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은 공식꺼 퍼옴



올가마리 아니무스피어.


휴대폰 게임인 페이트 그랜드 오더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로 나름 비중 있게 등장했지만, 프롤로그가 끝남과 동시에 죽어버린 비운의 캐릭터.


“으음...아닌가? 나중에 다시 등장했던...것 같기도 하고...뭔가 이상한 옷을 입고 다시 나왔던가?”


모르겠다. 페그오는 그냥 찍먹해서 맛만 본 후 패러디 만화나 보면서 낄낄거렸지.


“페그오 스토리면...인류 멸망이 확정돼서 이를 막기 위해 마법사들이 시간 여행이 가능한 칼데아란 조직을 만들었는데, 중간에 마술사 모자 쓴 이상한 아저씨가 폭탄을 터트려서 대부분이 죽고 주인공 혼자서 인류 멸망을 막아내는 그런 스토리였지?”


요컨대 인류 멸망 확정인 암울한 세계관.


그렇지만 인류 멸망 확정보다 훨씬 더 큰 문제가 눈앞에 있다.


“내가 바로 그 올가마리 아니무스피어가 됐다고?”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조금 어리긴 해도 일러스트로 많이 보던 그 캐릭터와 똑같았다.


‘...조졌다 이거. 사망 확정이잖아.’


인류가 멸망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게 생겼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면 인류 멸망을 막을 의미가 있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사라졌다.


이래 봬도 나는 책임감이 강한 편이라.


인류 멸망이 확정돼 있고, 만약 나에게 그걸 막을 힘이 있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해야겠지. 일단 그 이상한 마술사 모자 아저씨를 해고하자.”


근데 걔가 우리 직원이었나?




올가마리의 몸에 빙의하고 몇 년이 더 지났다.


일단 그 이상한 모자 아저씨는 해고했다.


이 몸에 빙의하고 나니까 원작의 올가마리가 왜 그런 성격으로 자랐는지 잘 알겠더라.


인류 멸망을 알아버린 나는 빙의한 순간부터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이 몸의 전 주인이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기에 다른 마술사 못지않은 성과를 이뤘지만, 나의 아버지인 마리스빌리 아니무스피어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잘했다, 조금 더 노력해라, 너는 할 수 있어, 그 정도의 미약한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완전한 방치.


칼데아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말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원작에서는 이런 가정환경 때문에 올가마리의 성격이 이상하게 꼬였지만...나는 다르다.


타인에 가까운 아버지의 무관심 따위 알 바 아니야.


내게 지금 필요한 건 인류 멸망을 막을 방법이지 아버지의 관심이나 인정이 아니다.


아니무스피어 가문의 모든 걸 쏟아 부은 칼데아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줄 리가 없으니 어차피 칼데아는 나의 것.


아버지를 볼 시간에 서류 한 장이라도 더 보는 게 도움되겠지.


타인과의 교류도 최소화 한 채 칼데아 연구에만 집중하는 나날들.


여자의 몸을 가지고 있어서 이성 친구를 만들기가 쉽지 않고, 남자의 정신을 가진 탓에 동성 친구를 만들기도 어려웠다.


덕분에 아직 여자의 몸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남장과 다를 게 없는 옷을 입고 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아버지가 본가로 돌아왔다.


“올가마리. 여기는 내 전 제자이자 지금은 칼데아의 의료 총 책임자인 로마니 아키만이다. 서로 인사하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들어온 사람은 당근 같은 머리색을 가진 남자였다.


짧은 통성명이 끝나고, 아버지는 당근 머리 남자를 남겨둔 채 본인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졸지에 나와 단 둘이 남겨진 로마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안녕?”


헤실헤실, 허당 같은 실없는 웃음을 짓는 남자였다.


키도 크고, 운동이라도 한 건지 체격이 제법 다부졌다.


얼굴도 잘생긴 편에 속했지만, 저 헤실헤실 실없는 웃음이 외모를 다 깎아 먹는다.


뭐랄까. 조금 저속한 표현이지만 갑자기 이 남자가 눈이 돌아서 날 덮쳐도 어찌저찌 제압 할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안정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나는 칼데아의 의료 책임자인 로마니 아키만이라고 해. 너는 소장님의 따님인 올가마리 아니무스피어 양이지?”


