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가 다 돼서 헛것이 보이나.
집구석에 있던 낡은 동화책 속에서 튀어나온 여우 미소녀를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참 나. 어릴 땐 그렇게 책에 미쳐 살던 녀석이 이게 뭔 일이래... 죄다 종이쪼가리들밖에 없구만."
황금색의 풍성한 머리카락 위로 쫑긋 솟아오른 한 쌍의 귀와, 그 아래로 흔들리는 커다란 꼬리.
뭇 남자라면 한 번쯤 꿈꿔봤던 이상적인 상황이기는 하겠다만, 방금 죽으려던 사람 앞에 나타나는 건 너무 개연성 없지 않은가.
"동화는 원래 개연성이 없어야 하는 거야, 꼬맹이. 책에서 시시한 일들만 일어난다면 세상의 누가 꿈을 꾸겠어?"
"방금 제 생각 읽은 거에요?"
"네 책장 속에서 같이 지낸 게 20년이 넘었다 이 자식아. 무슨 생각하는지는 보기만 해도 알아. 그래도 어떻게 근 10년간 한 번도 안 펼쳐볼 수가 있어? 예전엔 날 제일 좋아한다면서."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튀어나온 낡은 책을 눈앞에서 흔들어 댄다.
확실히 예전에 좋아했던 동화책이긴 하다만, 여전히 실감이 나질 않는다... 일단 외모부터가.
"근데 책에 있는 모습하고는 좀.... 많이 다르신데요."
"동화는 기본적으로 네 심상에서 비롯되는 거야. 네가 맨날 보면서 딸치는 그 망할 여자애들 때문에 이렇게 되버린거라고."
"그래서, 집에 남는 책 좀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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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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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집에 한 권도 없다고? 있는 건 죄다 참고서뿐이고? 넌 뭐 먹고 사냐?"
"밥이요... 밥 안 드시고 사세요?"
"아, 미안. 동화의 상식이란 게 이러다 보니 가끔 헷갈린단 말이지.... 냠."
어디선가 꺼낸 후추와 소금을 다 푼 참고서에 뿌리고는, 자연스럽게 크게 한 입 베어 무는 여우 씨.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못하는 방식으로 책을 뜯어먹는 모습에 이젠 정말로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애초에, 요새는 종이책도 거의 안 읽는 사람들이 많다고요? 대부분 e북으로 보거나 해서..."
"뭘로 책을 본다고? 잠깐만 보여줘 봐. 맙소사."
"이렇게 작은 화면으로 책 보는 게 일상이라고? 이러면 먹을 수도 없잖아. 안데르센이시여."
"뭐, 딱히 관심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이젠 저랑 관련있지도 않고."
"뭘 관심을 안 가져. 너 죽으려고 한 게 이거 때문 아냐?"
".... 알고 계셨어요?"
"네가 죽으면 나도 사라지는데 어쩌겠어?우리 꼬마 독자님 살려주러 늙은 몸으로
현실에 나와야지. 네 마음은 알고 있으니까 무슨 일 있었는지, 한번 다 편하게 얘기해봐."
뭐, 이쯤에서 고백하는 게 좋겠다.
어릴 때부터 책과 글쓰기를 좋아하던 탓에 작가가 진로였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펜을 손에 잡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등단에 실패했고, 하루 써서 하루 먹고사는 웹소설 판에서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잡고 살다가.
'진지하게 이런 글 쓰실 거면 편의점이나 가세요'
익명의 독자가 쓴 5700자의 서평에 부끄럽게도 인생을 포기할 생각까지 해버린 것이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만, 내 이야기를 고백하는 시간은 좋았다.
감탄하기도 하고, 슬퍼해주기도 하며, 장래에 대한 케케묵은 조언 없이 내 얘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준 사람이 지금껏 몇이나 될까?
몇 시간 뒤, 내 어릴 적 친구에게 모든 이야기를 쏟아낸 나는
그녀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으이구, 눈 다 부었네. 기분은 나아졌어?"
"...조금은요."
"작가로서 살면서 비평은 누구나 받게 되는 거야. 널 상처주는 비평 때문에 너무 슬프고 괴로워질 때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네가 가치 없다는 평가가 되지는 않아. 알았지?"
고개를 끄덕인다. 어쩐지 어릴 적 부모님의 훈계가 생각나는 분위기라, 그리움에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결국 여린 나는 펑펑 울다가 외간 여자와 한 침대에서 자는,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짓을 저지른 나는
다음 날 아침에 입 안에 들어간 여우털을 골라내며 일어나야 했다.
"다 씼엇지? 좋았어, 서점 가자."
"갑자기요?"
"인생 고민 들어줬으면 상담료를 내야지? 책 사줘. 이왕이면 완역본 하드커버로."
"비싼데..."
"맨날 집에 박혀사는 너 어떻게든 집 밖으로 끌어내야겠어서 이러는 거거든? 순순히 협조 좀 해주지?"
결국에는 와버렸다. 문만 열어도 책 향기가 풍기는 이곳에.
"흥흐흥흥흥~ 홋! 저기서 디킨스의 향기가!"
엄청 신나셨네.
결국 신난 여우 씨의 성화에 못 이겨, 고풍스러운 갈색 커버로 치장된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사 드리고 나서야
백화점 구경보다 더한 책 구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노을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예전답지 않은 진지한 얼굴로, 여우 씨가 물어왔다.
"질문 하나만 하자."
"아직도 글 쓰고 싶어?"
끄덕.
"세상이 아무리 너한테 뭐라고 해도 글 쓰고 싶어?"
끄덕끄덕.
"이제 포기하지 않을 자신 있어?"
"네."
"그럼, 이걸로 거래 성립이네."
내 앞에서 당당한 표정으로 선, 내 오랜 친구는, 나에게 그 부드러운 손을 내밀고서 말했다.
"글 쓰고 싶은데 실력이 없으면, 나한테 배워. 보수는 일주일에 책 한 권."
"제가... 그래도 될까요?"
"이제는 원작 내용도 기억 못하는 거니? 나름 출판사까지 있는 잘나가는 작가한테 배우는 기회를 거절할 거야?"
"어른이 이런 기회를 주시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 거야, 알았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망설이는 내 손을 잡아채고선ㅡㅡㅡㅡ
"입 딱 다물고 따라와. 네 최고의 동화로서, 반드시 널 완벽한 작가로 만들어 줄 테니까."
그렇게, 다시 만난 책 먹는 여우 선생님과의
기묘한 작가 수업이 시작되었다.
"아무 글이나 한 편 써와 봐... 1화만."
팔락, 팔락.....
"일단 환생부터 빼버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