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여기 부추 한 접시 내오거라."


아무리 잘 쳐줘도 스무살 남짓해보이는 남자가 점소이에게 어린 아이를 부르듯 말했다.

점소이는 아무리 봐도 자신의 또래 같아 보이는 남자를 잠깐 이상한 눈으로 봤다가 곧 주방으로 들어가 주문을 전달했다.


'하계도 많이 변했구나.'


주문을 전달한 점소이가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는 모습을 보던 남자는 공력을 이용해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데워 입으로 가져갔다.


"술은 안 시키나?"


남자가 차고 있던 귀걸이에서 작은 호랑이 같은 형태가 나와 물었다.

비록 그 크기가 사람 손바닥만하다고는 해도, 허공을 터벅터벅 걸어다니는 푸른색 호랑이에게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세어 나오고 있었다.


'별로. 하계의 술은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남자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기령(器靈)에게 대답했다.


"그것 참 아쉽군. 오랜만에 하계의 술을 마셔보나 했더니."


'아쉬워 할 것 없네. 보나마나 네가 마셔본 가장 맛 없는 술보다도 더 맛이 없을 테니.'


"그렇게까지 말하니 오히려 더 마음이 생기는군. 한 잔만 시키면 안 되나?"


청호(靑虎)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주방을 바라보았으나, 남자는 말없이 차만 홀짝였다.

남자의 단호함에 호랑이는 아쉽다는 듯 혀로 입 주변을 한 번 닦고 탁자의 한 쪽으로 걸어가 털썩 누웠다.


"음식 나왔습니다."


청호가 자리잡음과 동시에 점소이가 김이 솟아오르는 접시를 들고 온 점소이가 남자의 앞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릇을 내려놓은 점소이는 청호가 누워있는 부분을 보며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에게는 영력이 없었기에 기령을 볼 수 없었다.


"응?"


한편, 잔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집어든 남자가 음식을 보고 의아해하며 점소이에게 물었다.


"아가야, 이게 무엇이더냐?"


"네? 부추볶음입니다만..."


"볶음이라고? 부추를 기름에 볶았단 말이냐?"


남자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름기로 반짝거리는 부추와 돼지고기를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기름에 녹은 부추의 향기를 맡던 남자는 요리의 일부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으음, 그렇군... 이런 맛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오물오물 맛을 즐기던 남자는 그것을 삼키고나서 점소이를 보았다.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지만 그럭저럭 괜찮구나.

보통 부추라 함은 뜨거운물에 데쳐서 소금에 버무려 나오기 마련이거늘, 돼지고기와 함께 볶아 새로운 요리가 되었어.

이곳 주인장이 생각해낸 요리더냐?"


"예? 아뇨, 부추볶음은 어딜 가도 드실 수 있는 요리입니다."


점소이는 적잖이 당황해 하면서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답변했다.

그 흔한 부추볶음을 처음 먹어보는, 한 눈에 봐도 귀공자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잘생긴 청년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것 참, 하계에 오랜만에 내려왔다곤 해도, 정말로 많이 변했나 보구나.

그래, 알겠다. 이만 가보거라."


"네, 어르신."


점소이는 물러나라는 말을 듣자마자 조심스럽고 빠르게 뒷걸음으로 물러나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점소이가 사라지자 구석에 누워있던 청호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로 다가왔다.


"흠, 냄새는 그럭저럭 합격이군. 어디 한 번..."


'어허. 어딜 주둥이를 들이미나.'


남자는 호랑이가 입을 벌려 음식을 먹으려 하는 것을 젓가락으로 막았다.


"거 참, 분명 내가 자네에게 기령으로서 힘이 되어주기로 약속했을 적에 술과 고기는 부족함 없이 주겠다고 했으면서, 먹는 걸로 자꾸 이렇게 야박하게 굴 건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짐승과 같은 음식을 먹을 순 없지.'


"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청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체가 빛나더니 짐승의 형태에서 사람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자, 이제 먹어도 되겠지?"


짧게 깎은 푸른색 머리카락에, 어딜 봐도 근육이 돋보이는 역삼각형의 근육질 몸매에 파란 호랑이 모피로 만든 가죽옷을 입은 모습이 된 정령이 젓가락을 옆으로 밀어내며 접시로 다가갔다.

자기 키의 반만한 고기를 양손으로 덥석 잡은 기령은 입을 크게 벌려 고기의 일부분을 베어 물었다.


"음! 역시 야취가 그대로 느껴지는 하계의 고기는 가끔가다 먹어주면 기가 막히단 말이지!"


온 몸이 기름 범벅이 되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와구와구 먹어치우는 청호의 옆으로 작은 형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오, 너도 먹어보게?"


청호는 자신의 옆에 온 하얀 여우에게 자신이 먹던 고기를 건넸다.

설호(雪狐)는 기쁜듯 꼬리를 흔들며 그 고기를 먹으려다가,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어올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남자와 청호가 여우를 바라보자, 설호는 뒤로 폴짝 뛰어올라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하, 너는 그냥 편하게 먹어도 된단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설호의 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자 청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나랑 대우가 너무 다른 거 아닌가?"


'어린애에게 질투를 하면 안 되지.'


둘이서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 청호가 나눠준 고기를 양손으로 잡아 베어먹은 설호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콜록, 콜록!"


"어이쿠."


청호는 자신의 주변으로 튀는 고기파편을 피해 몸을 급히 돌렸다.


"아직 너에게는 너무 이른 맛이었나보네."

'괜찮느냐?'


남자는 잔 속의 차를 둥근 물방울 모양으로 만들어 익숙치 않은 맛에 괴로워하는 설호에게 내밀었다.


"꿀꺽, 꿀꺽, 파하!"


거의 물방울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물을 마신 설호의 머리카락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흩날렸다.

얼굴과 머리카락에 있는 물기를 닦아낸 바람은 사라지지 않고 두 기령의 옆을 멤돌다가 여인의 형체로 변하였다.

옥령(玉𪋳)이 불러낸 바람은 그녀의 긴 연두색 머리카락을 한 번 들어올렸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것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자, 설아, 날 보렴."


어린 기령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싼 옥령은 설호의 얼굴이 깨끗함을 확인한 후 가볍게 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줬다.


"두 분, 하계를 즐기시는 건 좋지만, 설이는 아직 어린 기령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그리고 곧바로, 녹색 눈동자를 들어 청호와 남자를 쏘아보았다.


"아, 아니, 나는 그냥 설이가 관심을 가지길래, 이 참에 경험을..."

"그 정도 살았으면 교육과 장난은 구분할 줄 알아야죠."


괜히 변명을 하다가 한 소리 더 먹은 청호는 손에 품은 고기와 함께 조용히 옆으로 물러났다.


'미안하네.'


"하계의 요리 치고는 누기와 잡기를 상당히 잘 잡아냈네요.