“그냥 올가마리라고 불러요. 나도 그게 편하니까. 로마니라고 부르면 되죠?”


“닥터나 로망이라고 불러줘. 둘이 합쳐서 닥터 로망이라고 불러줘도 좋아. 개인적으로 로마니란 이름은 조금 싫어하거든.”


“좋아요.”


자기 이름을 싫어한다니. 별 이상한 사람도 있네.


그나저나 로망...로망...뭔가 들어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편한 데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요. 저는 연구할 게 많아서...”


그때 로망의 휴대폰에 알람이 울렸다.


“어? 지, 지금 갑자기? 이건 꼭 봐야 할 것 같은데...으음. 올가마리? 나 급한 연락이 와서 그런데 잠깐 나가 있어도 될까?”


“마음대로 하세요.”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손님 대접도 제대로 못 해 줄 것 같은데 나가 있는 게 피차 편하겠지.


“고마워!”


로망은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연구실 바깥으로 나갔다.


“실없기는...”


현생에서 처음 보는 타입의 남자였다.


철저한 능력주의, 신분주의, 학벌주의, 가문주의인 마술사 사회에서 어떻게 저런 실없는 남자가 나왔을까.


아버지랑 성격도 잘 안 맞을 것 같은데.


아니지. 오히려 저런 성격이 아버지랑 잘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매몰차게 대했나? 아버지의 등장했지만, 프롤로그가 손님을 앞에 두고 연구만 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 몸도 찌뿌둥하고.


가볍게 쉴 겸 로망이 돌아오면 차라도 내 줄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실 바로 옆의 탕비실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 아무도 없을 탕비실의 문을 열었는데...


“마기 마리! 마기 마리! 귀여워! 내 코멘트도 읽어줘!”


휴대폰 속 버츄얼 아이돌에게 열광하는 당근 머리 남자를 발견했다.


“우와...”


좀 깬다...원래 깰 것도 없지만...더 깬다...


“에? 어, 으엣! 올가마리! 언제 들어온 거야?!”


“방금요. 그런데 설마 좀 전의 급한 알람이란 게...그거...?”


“그거라고 하지 마! 마기 마리는 힘들고 고된 칼데아 생활에서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아이돌이라고!”


“......아니...음...네...”


나도 모르게 로망의 눈을 피해버렸다.


“차라리 아무 말이라도 해 줘! 나보다 몇 살은 덜 먹은 여자아이한테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기분이 좀 그렇다고! 그리고 마기 마리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상한 게 아니야!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하는 넷 아이돌인데 말하는 게 조금 신랄하고 직설적이긴 하지만 그게 또 귀여운 아이돌이야! 자! 너도 직접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로망이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화면 안에선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귀여운 말투로 댓글을 읽던 중이었다.


[와아! ‘칼데아의의사사축’씨 댓글 고마워! 오늘도 와 줬구나!]


그새 댓글까지 단 거냐...


근데 이런 씹덕스러운 콘텐츠를 본 건 오랜만이네.


이 몸에 빙의하고 나서는 일이 바빠 이런 건 보기 힘들었는데.


“조금이라면...?”




잠시 후.


“마기 마리! 마기 마리!”


“귀여워!”


“그치! 너도 역시 마기 마리의 귀여움을 알아줄 줄 알았어! 자! 여기 유료 맴버쉽에 가입하면 구독자 한정 방송도 볼 수 있어!”


“가입!”


나는 로망에게 영업당해 마기 마리의 팬이 됐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로망은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남자였다.


저 헤실헤실하고 속 편한 웃음에는 사람의 경계를 푸는 힘이 있다고 해야 하나.


내가 현생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남자였다.


로망의 나이는 전생의 삶과 현생의 삶을 합한 것과 거의 동일했다. 정신연령도 비슷하고, 마기 마리란 취미를 공유한 덕분에 우리 둘은 금방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특히나 우리 가문 저택 지하엔 개인 영화관이 딸려 있었는데, 여기서 같이 마기 마리 방송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마기 마리 귀여워 헤헤헤.


덕분에 연구 자료로 삭막하던 내 연구실 한구석을 마기 마리 굿즈들이 장식하기 시작했지만...취미 생활이니까 문제없겠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짧은 장례 후,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칼데아의 소장으로 취임했다.


로망이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만, 괜찮아. 어차피 말 몇 번 나눠 본 적도 없는 아버지다.


