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타도하기 위해 모인 용사 파티.

그들이- 아니, 혼자 남은 그가 마왕을 타도하기 위해 마경의 최심부에 이르러 본 것은 

마왕성은커녕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터였다.


마경.

그 이름과는 달리 그 곳은 마족의 온상지도, 모든 악의 근원지도 아닌-

단지 아직 개척되지 않아 험준한 환경과 강력한 괴물들이 우글거리던 미답지였을 뿐.


수많은 피와 절망, 동료들의 희생 끝에 용사가 대적하게 될 최후의 숙적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기적적인 승리도, 혹은 운명적인 패배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결말.


함께 온 모든 동료를 잃었기에 홀로 이 마경을 다시 돌파할 수도 없고, 그저 발버둥치다가 끝내 고향에 닿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져 괴물들의 한 끼 식사가 되는 것만이

마왕을 물리치고 세계를 구한다는 위대하고 허황된 여정의 끝.


"하, 하하하하...."


비로소 용사는 깨달았다.

아니, 처음부터 짐작하고는 있었다. 국왕이, 그의 아버지의 지독하고도 추악한 속내를.

단지 끝까지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태자인 그가 사라지면, 왕은 첩과의 사이에서 둔 천한 핏줄의 서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마법의 대중화를 꿈꾸던 현자는 죽었기에, 마법은 여전히 탑의 극소수만 누릴 수 있는 폐쇄적인 특권으로 남을 것이다.


수많은 귀족들의 재산을 털어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던 도적이 죽었기에, 부패한 권력자들은 더 이상 두려움 없이 수탈한 재물들을 창고에 쌓아둘 수 있을 것이다.


선망과 존경을 받는 성녀가 죽었기에, 변혁을 꿈꾸던 종교계는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천상의 신이 아닌 지상의 신들을 위해 노래하는 대변자로 남을 것이다.


용사 파티의 이름은 황금 쟁반 위에 반듯이 놓여 빛나고,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그들의 육체가 썩어 뼛조각 하나조차도 남지 않고 풍화될 때에도


지독스런 그의 아버지는 희생시킨 아들의 이름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다른 이들에게도 희생을 강요할 터였다.


분노한다. 분노한다. 하지만 용사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그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더 싸울 수는 있으나, 마경을 벗어날 수는 없다. 벌써부터 그의 기척을 느낀 마물들이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어째서 싸워야 하는가? 자문하면서도 용사는 어느새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그는 일국의 왕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제일가는 장수였기에, 하찮은 마물들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검이 번뜩일 때마다 마물들의 목이 추수하듯 썰려 나가고,


마지막 마물의 목을 베기 전, 용사는 다시금 자문했다.


'왜 싸워야 하는가?'


그리고, 그가 자신의 마음 안에서 끝내 찾지 못한 해답은 바깥에서 들려왔다.


"키익. 사, 살려..."


"마물이 말을?"


용사는 제게 비는 마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마물 중에는 종종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개체가 나타난다고. 용사 파티가 지긋지긋하게 마물과 싸워대면서도 그런 존재를 만나보지 못한 건, 언제나 용사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놈들의 목을 베어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사람에 준하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채 벌벌 떠는 마물을 바라보며 용사는 더 이상 자문하지 않았다.


부패한 왕국, 썩어빠진 왕. 본래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와 그 영광과 위업으로 나라를 갈아엎으려는 그들의 계획은 이미 좌절되었다.


허나 그 의지를 이어받은 자는 남았다. 용사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꼼꼼하고 신중하게.


정말로 '성'이 들어앉아도 끄덕없을 드넓고 텅 빈 공터, 길들이고 훈련시키면 인간 병사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들보다 더욱 흉포하고 강인할 마물들...


만일 그들 사이에 어떠한 구심점이 나타난다면, 그들을 이끌고 다스리며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마물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킨다면.


그들이 단순히 지성 없는 괴물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군집하는 하나의 족속이 된다면.

마물이 아닌 마족을 이끄는 마왕은, 인간의 왕이 두려워했던 대로 세계 전체를 위협할 재앙이 되리라.


"그렇다면.....내가 마왕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