그래도 하계에 처음 내려와 본 어린 기령에게는 충분히 독해요. 다음부터는 주의해 주세요."


남자가 그러겠노라며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객잔 안으로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왔다.

여자 하나에 남자 둘로 이루어진 그들은 셋 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또한, 미약하게나마 몸에 기가 흐르고 있었으니, 나름 무공을 익히는 무인들임이 분명했다.


"손님이 한 명 밖에 없다니. 오늘은 운이 좋습니다, 사저(師姐)."


"그래? 평소엔 손님이 많은가 봐?"


"어휴, 말도 마십시오. 줄 서서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제 막내 시절 가장 중요했던 업무가 미리 자리잡기였을 정도니까요."


"어쩐지, 그래서 네가 경공을 그리 빨리 익혔구나?"


그중에서도 여자가 제일 항렬이 높은지 다른 두 사람이 여자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하지만 어려워하지 않고 친근하게 말을 주고 받는 점에서 그들 사이에 그렇게 큰 격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점소이, 여기 죽엽청 한 병과 화권, 고추잡채, 오향장육 한 그릇씩 주게나."


"네,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주방으로 사라진 뒤, 여자가 살짝 웃었다.


"오늘은 꽤 쓰는데?"


"저도 여기서는 나름 큰 사형 소리 듣는 몸입니다. 사저를 대접하는 데 돈을 아낄 정도는 아니에요."


"후후, 소면 한 그릇 더 시키는 것도 눈치를 보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칠 년 전 아닙니까."


추억과 근황이 섞인 이야기를 주고 받는 무인들을 바라보던 남자가 자신의 신령을 불렀다.


'옥령.'


"네, 말씀하세요."


'유(兪) 수사를 기억하나?'


"유 수사라면..."


옥령은 말을 하다가 슬쩍 시선을 내려 설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시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간 설호는 옥령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며 친근감을 표하고 있었다.


'그래, 그 유 수사. 기억하고 있군.

저기 앉아 있는 저 아이, 유 수사와 닮지 않았나?'


남자가 슬쩍 눈짓으로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네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청호와 옥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기령이 기억하는 유 수사는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에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청회색 눈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그러나 저기에 앉아있는 여자는 흑단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옻을 칠한듯한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아도 유 수사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던 반면, 여자는 당찬 느낌이 훨씬 강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물어봤네.'


남자는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고 그릇에 남은 음식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유 수사가 누구예요?"


옥령의 옆에 붙어있던 백여우가 부추 볶음을 먹는 남자에게 물었다.


'한때 나와 백년가약을 나누었던 여자.'


"백년가약?"


'오래오래 같이 하자는 약속이란다.'


"아하. 근데 그 사람은 지금 어딨어요?"


'죽었지. 오래 전에.'


남자는 무덤덤하게 음식을 먹으며 대답했다.


"왜?"


'너를 지키려고.'


"나? 하지만, 나는 유 수사라는 사람을 모르는데."


"설호, 나중에 얘기해줄게요."


옥령이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가려는 어린 기령의 말을 잘라냈다.


"그래, 뭔가를 먹으면서 할만한 얘기는 아니지. 마시면서 하는 거면 모를까.

말 나온 김에 저 죽엽청을 좀 시켜보는 건 어떤가?

겸사겸사 설이에게도 하계의 술맛을 좀 알려주고.

어차피 술은 독할수록 좋은 것이니 하계의 것이더라도 상관 없잖나?"


청호가 옥령을 거들어 일부러 눈치 없는 발언을 하며 호쾌하게 고기를 뜯어먹었다.

옥령은 청호의 배려를 눈치채고 그에 맞추어 살짝 인상을 썼다.


"청호."


"크하하, 농담일세, 농담!"


그 순간, 무인들에게 음식을 내가기 전에 먼저 차를 가져온 점소이의 손이 미끄러졌다.


"앗!"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기에 단련된 무인들조차 반응할 수 없었고, 점소이의 손을 벗어난 물병은 그대로 여자의 몸 위로 떨어졌다.

물병에서 쏟아진 차가 여자의 옷을 적시면서 그 아래의 살색이 살짝 비추어 보였다.


"앗."

"사저! 괜찮으세요?"

"죄, 죄송합니다!"


점소이가 급히 사과하며 근처에 있던 수건을 가지고 왔지만, 남자 무인의 호통을 피할 순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이런 실수를 하는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적당히 화제를 바꿀만한 사건을 본 청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 녀석, 죽겠네."


"단약으로 만들기엔 조금도 영력이 없으니, 팔이나 다리를 자르는 선에서 끝날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어쨌든 곱게 넘어가긴 글렀지."


식당에서 일어난 소란을 듣고 주방에서 뛰쳐나온 객잔 주인은 상황을 빠르게 훑어보고 점소이의 옆에서 똑같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교육을 똑바로 시키지 못했습니다."


"그야 당연히...!"

"괜찮아요. 고개 드세요."


사제(師第)가 허리 숙여 사죄하는 두 사람에게 한 번 더 호통을 치기 전에,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여자의 말을 들은 객잔 주인은 즉시 허리를 펴고 한껏 죄송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교육해두겠습니다."


"정말로 괜찮아요. 차만 새로 가져다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주인은 여자의 자비에 감사함을 담아 고개를 숙이고 나서,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는 점소이를 데리고 다시 주방으로 되돌아갔다가 차를 가지고 나왔다.


"여기있습니다. 주문하신 음식도 최대한 빨리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직접 차를 가져온 주인은 다시 한번 직원의 실수에 대해 사과를 한 후에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끝? 감히 범인(凡人)이 수선자(修仙者)에게 폐를 끼쳤는데 피도 안 보고 끝난다고?"


사건이 쉽게 마무리된 것에 청호가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무인들은 이미 충분히 항의했다는 듯 옷이 젖은 여자를 걱정하는 말만 하고 점소이나 주인에게 더 따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피해자인 여자도 화를 내기는 커녕 웃으며 그들이 과거 비를 맞으며 무공을 연습하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


그런 여자의 모습을 옥령은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가 왜 여자의 외견에서 유 수사를 연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자의 행동은 유 수사를 떠올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수선자임에도 살생을 싫어하고, 약자에게 자비로우며, 조화를 신경쓰던 여인.

다른 이들은 어차피 천륜을 거스르는 수선자면서 그런걸 따지는 유 수사를 비웃었으나, 그녀는 그 비웃음조차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 비웃음을 받아들인다 하여 평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종문에 들어가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종문에 들어가지 못한 수사들이 그러하듯, 그녀 역시 높은 경지를 이루기 전에 죽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나 유 수사에게는 지금 옥령이 주인으로 섬기는 남자가 곁에 있었다.

유 수사와 같은 해,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남자는 모든 수선자와 영물들이 감탄할 정도로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였다.

