식구들도 걸렸으니 유전병도 아니고, 혹시 병에 걸린 자들만의 공통점같은 것이 있습니까?"



 이지신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글쎄요. 제가 아는 선에서는 없습니다."


 "허어.."


 "당가도 두 손을 들었으니 어쩌겠습니까. 대사께서는 무림인이시고 또 승려이시니 당분간 머물면서 문제를 찾아주십시오."



 그러나 그리 말하는 이 가주의 표정은 반쯤 포기한 듯하였다.

 세간에 명망이 있는 정유를 불러왔으나,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는 수준일 뿐. 이지신 그보다 대단한 무림인이자 약과 독에 정통한 사천의 당가주조차 감을 잡지 못했으니 종교에 기대는 것이었다.



 정유는 이진철이 누워있는 방에서 걸어나와 제남 이가의 넓은 장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던가. 그 말처럼 장원은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지만,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정유는 기운을 주변으로 퍼뜨려 장원 전체를 훑어보았다.

 제남 이가는 무가였고, 가문의 구성원들 또한 그들의 가전무공을 익혔기에 정유의 기감에 잡히는 것은 꽤 있었다.


 그러나 정유가 찾아보는 것은 그런 정순한 기운들이 아니라...사이한 기운.


 일생을 수행에 바치는 구파 출신들이 아니라면 제 아무리 당가의 가주조차 알 수 없는, 그런 것을 찾고 있었다.



 명상을 하며 집안 곳곳을 살피던 정유는 한 순간 자신의 기감에 걸리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 미세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위장한 거대한 기운. 


 그것은 인간의 기운이 아니다.


 그 순간 그것은 자신의 기를 갈무리하며 정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강렬하게, 자신을 알아챈 자를 증오하면서..



 "으아아악!"



 정유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엎어졌다.

 그런 정유를 바라보면서, 어느 새인가 장원 안으로 들어온 일전의 거지가 말했다.



 "으음, 내가 기운을 대신 흡수하지 않았으면 너는 죽었다."



 머리를 부여잡은 정유가 끅끅거리며 거지에게 물었다.



 "고, 고인께선 누구십니까? 처음부터 범상치 않다 여겼거늘..."


 "하하하, 그냥 거지다."


 "일반적인 무림인은 그런 기운을 느끼지 못할 터이니..혹 무당이나 화산의 도인이신지..?"


 "도인? 어찌 보면 그렇지. 그러나 무당이나 화산의 도사는 아니다. 

 나는 천축의 아나율 조사께 천안을 전수받고 용호산의 장천사로부터 서른 여섯 가지 천강수를 배웠다. 9999마리의 요괴들을 거두며 999년을 수련하여 99가지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제 원시천존과 석가불을 모시기까지 남은 것은 1마리의 요괴와 1년의 수련과 1가지 앎이로구나! 그러한 나는 이미 속세의 모든 이름을 버렸으니 그저 초부라고 부르게."



 정유는 자신을 그저 초부라 하는 자의 말을 전부 믿기는 어려웠으나, 당장 그의 몸에 서린 현기와 극도로 정순한 기운에 압도되었다.

 설령 진실이 아닐지라도, 그를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고수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이곳에는 제남 이가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오신 것인지..."


 "그렇다. 제남 이가에 웅크리고 질병을 뿌리는 요괴를 거두러 왔다. 기백 년은 묵은 도사이자 내가 등선하기 위한 마지막 요괴겠지."


 "고인의 내공이라면 아마 퇴치가 어렵지 않을 터. 어째서 바라만 보고 계신 겁니까?"



 몸을 추스린 정유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물었다.

 그 말에 장원을 둘러보던 초부가 답했다.



 "겁이 많은데 강한 놈이다. 오래 묵은 놈이야. 쉽지 않을 뿐더러 수틀리면 천 가지 둔갑으로 빠져나갈 것같아 계속 장원 밖에서 지켜만 봤지."



 초부는 정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자기를 눈치챈 너를 저주하려고 기운을 크게 드러냈다. 그 틈에 내가 장원으로 들어왔고, 이 요괴놈이 무엇으로 변신했는지 알아냈어."


 "하, 하하. 제 행동이 어떻게든 제남 이가에 도움이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래. 놈이 아직 장원 내 모든 사람의 기운을 빨아먹기 전이니 이가 입장에선 정말 다행이겠지. 나중에 보상이라도 받아내게."



 정유는 농담인가 싶어 웃으려 했지만, 더 없이 진지한 초부의 얼굴에 웃으려던 표정 그대로 멈췄다.

 아닌 말이 아니라 초월자에 근접한 자의 속내는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정유는 말을 돌리며 물었다.



 "아, 아무튼...제가 요괴를 잡는 것에 도와드릴 것이 있을지..."


