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서 증오의 연쇄를 끊겠다는 미치광이 검사도 죽었고
인간의 종을 개선하겠다는 미치광이 과학자도 죽었고
인간을 위한 신을 만들겠다는 미치광이 성녀도 죽었고
죽이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별바다의 어둠 역시 죽었다.

그리고 어둠의 쏟아짐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어, 인류의 최후를 막아낸 용사의 나라,

엘튼은 반 년도 안 되어 괴뢰국이 되었다.


위대한 성현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귀를 막아 전해지지 못했고
용사의 무술도 제 한 몸 주색잡기를 위한 것에 멈추어 퇴폐했으며
체제의 반항자는 새로운 체제의 지배자가 되어
다시 한 번 더 체제의 유지를 위해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한다

아름다운 법도로서 모두가 깨어나는 듯 했으나, 깨지 못한 채 욕망을 채우는 악자들이 범람해 깨어난 자들을 몰아내었으니.

세월이 흘러
아름답게 번성했던 세계는 저물고,
다시 어둠이 가득한 세계가 열렸다.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피가 흐르며 어둠이 들끓으니
자신들이 벌이는 악행의 지옥에서
자신들을 대신해 괴물의 희생양이 되어줄 용사를  구한다.




"저리 꺼져 더러운 것!"

시장가를 걸어다니던 한 남자가 돌덩이를 맞는다.
용사파티의 전설 속, 미치광이 검사처럼 검은 머리, 살구색의 피부색, 그리고 고동빛의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미치광이 검사처럼 우리를 죽이려 하는 거지?"

그저 외형적 특질만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 마라.
성현의 가르침을 듣지 않은 대중들은 그런 말 따위 이미 잊은지 오래이다.


저벅저벅, 뒷골목으로 향하던 그의 등에 날카로운 칼날이 달린다.
한순간 화끈한 감각을 느꼈음에도, 그 남자는 딱히 내색하지 않는다.

"큭큭 죽고 싶지 않으면 갖고 있는 돈을 전부 내놔."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던가.
그 남자가 중얼거렸지만, 협박범은 그 조그마한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청각이 발달하지 않았다.

"응? 잘못 잡았나? 가난뱅이? 쳇. 어쩔 수 없네. 이런 놈이라도 털어보면 뭔가를 가지고 있겠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는 남자에게 칼을 휘두른다.
그의 등에 칼날 자국이 하나 더 새겨지려는 찰나,

"멈추세요. 초록 머리 강도 크루거."
"응? 여자의 목소리?"

뒷골목의 일에 간섭하는 아름다운 목소리.
그저 호기심에 검은 머리와 초록 머리의 남자가 돌아본 뒷편에 서 있는 건,
붉은 후드를 걸친 노랑색 머리의 여성.

"흑의 심판자 견습, 저 레드후드. 영혼이 검게 물들어버린 당신을 심판하도록 하겠습니다."

흑의 심판, 그 말을 들은 초록머리의 눈이 크게 띄인다.
반백년 전, 별하늘의 어둠을 막아낸 용사파티의 일원, 별의 성녀가 세운 무력 집단.
사람들을 계도하기 위해 세운다는 최초의 목적은 이미 잊혀지고,
 그저 악인을 즉결 처형하기를 반복하는 집단.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것인지.
겁에 질리는 초록 머리의 강도.

"제기랄 여기에서 이렇게 죽을까보냐!"

살기 위한 발악, 그녀를 향해서 단도를 휘두르지만.
단 일격, 그의 검이 튕겨나가며  몸이 두 조각 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괜찮으신가요. 죄악에 물들지 않은 영혼을 지닌 자여."

곧 그녀는 품에서 포션을 꺼낸다.
전설 속의 물약처럼 뿌리자마자 모든 상처가 낫는 비약은 아니다만은
상처를 소독해서 감염과 덧나는 것을 막아주고, 새 살이 빠르게 나도록 해주는 약물.

그런 그녀의 호의를,

"포션은 필요없다."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흔히 도움을 받기 싫어하는 타입의 사람, 그렇게 판단한 그녀는 그의 허름한 망토를 벗기고서,

"괜찮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단 한 번도 영혼을 검은색에 물들인 적 없는, 당신의 과거에 대한 보답일..."

그 남자의 등에 새겨져있는 문양을 보고서, 말을 잃는다.

불멸의 낙인,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죽음이라는 결말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각인,
별하늘의 어둠 정도의 강자가 아니라면 새길 수 없는 그 표식에,
그녀의 표정이 심각함에 물든다?

"잠깐 묻겠습니다. 이름이 무엇인가요?"
"..."
"이 등에 있는 문양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는 그 남자를 바라보며, 레드후드는 그저 조용히 상처 부위에 포션을 살살 붓는다.

"필요, 없다니까."
"당신이 제 멋대로 제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으니, 저도 제 멋대로 당신에게 포션을 부을 겁니다."
"말해줄 테니 그만 부어."

그의 말대로 레드후드는 구명 행위를 멈춘다.

"이름은 레벤, 등에 찍힌 문양은... 모른다. 다만 이게 찍혀 있으면 어떻게 해도 죽을 수 없어."
"그렇군요, 레벤. 혹시 저와 함께 흑의 심판 본부에 가지 않겠습니까?"
"싫다."

레벤의 말에서는 아무런 열의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곳에서라면, 당신의 문양을 해제할 수도 있습니다."

레드후드가 던지듯 꺼낸 말에,
흐릿하던 레벤의 눈동자가 생기를 얻는다.

"진짜로?"
"물론입니다. 저희 흑의 심판에서는 불사자조차 죽이는 방법을 아주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문양 역시 파훼할 수 있는 것 중 하나. 분명 본부에 가 도움을 받으면,"

'죽음을 선택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레벤의 눈동자가 크게 띄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레벤.

"마음은 정하셨습니까?"

레드후드의 질문에,

"그래. 한 번 가보자. 흑의 심판 본부로"

레벤은 답했다.





"아 그리고 제 본명은 카린입니다. 레드후드는 어디까지나 활동명이니까요."
"흠."
"바깥에서 부를 일이 있으면 본명으로 불러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