그를 만난 수선자들은 그를 회유하여 자신의 종파로 끌어들이거나 혹은 살해하여 그 기운을 가져가려고 했다.

전자에 속한 이들은 유 수사를 같이 데려가는 조건으로 남자를 자신의 종파로 데려갈 수 있었다.

반대로, 후자를 택했던 이들은 남자가 지닌 기막힐 정도의 행운과 기연에 의해 모두 몰살당하여 유 수사의 영력을 높이는 단약이 되었고.

그들이 '남자와 유 수사'가 아니라 오직 '유 수사'의 영력을 높이는 재료가 된 이유는, 남자가 자신이 얻는 대다수의 영약을 유 수사에게 양보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남자가 유 수사를 버리고 자기 혼자서 등선의 길을 걸었다면 훨씬 빠르게 경지를 올라갈 수 있었겠으나, 남자는 항상 유 수사를 먼저 챙겼다.

자신의 저물대에 법보와 단약을 잔뜩 모아와서는 유 수사에게 억지로 떠넘겼고, 영기가 충만한 장소를 알게 되면 유 수사를 데려갔으며, 매일같이 쌍수를 하자며 졸라댔다.

유 수사는 그런 남자의 행동에 난처해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됨을 알았기에 언제나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행히 유 수사 역시 남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재능이 넘쳤기에 남자의 도움을 받아 차근차근 경지를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유 수사는 자신의 천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녀는 윤회를 벗어나 그 자신이 오롯이 하나의 세계가 되어 죽음을 초월하기 직전에 실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제대로 된 자아를 얻지도 못한 여우 신령 하나를 사이한 명기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그날 남자는 명기에 맞서 싸우다 죽은 유 수사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며 울부짖었으나, 이제는 전부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남자가 유 수사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어찌하여 자신이 백여우를 데리고 다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먼 옛날의 이야기.

최소한 옥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가야, 이름이 무엇이더냐?"


그렇기에 옥령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으로 젖은 옷을 닦는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에 크게 놀랐다.


"... 네?"


"이름을 물었느니라."


여자는 처음엔 자기보다 다섯 살은 어려보이는 남자가 아이를 대하듯 말하는 것에 어이없어 했으나, 곧이어 이정도로 눈에 띄는 외모의 남성을 여태까지 눈여겨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위화감에서 남자가 자신들이 범접할 수 없는 고수이며, 그동안 남자가 신경쓰이지 않았던 것은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임을 깨닫고 즉시 자세를 낮추었다.


"유 소운(昭澐)입니다."


"유 씨라... 혹시, 들 입(入) 부수에 달 월(月)이 들어가는 유(兪)자를 쓰느냐?"


"네,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두 사람의 문답을 듣고 있던 다른 두 무인은 뜬금없는 사태에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갑자기 나타난 이 사람은 누구냐?'


'모르겠습니다.'


'그럼 사저는 왜 이 남자에게 이리도 공손하게 대답하시는 거냐?'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는데.'


다른 두 무인은 시선에도 두지 않고 소운만 바라보던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이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를 어루만졌다.


'설아.'


"네?"


'너는 어떻느냐.'


"뭐가요?"


'이 아이 말이다. 네가 보기엔 어떻느냐?'


"좋은 냄새 나요."


어린 기령의 솔직한 대답에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나의 생각과, 너의 느낌과, 삶의 우연이 일치하니 이는 확실히 인연이겠구나.'


마음을 정한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따라오너라."


"예, 대선배님."


소운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의 몸 위에 얹어두었던 수건이 탁자 위로 툭 떨어졌다.

남자는 소운의 젖은 옷을 보고 물었다.


"왜 아직도 옷이 젖어 있느냐?"


"...? 죄송합니다, 대선배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력을 이용해 젖은 옷을 말리면 될텐데, 왜 아직 젖은 상태로 내버려 뒀냐고 묻는 거란다."


"부끄럽게도 아직 제가 그정도의 성취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내 미처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구나."


남자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따뜻한 바람이 소운의 몸을 휘감았다.


"자, 이제 가자꾸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소운의 옷에 남은 물기를 완벽하게 없앤 남자는 느긋한 걸음으로 객잔 밖을 향해 걸어갔다.

무인들은 남자가 한 일과 거기에 필요한 내공을 파악하느라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그를 쫓아갔다.


"무공을 펼쳐보거라."


거리로 나온 남자가 허겁지겁 자신을 따라 나온 소운에게 말했다.


"네? 여기서 말씀이십니까?"


소운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남자에게 되물었다.


"문제 될 게 있느냐?"


"제가 아직 수련이 부족하여, 이곳에서 초식을 펼쳤다가는 주변 사람들을 휘말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소운은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대답했다.

실제로 그들의 주변에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저녁 장사를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별 걸 다 신경쓰는구만. 적당히 무공을 펼치다보면 알아서들 도망갈텐데."


청호가 호랑이의 모습을 한 채 소운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말했다.


"애시당초 느껴지는 기를 보아하니 지나다니는 범인들을 전부 죽일 각오로 날뛰어도 백 명 정도나 죽일 수 있으련지 모르겠다만."


소운의 바로 옆에서 청호가 들으라는 듯 말했으나 소운은 그 말을 듣지 못하고 가만히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걱정말고 네가 아는 가장 강한 무공을 펼쳐보거라. 내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해줄 터이니."


"... 네, 알겠습니다."


소운은 잠시 고민했지만 남자의 말을 믿기로 하고 천천히 검을 뽑았다.

오랜 시간동안 노력과 정성이 스며든 검의 손잡이를 잡은 소운은 손목을 돌려 검끝이 하늘을 향하도록 자신의 앞에 가져갔다.

무덤을 지키는 석상처럼, 곧게 선 검끝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굳세게 자세를 취한 그녀가 두 눈을 감고 운기를 시작하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일주천을 마친 소운이 선언과 동시에 가슴의 앞에 있던 두 손을 오른쪽 관자놀이까지 들어올리며 칼날을 대지와 수평하게 맞추었다.

그와 동시에 오른발로 반원을 그리며 뒤로 뺀 그녀는 양 무릎을 굽혀 자세를 한껏 낮추어 가상의 상대를 노렸다.


소운의 초식은 미처 공기가 비켜날 틈도 없이 빠르게 검을 앞으로 찌름으로써 시작되었다.

어두운 방안으로 파고드는 빛줄기처럼 내질러진 검을 따라 발을 앞으로 옮긴 그녀는 튕기듯 손목을 들어 올렸다가 검을 한 번 더 사선으로 내리꽂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번의 찌르기를 마친 소운은 검을 왼편으로 거두어 상단을 막음과 동시에 왼발을 뒤로 크게 빼냈고, 다시 검을 살짝 앞으로 내밀어 상대를 견제하면서 오른발도 원래의 위치로 되돌렸다.


한 호흡에 기습적인 공격과 방어, 견제까지 이루어낸 소운의 검은 이후로도 쾌(快)의 기운을 품고 대기를 갈랐다.