 "그래. 내일 정오에 집안 사람들 모두를 부르게. 놈은 자네가 죽었다고 생각할테니 정오까지 몸을 드러내지는 말고, 가주를 통해 불러. 나는 내일 정오에 다시 오겠네."



 그리고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혼자 남은 정유는 자신이 방금 겪은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초월에 가까운 존재를 방금 마주한 것인가?


 혹은 집 안의 사기에 홀려 헛 것을 본 것인가?


 

 종잡을 수가 없었으나 정유 자신 또한 내가기공을 익힌 무림인. 초부라는 자를 믿는 자신의 감각을 믿고, 신법을 펼쳐 조용히 이 가주의 방으로 찾아가 말을 전했다.


 


 이튿날, 장원의 수련장에 제남 이가의 모든 구성원들이 모였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지신은 몸을 감춘 정유에게 물었다.



 "말씀해주신 대로 했는데...분명 이걸로 병을 잡을 수 있는 것이 맞습니까?"


 "...지금이 시각이 몇 시입니까?"


 "오 시...정오가 조금 뒤입니다."


 "그렇다면 정오까지 기다려주십시오. 그 때가 되면 병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지신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잡을 수도 있다...그 말만으로도 희망이 생기는 군요."



 정유는 그저 허허거렸다. 그 자신도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지금은 그저 믿을 수밖에.

 얼마나 기다렸을까, 거의 정오가 되었다 생각했을 때 누군가가 정유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때가 됐네."



 정유는 초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초부! 가주, 이리 와주십시오!"



 허둥지둥 달려와 어리둥절해하는 지신을 두고 단정한 옷을 입은 초부는 가문의 사람들 앞으로 나와 둘러보았다.



 "어디 보자...가장 강한 태양 아래서 몸을 숨긴 놈이 누구인가?"



 대략의 설명을 듣고 달려온 지신이 물었다.



 "아니 그러면...여기에 저희 식구로 위장한 자가 있다는 겁니까?!"


 "하하, 가주. 설마 그렇겠소?"


 "예?"



 지신과 정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자, 초부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래 사람의 기운을 빨아먹는 놈은 음기를 띄는 법. 양기가 가장 강한 정오에 쉽게 나오지 않겠지.  하물며 가문에 찾아온 승려를 저주해 죽인 다음날에 갑자기 모두를 부른다면 그 신중한 요괴가 함부로 몸을 보일까?"



 정유가 당황하며 말했다.



 "그 말은...여기에 없는 자가...!"



 지신이 하인들에게 소리쳐 물었다.



 "지금 여기 없는 자가 누군가?!"



 모두가 당황하는 가운데, 어린 하녀가 떨면서 말했다.



 "저..저 작은 마님이 오늘 몸이 안 좋으시다고..."


 "설아가? 설아는...또 다른 자는?!"



 그러나 이후 그 외에 거론되는 이름은 더 없었다.

 지신이 땀을 흘리며 초부에게 말했다.



 "설아는...제가 4년 전에 들인 첩인데...아마 이건 착오가..."


 "아니. 착오는 없소. 나는 어제 이미 요괴놈이 누구로 둔갑했는지 알아냈고, 이건 그저 확인 절차이자...놈이 방심하게 하고, 또 다른 자로 쉬이 변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말하자면 만천과해라는 것이지."



 정유가 물었다.



 "허면, 이제 어찌합니까?"


 "어찌하긴, 잡아야하지 않겠나? 이미 밤새 장원 전체에 진을 쳐두었으니 조금만 손을 보면.."



 초부가 손바닥만한 돌멩이를 둘째 부인의 방 방향으로 휙 던지자, 곧 진이 일렁이며 새된 외마디 비명이 새어나왔다.



 "꺄아악!"



 지신이 서둘러 물었다.



 "대인, 설아가 정말 병의 원인인 그..요괴가 맞습니까? 아무래도 조금.."



 지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둘째 부인의 방이 있는 건물의 천장이 터지듯이 부숴지며 한 인영이 건물 위에 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초부가 말했다.



 "뭐..요괴가 아니면 부인이 좀 과격한 타입인가?"



 건물 위에 서서 모두를 내려보는 자,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외모의 둘째 부인이 눈을 번쩍 뜨고 말했다.



 "안타깝구나..안타까워..."



 초부가 웃으며 소리쳤다.



 "이놈, 어쩐지 개 냄새가 난다 했더니 여우였구나! 일개 여우가 얼마나 인간을 먹었으면 이 요기를 쌓았을고?"



 둘째 부인은 초부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9999명의 기운을 빨아먹으며 999년을 수련했다. 99가지 요술을 익혔으니, 신묘한 도를 깨우쳐 신선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거늘..."


 "한낱 여우가 어찌 삼청의 뜻을 알리오?"