그녀의 발은 부드럽게, 하지만 쉼없이 땅을 두드렸고, 그녀의 손은 매끄러운 강철과도 같이 허공에 그림자를 남겼다.

무인의 검무를 보고 발걸음을 멈춘 행인들의 눈이 쫓아가지 못할 속도로 빠르게 초식이 펼쳐졌으나, 소운의 호흡은 깊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다.


'대단해... 무림맹의 청이원(靑鯉院)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사저의 내공이 보통이 아님은 알고 있었지만, 만나지 못한 사이에 격차가 훨씬 더 벌어졌구나.'


여인의 몸으로 내뿜는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세에 소운의 두 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두 사람은 속으로 자신들이 앞으로 소운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수행을 해야 할지 어림잡으면서 두 눈에 내력을 집중하였다.


소운이 펼치는 검술은 점과 직선을 이루는 찌르기와 곡선과 면으로 이루어지는 방어가 주를 이루었다.

검을 휘둘러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다 싶으면, 그 곡선을 뚫고 나온 강렬함이 위협하고, 그 위협을 막아내면 이미 검은 저 멀리 도망쳐 있다.

상대가 강한 힘으로 밀어내려 하면 빈틈으로 빠르게 검을 밀어넣고, 빠른 속도로 쫓아내려 하면 유연하게 타고 넘어간다.

감각과 직관으로 만들어지는 흐름을 따라 민첩하게 보법을 펼쳐내 공격을 피하고, 이성과 관찰로 찾아낸 찰나의 순간에 반격을 행한다.

몸은 검술의 움직임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호흡과 기의 순환이 끊임없이 하나로 이어진다.


"하아앗!"


마지막 외침과 함께 섬광같은 찌르기로 검로(劍路)를 마무리 지은 소운이 숨을 고르며 천천히 검을 납도했다.


짝짝짝짝짝짝-

"와아아..."

"엄청난 걸 봤어."

"이게 무림인이구나."


검을 집어넣은 소운이 남자에게 허리 숙여 인사함과 동시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칭찬과 감탄을 쏟아냈다.

옷과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달라붙을 정도로 공력과 집중력을 담아 초식을 모두 선보인 소운의 얼굴에는 약간의 뿌듯함이 비쳐 보였다.


"..."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남자는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번잡하군요."


남자와 같은 감상을 공유하는 옥령이 소운의 무공에 박한 평가를 내렸다.


"육체의 식(式)이 추구하는 방향과 검의 형(形)이 서로 어긋나있으니, 투로(套路)에 불필요한 동작이 많아 기의 흐름을 쫓기에 급급해 오성(悟性)을 담을 여유가 없어요."


남자는 기령의 평가에 동의하며 입을 열었다.


"아가야, 네가 익히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금 보여드린 것은 제가 속한 풍영문(風影門)의 천영검(遷影劍)입니다."


"천영? 어찌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더냐?"


"섬광과 같이 검을 움직여, 그림자(影)를 옮긴다(遷)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구결(口訣)을 한 번 읊어보겠느냐?"


남자의 말에 소운의 두 사제가 깜짝 놀랐다.

무인에게 그 초식을 보여주고 구결을 알려달라 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다간 큰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 예민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남자는 소운에게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말하였으니, 두 사람이 보기엔 엄청나게 무례한 태도를 취하는 남자에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대선배님. 이 무공은 제가 아니라 문파에 속한 것이기에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소운 역시 무공의 모든 것을 알려주기엔 꺼려지는듯 거절의 뜻을 밝혔다.


"아가야, 내가 너의 무공이 탐이 나서 그것을 알려달라고 하였겠느냐?"


"물론 아닙니다.

감히 제가 추측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대선배님의 경지가 높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선배님께서 저에게 구결을 요구하신 것도, 그 구결 속에 담긴 깨달음을 일깨워주시기 위함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의 가르침을 위하여 종파의 규칙을 어길 수 없기 때문에 저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신선이 되었거늘, 인간의 법칙 따위가 무슨 대수겠느냐?"


남자의 입에서 신선이라는 말이 나오자 무인들의 표정이 확 변했다.

전설속에서나 들어보았던, 신선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부디 불초한 후배가 무례한 질문을 드리는 걸 용서해주십시오.

대선배님께서는 생사의 경지를 넘어 그 이상을 보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네가 말하는 생사의 경지가 천겁(天劫)을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 이상의 이상도 보았단다."


아이의 순수하면서도 철없는 질문에 답변하듯 말한 남자가 빙긋 웃었다.

거짓 없는 미소를 본 소운의 마음 속에 일종의 두려움과도 같은 경외심이 생겨났다.


"저의 실력이 너무나도 미천하여 대선배님께서 도달하신 진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그럼 이제 말해줄 수 있겠느냐?"


"네, 대선배님."


소운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도록 전음(傳音)을 사용하여 천영검의 구결을 남자에게 말하기 시작다.


"빛이 고요함을 뚫고 날아오르니(光透寂飛翔), 하늘의 기운이 땅을 꿰뚫고(天氣穿大地), 휘감은 기운으로 위험을 내쫓아(繞息驅散危), 원래의 고요함을 지켜낸다(守住原寂靜).

하늘이 땅을 도는 동안에(天旋地轉時), 둥근 달이 어둠을 몰아내고(圓月擠逐暗), 기운 달이 흔들리는 바람을 불러와(虧月招搖風), 별을 향해 곧게 인도한다(引導星筆直).

구슬로 구슬을 맞추어 튕겨냄과 같이(用珠射出珠), 두 받침돌을 아래로 옮기어(兩底座下挪), 거대한 바퀴의 축으로 삼고(巨輪的軸心), 횡으로 돌며 다시 분리시킨다(橫轉再分離).

유성이 하늘에 선을 그음과 같이(流星在空劃), 폭포가 강물에 구멍을 뚫고(瀑布在河鑽)..."


일초사식(一招四式)이 한 묶음으로, 총 십이초(十二招) 사십팔식(四十八式)으로 이루어진 구결이 끝나자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받거라."


저물대에서 새하얀 창을 꺼낸 남자가 그것을 소운에게 가볍게 던졌다.

소운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어디선가 창을 꺼낸 남자의 신묘한 도술에 놀라 창을 놓칠뻔 했다가 간신히 붙잡았다.


"이건..."


창은 그다지 아는 바가 없는 소운이었지만,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남자가 건넨 창은 진귀한 물건이었다.


길고 날카로운 모양을 하고 있는 창은 마치 설원과도 같이 투명한 하얀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창대에 새겨진 수많은 장식은 마치 정령이 춤을 추는 것처럼 반짝이며 시선을 모았고, 그 춤사위를 따라 올라가면 새벽의 빛을 끌어모아 만든듯한 각진 창날이 자리잡고 있었다.