 "하찮은 재주를 익힌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겠는가? 아까울 따름이다!"



 그러더니 둘째 부인은 목을 그르륵거리더니 입에서 삼매진화를 내뿜었다.

 손을 휘둘러 삼매화의 기운을 흩어버린 초부는 발을 딛어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갔다.



 "어디 여우의 실력을 볼까? 이가의 사람들은 장원 밖으로 나가시게. 목숨이 아쉽다면 말이야."



 구름을 탄 초부가 손에 지전 여러 장을 들고 불을 붙혀 날리니, 곧 모두 벼락이 되어 둘째 부인에게 날아갔다.

 그러나 벼락은 둘째 부인이 있던 자리를 맞추었을 뿐. 불타는 그 자리에는 누구도 없었다.



 "가소롭다! 소요산 성성이를 마흔 마리하고도 네 마리 잡아먹은 날 네놈따위가 따라잡을 듯 싶더냐!"



 순식간에 도약해 초부의 앞까지 온 둘째 부인이 날카롭게 웃으며 뾰족한 손톱을 휘둘렀다.

 허리춤에서 보도를 빼든 초부가 손톱을 칼등으로 막았다. 그리고 발을 굴러 구름을 타 진의 팔방 중 풍문인 손괘로 움직이니, 초부의 뜻대로 칼바람이 부인의 온몸을 난도질하였다.


  킥킥 웃은 둘째 부인이 소리쳤다.



  "간지럽다 도사야! 설마 이정도로 날 죽이려한 것은 아닐테고, 아녀자의 속살이 보고 싶던 거냐? 그렇다면 자, 봐라!"



  그리고는 제 스스로 옷을 찢어발기고 나신이 되더니 공중제비를 돌아 본모습을 드러내었다.


  백색 꼬리에 긴 귀를 가진 거대한 여우 요괴.


 초부가 침음을 내었다.



 "사산의 시랑이었군..."


 "이제야 아느냐!"



 시랑은 오른발을 들어 음산한 바람을 부르고 왼발을 뻗어 차가운 안개를 부르니, 그 입은 진경을 외워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을 부르..



 "그렇게 둘까?"



 초부가 지전들을 불태워 기고재를 지내자, 망령들이 다시 흩어졌다.

 이를 아득 깨문 시랑은 양발에 서린 귀기를 받아들여 둔갑하니 머리가 셋 달린 사자였다.


 세 머리 사자의 머리가 하나 하나 세 가지 괴이한 기운을 뿜으니 기세가 파죽지세라, 장원을 크게 부수며 초부를 쫓자 초부는 품에서 손바닥만한 비늘을 꺼내 중얼거렸다.



 "용은 이에서 나니 이는 곧 불이요, 이는 곧 양이라. 정오에 남성이 손문에서 명하니, 바람은 용을 돕고 불을 도와 파사의 극양을 이루라!"



 그러자 용의 비늘에서 귀신을 잡는 불이 치솟아 괴이한 기운들을 잡고 사자의 갈기를 그을렸다.


 간담이 서늘해진 시랑은 몸을 흔들어 다시 둔갑했는데, 이번에는 일곱 날개의 공작으로 변해 거대한 바람을 일으켜 불을 잡고 날아올랐다.



 "신선이 되기 위해 999년을 수련했는데 여기서 인간에게 발목이 잡힐 줄이야..아니, 나는 반드시 신선이 될 것이다!"



 시랑이 초부에게 달려들자 초부가 사자후를 질렀다.



 "인간을 해쳐 요선이 되는 것이 삼청칠불의 도리인가?!"



 그리고는 마가라룡으로 둔갑해 거대한 입으로 물을 폭포처럼 쏟아내니 칠익공작으로 둔갑한 시랑은 깃털이 젖어 견뎌낼 겨를이 없었다.

 공작의 둔갑을 풀고 둘째 부인의 모습으로 변한 시랑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대인! 이 미물이 대인을 못 알아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에 초부도 둔갑을 풀고 가만히 바라보니, 눈치를 살피던 시랑이 조심히 말했다.



 "소녀는 일평생 원시천존과 석가불의 도를 흠모했으나, 타고난 천성을 버리지 못해 악행을 했으니 이 죄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다만 이렇게 대인을 만나 죄를 깨우쳤으니, 구명해주신다면 부처께 귀의하여 만민 구제에 힘쓰겠습니다!"



 초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여우가 죽을 때가 되면 혀가 길어진다더니 과연 그렇다!"


 "대인!"



 애원하는 시랑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드러날 때, 정유가 초부의 뒤에서 나타나 말했다.



 "소리가 나지 않아 들어왔는데...그 여우 요괴를 잡으셨군요!"



 초부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냥 여우가 아니고, 들어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산에 사는 시랑이라는 놈이네. 과연 소문처럼 대단하더군."