창대의 가장 아랫부분에 끼워진 금색 물미에는 백여우가 뛰어가는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으며, 윗부분에는 은을 뽑아 만든 실로 엮은 듯한 술(鬚)이 매달려 있었다.


창을 살펴보던 소운은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며 빛을 반사하는 술을 만져보려고 손을 뻗었다.


"거긴 만지지 마."

"히야악?!"


그녀의 손이 닿기 직전, 여우의 모습을 한 설호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말하는 백여우에 놀란 소운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창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사저! 괜찮으세요?"


"어, 어, 괜찮아."


"사형, 저거, 떠있는 겁니까?"


소운을 붙잡아주었던 무인중 한 명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놀란 그녀가 내던지듯 창을 놓았음에도, 새하얀 창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떠 있었다.

소운의 사제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역시 공중에 떠있는 창을 보며 놀라움에 서로 수근거렸다.


하지만 소운은 그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저 아이가 붙잡고 서 있잖아."


그녀의 눈에는 머리카락은 물론, 눈썹까지 하얀 어린 아이가 창대를 붙잡고 서있는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이라니요?"

"어떤 아이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두 사제는 소운이 말하는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듯 되물었다.

너무나도 눈에 띄는 아이가 앞에 있음에도 그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구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본 소운은 그 소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설마, 기령?"


설호는 대답 대신 소운의 손에 창을 쥐어주고는 남자의 옆으로 도도도도 뛰어갔다.


"기령이 진짜로 존재하는 거였구나..."


"아가야, 창을 다루어 보았느냐?"


생전 처음 보는 기령을 신기하게 보던 소운이 급히 자세를 바로 잡으며 대답했다.


"극히 기초적인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이의 도움이 필요하겠구나."


남자의 말에 그의 허리를 껴안고 매달려있던 설호가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 한 다음 여우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너의 실력을 보고 싶으니 설이를 맞추겠다는 생각으로 창을 휘둘러 보거라."


소운은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자리잡은 백여우를 보며 머뭇머뭇 자세를 잡았다.

한편, 그녀가 창끝으로 설호를 조준하고 있음에도 여우는 네 발을 모아 앉은 자세로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걱정 말거라. 네가 쥐고 있는 그 창이 설이니.

설혹 네가 맞추더라도 설이는 상처를 입지 않느니라."


소운의 망설임을 읽은 남자가 조언을 하고 나서야 창대를 쥔 소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압!"


잡념으로 인해 어지러졌던 몸과 마음을 다잡는 기합과 함께 소운이 창을 내질렀다.

창에 있어서는 초보자인 그녀였지만, 착실하게 쌓아온 내공과 단련된 신체, 찌르기 위주의 검술을 하며 익혔던 감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내질러진 창은 어지간한 무인들보다도 강한 공력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설호는 옆으로 가볍게 폴짝 뛰는 것만으로도 그 창을 피해냈다.


첫 수를 통해 창의 성질과 설호의 능력을 얼추 파악한 소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두 발을 땅에 굳게 묻듯 중심을 잡은 소운의 창이 빠르게 여우의 몸통과 그 좌우를 노리고 쏘아졌다.

반짝이는 창끝이 위협적으로 조여오자 설호는 기민하게 몸을 뒤집어 세 점을 모두 피해냈다.


점으로 설호를 잡는데 실패한 소운은 선을 이용한 공격으로 공략법을 바꾸었다.

마지막 찌르기가 끝난 직후, 땅에 착지한 여우를 향해 베어내듯 창날이 움직였다.

수직으로 방향이 전환되었음에도 여전히 무시무시한 속도와 기세를 지닌 칼날을 본 설호는 방금 전보다 더 멀리 뒤로 달아났다.

그러자 소운의 발이 빠르게 여우를 쫓아 보법을 밟기 시작하였고, 창끝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더욱 깊게 파고 들었다.

이번에는 여우가 뒤로 도망치는 것까지 고려한 공격이었으나, 설호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기에 이번에도 창은 여우를 붙잡지 못했다.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번뜩이는 창날이 반짝이는 백색 털을 쫓아 공기를 가르며 나아 갔지만 결국은 여우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했다.

소운은 설호의 움직임을 예측함과 동시에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을 통해 여우의 움직임을 봉쇄하려 했으나, 기령은 그런 소운의 노력을 계속해서 간발의 차이로 비켜 갔다.


신령이 십여 차례의 공격을 전부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내는 것을 본 소운은 창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설호는 무인이 공격을 멈추자 이제 끝났냐는 듯 크게 하품을 한 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자리에 누웠다.


"큭..."


중간부터 설호가 자신을 상대로 상당히 봐주고 있음을 눈치 챈 소운이었지만, 신령이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자 자존심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자신의 실력으로는 아무리 해도 저 신령을 맞출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살짝 인상을 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부족하지만 그정도면 어떻게든 되겠구나."


분한 감정을 삭이는 소운에게 남자가 말함과 동시에 땅에 번개처럼 푸르게 빛나는 발자국이 찍혔다.


"자, 따라 걸어보거라."


소운은 남자의 말을 따라 자신의 발 크기와 똑같은 발자국을 밟았다.

그녀가 발을 내딛자 다시 그녀의 앞에 발자국이 찍혔고,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그것을 따라 계속해서 발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가볍게 걷듯 발자국 사이의 간격이 좁고 다음 발자국이 찍히는 속도도 느렸으나, 점점 간격이 넓어지고 속도가 빨라졌으며, 심지어는 발자국끼리의 각도까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건... 보법?'


심법까지 운용해가며 발자국을 따라가던 소운은 어느 순간 자신이 어떤 종류의 보법을 밟고 있음을 깨달았다.


'보폭이 작을 땐 변화가 많고 속도가 빠른 걸 보아 간격을 유지하기 위한 움직임인 것 같고, 힘주어 멈춰서는 부분은 보폭이 최소 한 자 반 이상은 되는 걸 보면, 이건 창과 같이 쓰는 보법이야.'


"생각보다 잘 쫓아오는군."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여 발자국을 만들어내던 청호는 의외로 자신을 잘 따라오는 무인을 보며 씨익 웃었다.


"좋아, 주인. 이정도면 보법은 된 거 같네만."


'설호.'


땅에 누운 채 눈으로 소운을 쫓던 설호가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는듯 펄쩍 뛰어 소운의 앞을 가로질렀다.


"읏...!"


소운은 갑자기 앞을 지나간 백여우 때문에 놀라 보법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자신의 호흡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본 설호가 이번엔 네 다리로 제대로 된 자세를 잡고 소운과 눈을 마주쳤다.


'좋아. 이번엔 한 방 먹여주겠어.'


기령이 자신에게 다시 승부를 걸어오고 있다는 걸 읽은 소운이 창을 고쳐 잡았다.

승부를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앞에 찍히는 발자국을 따라 보법을 몸에 기억시킨 소운은 청호의 발자국과 설호가 일직선이 된 순간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파앙!

"으앗."


창의 속도에 짓눌린 공기가 압축되었다 터지며 큰 소리를 냈다.

방심하고 있던 설호는 생각보다 빠른 소운의 창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그래도 공격을 가뿐히 피해냈다.


"핫! 햡! 흐아앗!"


소운의 발이 푸른 발자국에서 벗어나 하얀 목표를 노리며 나아가기 시작하면서, 보법에서부터 시작되는 기의 순환과 몸의 움직임이 창의 끝으로 모여 섬광처럼 빠르게 쏘아졌다.


'그 짧은 사이에 사저의 움직임이 곱절은 날카로워졌어.'


소운의 사제가 눈에 내력을 집중하고 있음에도 따라가기 힘든 속도로 창을 내지르는 소운을 보며 감탄했다.

처음 보는 보법을 밟는다 싶더니, 무언가를 노리듯 허공을 찌르는 소운의 움직임이 훨씬 더 매서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속으로 만약 자신이 창을 든 지금의 소운을 상대로 비무(比武)를 한다면 몇 합을 나눌지 생각해봤다.


'이길 순 있겠지만... 아마 열다섯... 아니, 그 이상이 걸릴지도 모르겠어.'


아무리 소운이 자신보다 더 강하고, 검으로 창을 상대할 땐 신중해야 한다 하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무기를 든 상대를 이기는데 십오 합 이상을 써야 한다는 건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 부럽구나."


사제는 기연을 얻은 소운을 보며 솔직한 심정을 중얼거렸다.


"저 아이, 생각보다 재능이 있네.

잘만 키우면 상계(上界)로 데려갈 수 있겠는데."


다시 손바닥만한 크기로 돌아와 남자의 어깨에 걸터앉은 청호가 말했다.


'... 그래 보이는군.'


그러나 남자는 청호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심각한 표정으로 소운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왜 그러나?"


'... 일단은 저 아이의 실력을 끝까지 보고 난 다음 말해주겠네.

옥령, 준비 되었나?'


남자가 부름에 날개가 달린 녹색 사슴의 모습으로 변해있던 옥령이 대답했다.


"네. 지금 시작할게요."


옥령의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이자 소운의 주변을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변하였다.


"놀라지 말고 바람에 맞추어 창을 움직이거라."


갑자기 일어난 변화에 당황한 소운의 행동이 잠깐 멈췄으나, 남자가 전언으로 소운에게 말하자 다시 그녀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옥령은 남자의 의지를 따라 바람을 일으켜 소운을 인도하였다.

소운은 보법을 익힐 때처럼 처음엔 살짝 버벅거렸지만 점점 바람의 흐름을 읽고 그에 몸을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소운의 몸에 흐르던 기의 흐름도 서서히 변해갔다.

임독양맥(任督兩脈)을 비롯하여 기경팔맥(奇經八脈)을 흐르는 기의 순환은 원래의 큰 흐름을 유지하였으나 그 흐름에서 빠져나와 사지로 뻗어나가는 십이경맥(十二經脈)을 지나가는 기의 움직임은 창술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움직였다.

그에 따라 보법 역시 더욱 효율적으로 변하였고, 남는 기력과 체력은 창으로 옮겨져 공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한껏 여유를 부리던 설호도 소운의 창이 옥령의 바람과 함께하게 된 순간부터는 진심을 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운의 무공은 설호에게 닿기에는 아직 부족하였다.


'지금의 움직임... 어딘가 익숙해. 왜지?'


소운은 어렴풋하게 바람이 이끄는 길이 자신에게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그녀가 일류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나아가 절정까지 바라볼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처음 접한 보법과 무공을 이리 쉽게 따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형식을 몸에 배게 하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심법(心法)과 공법(功法)의 흐름을 서로 일체화시키는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소운에게 가르쳐주는 보법과 창술은 처음 시전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소운이 익히고 있던 무공처럼 그녀의 심법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움직임에서 이유 모를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익숙함의 이유를 알 수 있다면, 저 기령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창에 달린 술이 설호의 꼬리와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며 춤을 추듯, 깨달음의 벽 역시 소운의 앞에서 일렁거리며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그 답답함이 소운의 마음을 어지럽히면서 그녀의 창끝이 흔들렸다.


'이런. 일단 집중해야 해.'


소운은 뒤늦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한 번 생긴 흔들림은 계속해서 그녀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당장이라도 뛰어다니는 여우를 꿰뚫을 것만 같았던 창은 그 기세를 잃고 허무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수면을 뛰어다니는 물수제비처럼 가벼웠던 발은 던져진 돌이 속도를 잃고 가라앉듯 점점 무거워졌다.

의식하지 않아도 몸끝까지 퍼져나가던 기의 흐름이 흐트러지며 팔다리가 생각만큼 움직여주지 않았다.


"구슬로 구슬을 맞추어 튕겨냄과 같이(用珠射出珠),"


그 때, 남자가 소운에게 전음으로 천영검의 구결 일부를 읊기 시작했다.


뒷발로 앞발을 밀어 차내듯 앞으로 나아가던 소운은 그 전음을 들으면서 바람의 흐름에 따라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두 받침돌을 아래로 옮기어(兩底座下挪),"


땅을 박차며 생긴 힘을 받아 쏘아진 창을 붙잡기 위해 자연스럽게 창을 잡은 두 손이 창대의 뒤로 이동하였고,


"거대한 바퀴의 축으로 삼고(巨輪的軸心),"


내질러진 창은 뒤로 이동한 손을 중심으로 삼아 위로 크게 원을 그리며 회수되었으며,


"횡으로 돌며 다시 분리시킨다(橫轉再分離)."


그 과정에서 생겨난 원심력을 이겨내기 위해 몸을 옆으로 한 바퀴 돎과 동시에 창을 다시 고쳐잡았다.


일련의 동작이 끝나자 소운의 머릿속에서 신성(新星)이 터지는 것 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푸른 발자국과 초록색 바람이 이끌던 방향은 처음부터 천영검이 나아가고자 하던 방향이었다.

그러나 검(劍)은 목표로 하는 지점에 닿기에는 너무나도 짧았기에 그 방향을 잃고 엉뚱한 길(路)을 걷고 있던 것이었다.


깨달음과 함께 온 몸에 퍼진 기가 환희와 열락으로 가득 차 소운의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소운은 그 열기를 내뿜기 위해서라도 쉼없이 움직이며 몸 안에 흐르는 기를 계속해서 순환시켰다.

근육에 쌓이던 피로가 증발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시원함이 되었고, 맑아진 생각은 끝없는 상쾌함을 주어 그녀를 무아지경으로 이끌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빠르고 강해져가는 그녀의 창은 더이상 설호가 아니라 그 너머의 깨달음과 싸우고 있었다.