 "그렇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뭘?"



 초부의 되물음에 정유가 당황하여 물었다.



 "아 저 요괴 말입니다. 보아하니 굴복한 것같은데..?"



 초부가 파안대소하며 말했다.



 "굴복? 하하하하!"



 그러더니 자신의 보도를 휘둘러, 납작 엎드린 채로 눈을 굴리는 시랑을 베니 시랑이 둔갑한 인간의 형체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이게 무슨..."


 "뭐겠나, 환영을 만들어두고 자신은 도망간 거지."


 "그럼 큰 일 아닙니까!? 이, 일단 나가서 제남 이가 사람들에게 말하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그럴 필요는 없어."



 잠시 두리번거린 초부는 말을 이었다.



 "놈의 힘은 나와 동급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겼을까?"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을...그야 우둔한 미물따위가 인간을 어찌 이기겠습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다만 난 석달 동안 장원 주변을 서성였고, 보름간 장원 주변에 거대한 진법을 설치했다. 그리고 놈이 힘을 크게 드러낸 틈에 들어와 양기가 최고조에 달하는 정오에 기습을 했지.

 999년 묵은 요괴라 분명 이름난 무구도 가지고 있었을 터인데 그것으로 싸우지 않은 걸 보면 기습이 잘 먹혔다."



 듣고보니 대단한 준비라, 정유도 감탄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암도진창이라! 과연 그 계책이 옛날 회음후 한신과 견주겠습니다!"


 "내가 공치사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너무 낙심하지 말라는 거네."


 "예?"


 "일승일패는 병가지상사라, 그냥 네가 운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검을 휘둘러 정유, 아니 정유로 둔갑한 시랑을 베니, 둔갑술이 풀리며 거대한 여우 요괴의 모습이 드러났다.



 "끄윽..끅...어떻게..."


 "아나율께 천안을 전수받은 나를 햇빛 아래에서 속이기에는 1년이 모자랐구나!"


 "나...나도...신선이..."



 초부는 부들거리는 시랑을 손으로 잡아 허리춤의 호리병에 넣고 말했다.



 "짐승이 오래 묵어 신통력을 지녔으나, 사기를 받아들여 요괴가 된 것은 도리를 알지 못한 탓이도다. 그러나 그 또한 순리이니 쉬어라."



 잠시 중얼거리고 종이에 기를 불어넣어 호리병에 붙이니, 종이에 '급급여율령봉칙'이 자연히 새겨져 호리병을 봉인했다.


 할 일을 마치고 장원 밖으로 나온 초부는 진짜 정유와 제남 이가의 식솔들에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전했다.

 성한 곳이 없이 무너진 장원을 보며 황망해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정유가 초부에게 물었다.



 "진실로 대단한 신통력이십니다.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일만 마리의 요괴를 잡았으나 아직 일 년의 수행과 하나의 깨달음이 필요하다. 다시 강호를 주유하며 깨달음을 얻어야겠지."


 "허어..."



 잠시 땅바닥을 바라보던 정유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정말 무시무시한 요괴였습니다. 세간에선 뛰어난 무승이라 불리는 저도 놈의 기를 느꼈을 때는 죽었구나 싶었지요. 만약 대인이 없었다면 제남 이가나 저나 몰살일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래서?"


 "새삼스럽지만...오랜만에 무력감을 느껴봅니다. 천 년을 수련한 존재들의 다툼 속에서 저같은 필부는 어쩌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가령 새외에서 오랜 세월 수련한, 마치 신같은 존재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중원에 온다면..."



 초부는 그 말이 퍽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해 슬쩍 웃으며 말했다.



 "말하자면 석가불을 위협한 천마처럼 말인가? 뭐 그런 일이 있을 것같지는 않지만...하지만 그런 일이 있는다면 뭉친다던가 해야하지 않나?"


 "뭉친다는 것은...?"


 "모두가 나와 같이 999년의 수련을 할 수는 없지. 모두가 여우처럼 교활할 수도 없고, 범처럼 강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은 뭉쳐서 강해지는 것 아닌가."


 "집단을 만들라는 거군요.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비단 여우 요괴같은 것들을 막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사파의 세력들을 막고 질서를...이건 스승님께 말씀드려서 구대 문파를 소집..."



 정유가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고개를 저은 초부는 정유에게 작별을 고하며 걸어갔다.



 "그래, 그래. 짧은 시간이지만 재밌었네. 아마 다시 보지는 못하겠지만...세 송이 꽃이 머리 위에 모인다면(삼화취정) 자네 꿈 속에 나와주지."



 약간 건들거리며 걸어가던 초부는 어느 순간 발을 딛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랐다. 


 구름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니 지나온 장원이 한 점이라, 육합사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어디 보자...이제 어디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