소운을 돕던 옥령도 이제는 자신의 바람이 오히려 방해만 됨을 알았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자의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움직임을 보니 다음 단계로 나아갈 영력은 충분했나보구만. 주인은 알고 있었나?"


'어느 정도는.'


"허, 나는 도저히 가늠이 안 되던데.

하계의 인간들은 최소한 금단경(金丹境) 정도는 되어줘야 영력이 느껴질락 말락 하니 말일세."


어깨를 으쓱한 청호는 천천히 주변 사람들을 뒤로 물리는 소운의 두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왜 저들은 떠나지 않고 계속 여기에 남아 있는거지? 저러다 휩쓸려 죽어도 좋다는 건가?"


"그러게요. 마치 창이 자신들에게는 절대 닿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처럼 보여요."


"겁이 없는 건지, 배짱이 좋은 건지. 대단들 하네."


그 순간, 소운의 창이 정확하게 설호를 노리고 쏘아졌다.

뒤나 옆으로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설호는 오히려 창을 향해 파고드는 것으로 창을 피했다.

설호가 피한 창끝은 그대로 통제에 따라 뒤로 물러나려던 어느 행인의 머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졌다.


채-앵!


그러나 다행히, 창이 행인의 머리를 꿰뚫기 직전에 두 사제의 검이 동시에 소운의 창을 위로 튕겨냈다.


"으헉?!"

"어이쿠!"

"어어, 밀지 마요!"


검과 창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울림을 만들어낸 후에야 위험했다는 걸 알아차린 행인이 뒤로 넘어지면서 뭉쳐있던 사람들과 함께 엉켜 쓰러졌다.


"하아, 하아, 하아..."


무아지경 속에서 창무(槍舞)를 펼치다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에 깨어난 소운이 거친 호흡과 함께 비오듯 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운을 막아섰던 두 사제는 소운과 눈이 마주치자 검을 다시 집어넣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저. 창이 행인의 머리를 향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막아섰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정말로 죄송한 마음을 품고 소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지금 저들이 뭐라 말한 거죠?"

"어이가 없군. 고작 범인 하나 때문에 깨달음을 갈무리하는 걸 막아섰다고?"


옥령과 청호가 동시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범인은 수선자를 위해서라면 얼마나 죽어도 상관이 없는 존재였다.

단약을 위해서든, 수련을 위해서든, 재물을 위해서든, 아니면 그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서든, 수선자가 원한다면 언제든 범인의 목숨 따위는 취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사제라는 자들이 그런 범인을 위해서 새로운 경지를 향해 가는 사저의 창을 막아선 것이다.

이는 두 기령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고, 나아가 목숨을 잃어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었다.


"응, 고마워. 고생했어."


하지만 두 기령의 생각과 달리 소운은 오히려 감사함을 표하며 창을 거두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저. 저희 때문에..."


"아니야. 정말 잘 해줬어."


소운이 두 사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리 깨달음이 중요하다 한들, 협(俠)보다 중요하진 않으니까."


"협?"


여우의 모습으로 창 끝에 앉아 소운을 내려다보던 설호가 물었다.


"협이 뭐야?"


"사람이 지켜야 할 신념이란다."


"... 사저, 혹시 거기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며 친절하게 대답하는 소운에게 사제가 물었다.


"아, 여기 기령이 있는데... 잠시만, 어떻게 해야 보여줄 수 있지? 창을 만지면 되나?"


소운은 두 사람이 창을 만져볼 수 있게 내밀려 했지만, 그 순간 창이 그녀의 손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멀리 도망쳤다.


"싫어."


"... 미안, 다른 사람이 만지는 게 싫다고 하네..."


"괜찮습니다. 신령이 깃든 무구(武具)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걸로 충분합니다."


세 사람의 대화가 정리되자 넘어졌던 행인이 인기척을 내며 세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협분들."


"아니오, 그저 무인으로써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우리보다는 여기 계신 유 사저에게 감사하십시오.

사저께서는 무인이 얻을 수 있는 기연을 포기하고 당신을 살려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살짝 몸을 돌려 행인과 소운 사이를 열어주자 행인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게 숙여 공수(拱手)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유 대협.

대협의 자비로 제 목숨으로도 갚지 못할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대협분들 덕분에 무사합니다."


감사를 표한 남자는 허리를 펴고 말을 이었다.


"저는 휘주(徽州)에 적(籍)을 두고 있는, 태호상회(太湖商會)의 요 의겸(姚 義兼)이라고 합니다.

황산(黃山)의 북쪽에 위치한 태평호(太平湖)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상인이지요.

나중에라도 찾아오신다면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풍영문의 유 소운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혜검문(彗劍門)의 방 무홍(方 武弘), 방 무장(方 武壯) 형제고요.

나중에 인연이 된다면 찾아뵙도록 할게요."


"방문을 고대(苦待)하고 있겠습니다, 대협."


"이야기는 다 끝났느냐?"


그들이 대화를 마치기를 기다리던 남자가 말했다.

그는 크게 태(態)를 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눈여겨본 사람의 수행을 방해받은 것에 매우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주인 화났다."


창의 뭉툭한 부분으로 땅을 파헤치며 놀던 설호가 그런 남자의 기분을 소운에게 말해주었다.


"아가야. 어찌하여 그 자들을 용서하느냐?"


"예?"


"거기 있는 셋은 지금 네가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들이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느냐?"


움찔.

남자의 말로 인해 무거워진 공기에 짓눌린 네 사람이 긴장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다른 행인들도 남자가 내뿜는 중압감에 짓눌려 숨조차 조심스럽게 쉬어야만 했다.

남자의 세 기령도 아무말 없이 신수(神獸)의 형태를 취한 채 기척을 죽이고 남자의 판단을 기다렸다.

만약 남자가 여기 있는 자들을 전부 죽이기로 한다면, 세 기령은 눈을 깜빡이는 것보다도 빠르게 이 일대를 지워버릴 것이었다.


"그것이 협(俠)이기 때문입니다."


소운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인이 무(武)를 갈고 닦음은 결국 협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협은 무가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지만, 무는 협이 없다면 그저 폭력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무의 수련을 방해받았다고 하여 협을 저버린다면, 그 무에는 어떠한 의미도 남지 않게 됩니다."


"..."


소운의 말이 끝나자 청호와 옥령이 눈빛을 교환했다.


'우연일까?'


'글쎄요... 확실한 건, 지금은 다른 사람들을 전부 물려야 한다는 거예요.'


옥령이 눈으로 사람들을 훑어냄과 동시에 강한 바람이 일었다.


"으앗?!"

"꺄아악!"

"뭐, 뭐야?"


소운을 제외한 사람들이 갑자기 불어닥친 강한 바람에 떠밀려 바닥을 굴렀다.


"사, 사저! 크윽, 무슨 바람이...!"


그나마 무공을 익힌 두 사제가 조금 저항하였으나, 그들도 땅에 발을 디딘 자세 그대로 바람에 밀려나며 긴 선을 남기게 되었다.


사람들이 소운과 어느정도 멀어지자 옥령이 바람을 거둠과 동시에 청호가 앞발을 크게 휘둘렀다.


콰드드등!

"우와악!"

"도, 도망쳐!"


청호의 발짓에 따라 큰 소리와 함께 땅에 길게 내려친 번개는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을 위협하며 푸르게 파직거렸다.

그 소리와 불빛에 놀란 사람들이 비명소리와 함께 도망치기 시작하면서 길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차피 남자의 목적은 주변 사람들을 내쫓는 것이었기에 누군가를 해칠 생각 자체가 없었지만, 도망가는 사람들이 그런 남자의 생각을 알 수 있을리 없었다.


"다들 진정하시오!"

"천천히, 천천히 물러나시오!"


그나마 정신을 붙잡고 있던 두 무인이, 도망치는 와중에 얽혀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며 통제를 해보려 했지만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막아설 순 없었다.


"대선배님,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난장판이 된 거리를 보던 소운은 어쩔줄 몰라하다가 급히 남자에게 간청했다.


"자신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범인들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저들을 위해 나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냐?"


"그것을 알기에 대선배님께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남자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확실히 닮았구나."


"예?"


소운이 되물음과 동시에 공중에 머물고 있던 번개가 사라졌다.

소운은 등골부터 머리카락까지 쭈뼛 서게 만들던 푸른 빛이 사라지자 고개를 돌려 길거리를 보려 했지만, 그녀가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새하얀 얼음벽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옛날에, 너와 비슷한 말을 하던 여인이 있었다. 이 창의 원래 주인이었던 여자였지."


다른 사람들이 더이상 이야기를 방해하지 못하게 막은 남자는 설호가 들고 온 창을 받으며 말했다.


"어느날 내가 범인들에게 자비를 배푸는 이유를 묻자, 그녀는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협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그 협이 무엇이냐 물어 보았다."


창을 반 바퀴 돌린 남자는 창끝으로 땅에 협(俠)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인변 인에(亻), 낄 협(夾). 그녀는 협이란 사람이 끼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도(道), 덕(德), 의(義), 패(覇), 심지어 탐(貪)이나 욕(慾)과 같은 것까지, 누군가 항상 끼고 다닌다면 그것이 협이라고 하였지.

그렇기에 협이란 사람마다 다른 것이며, 그 차이로 인해 다른 사람과 협력하거나 갈등하게 되는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다시 협이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하기를, 협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답했다.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닌 무언가와 만나,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가치를 가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지.

하여 협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남자가 다시 손을 움직여 땅에 새로운 글자를 썼다.


"그리고, 그렇기에 언젠가는 선(仙)의 시대가 끝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지금은 사람(亻)이 산(山)으로 대표되는 자연에 끌려다니지만, 언젠가는 사람이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 보았지.


나는 그때가 되면 사람이 자연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냐 물었지만, 그녀는 꼭 그렇진 않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오히려 그 시대의 가장 강한 인간이 지금의 가장 약한 수선자보다도 약할 수도 있다면서.

하지만, 반대로 그 시대의 가장 약한 인간이 지닌 협(俠)이 그 어떤 신선의 도(道)보다도 많은 일을 행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협은 어떻게 수련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협은 그저 살아가다보면 자연스럽게 몸에 깃들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삶의 목표와 경험, 앎과 행함이 하나씩 쌓이고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 마음 속에 협이 생겨나 있을 것이라 알려주었지."


남자는 자신이 땅에 쓴 글자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 그것이 그녀가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협에 대해 알려준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명기와 맞서 싸우다 죽어버렸지.

자신이 말하던 협을 지키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협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가 말한 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서 나의 협을 찾아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세상의 기운은 어디론가로 빠져나가고 있으나, 반대로 천겁은 갈수록 강해지고만 있다.

아래로부터는 더이상 새로운 수선자가 올라오지 않으며, 위로부터는 신선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범상치 않은 사태에 나를 포함한 몇몇 신선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 시간의 틈을 열고 미래를 보았으나... 그곳엔 끝없는 허무함 뿐이었다.

사람도, 땅도, 하늘도, 별도, 심지어 천겁과 세상의 기운도 없이, 텅 빈 공간만이 끝없이 이어질 뿐이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허무함이 우리의 끝이었던 게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신선들 대다수는 극도의 허무함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극히 일부는 무한한 허무함에 맞서보겠다고 계속해서 영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남아있는 자들은 미지의 공포를 잊기 위해 끝없이 쾌락을 탐하거나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숨어들었지.


만약 나도 그녀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수십 일을 멍하니 앉아만 있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협'이 수없이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지.

그래서 나는 차원을 넘어 상계에서 이곳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너를 통해 그녀가 말했던 시대의 편린을 찾아냈지."


남자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던 소운은 자신에게서 편린을 찾아냈다는 남자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를 통해서...?"


"너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선(仙)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선을 논해야 할 때마다 무(武)에 대해 말하였지."


남자의 창끝이 빠르게 한자를 그려냈다.


"발을 나타내는 모양에(止)에 창 과(戈).

이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이상 이 글자 안에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이 수련함에 있어 더이상 자연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니, 이제는 인간이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여 다루는 일만 남았지.

만약 내가 그 이치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능히 그 끝없는 공허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니, 네가 나를 도와야겠다."


남자가 다시 창을 반 바퀴 돌려 날이 하늘을 향하게 한 뒤 소운에게 내밀며 말했다.


"선을 알지 못한 채로 무와 협을 익힌 네가 수선자들과 같은 능력을 지니게 된다면,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무언가를 지니게 될테지.

그러니 나는 너를 가르치며 무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협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알아낼 것이다."


"..."


소운이 내밀어진 창을 잡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남자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혹시, 제가 대선배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선 기존의 관계를 정리해야합니까?"


"정리한다는게 무슨 의미냐?"


"제가 속한 문파에서 나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자식이 두 명의 아비에게서 태어날 수 없고, 신하가 두 명의 왕을 모실 수 없는 것처럼, 무인은 자신이 모실 스승을 한 명만 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나는 그러한 인간의 법도를 초월했느니라.

그러니 네가 문파에서 나오고 싶다면 나오고, 그러기 싫다면 그대로 남아 있으면 된다."


그제야 남자가 내민 창을 받아든 소운은 그 즉시 머리를 땅에 대고 큰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하마."


남자가 새로운 제자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아니 무슨 쓰다보니까 25000자를 넘게 썼냐 씨발...


기타로 올릴지 무협으로 올릴지 ㅈㄴ 고민했음...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스승은 선협 인물이지만 어쨌든 제자는 무협 인물이고 주된 배경은 무협이니 무협이 맞겠지.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