이 죽음을 슬퍼하기엔 칼데아의 목적과 인류 멸망의 책임감이 너무 무겁다.


인류가 멸망하고, 이를 되돌리기 위한 원작으로의 진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실패하면 인류 멸망.


내가 실패하면 모두가 죽는다.


만약 내 능력 부족으로 실패한다면...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도 불현듯 자꾸만 떠오른다. 그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쉬기가 힘들다.


인류 멸망이 다가올수록 부정적인 생각이 들거나,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로망은 의료 스탭인 자기에게 상담하라고 했지만, 인류 멸망이 확정됐단 사실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어.


그래도 로망이 처방해 준 항불안제를 복용하니 좀 나아졌다.


로망이랑 같이 마기 마리 덕질하면서 틈틈이 숨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책임감에 질식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마기 마리는 귀여워.




본격적으로 칼데아의 기동을 시작했다.


우리의 목적은 인류의 과거를 지키는 것.


인류의 역사를 관측하고, 역사가 뒤틀린 특이점이 발견되면 레이시프트라는 시간 여행을 통해 이를 바로잡는다.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해 전 세계 각지에서 인재와 자원을 긁어모았다.


이상한 모자 아저씨도 해고하고. 보안에 보안을 거듭해 폭탄 테러의 가능성은 최소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처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놨으니 괜찮겠지. 다 괜찮을 거야.


밤에 잠을 못 자 로망에게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갈수록 내성이라도 생기는지 수면제 복용량이 늘고 있다.




첫 레이시프트 가동일이 다가왔다.


“후지마루 리츠카? 대체 그놈은 뭐야. 인류 멸망을 목전에 둔 중요한 상황을 설명하는데 잠이나 자고 있고. 맨 마지막 마스터 후보 주제에. 마술사면서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몰라서 그래?”


누구는 이번 작전을 위해 말 그대로 한평생을 갈아 넣었는데. 이게 얼마나 중요한 작전인지 이해를 못 하는 건가?


너무 열 받아서 한 대 때린 후 그 자리에서 내쫓았다. 지금쯤 칼데아 안 어딘가를 어슬렁거리고 있겠지.


관제실에서 레이시프트 지휘를 하던 찰나, 휴대폰으로 알람이 날아왔다.


“마기 마리 맴버쉽 한정 방송이 곧 시작한다고...? 거기에 중대 발표?“


이, 이건 꼭 봐야 해!


레이시프트 직전이지만 이미 준비는 끝마쳤고...아주 조금이라면 내가 없어도 괜찮겠지?


아무도 못 보게 휴대폰으로 로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로망. 방금 마기 마리 알람 봤지?’


‘물론이지! 매일 땡땡이치던 곳에 있을 테니까 올 수 있으면 와!’


로망의 문자 밑에 엄지를 든 마기 마리 이모티콘이 따라 올라왔다.


나도 답장으로 마기 마리 이모티콘을 보내줬다.


‘헤헤. 로망이랑 같이 마기 마리 방송 봐야지.’


“소장님. 곧 있으면 레이시프트 실시하는데 어디 가세요?”


“그, 급하게 용무가 있어서 그래. 내가 제시간에 못 돌아오면 먼저 시작해 줘.”


“혹시 닥터랑...아하...넵! 여기는 저희가 맡아 둘 테니 느긋하게 볼일 보고 오세요.”


뭐야. 저 묘한 눈빛은. 요즘 저런 눈으로 날 바라보는 여성 스태프가 늘었는데...기분 탓이겠지?


로망이 땡땡이치던 장소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스태프 개인실.


남는 방 하나에 컴퓨터랑 과자랑 이거저거 두고 마기 마리 방송 관람실로 사용하는 중이다.


“마기 마리 방송 시작했어?”


우다다다 뛰어와서 방문을 열었더니, 그 안에서 로망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으, 으아아앗! 우앗! 올가마리! 노크! 제발 노크 좀 해!”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


흘러내린 옷깃 사이로 근육이 보이자 살짝 심장이 놀랐지만 별 건 아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같은 남자끼리도 근육이 울룩불룩한 몸을 보면 한 번 눌러보거나 만져보고 싶잖아. 그런 거겠지. 인제 와서 딱히 당황스러울 것도 없다.


“로망. 너 옷 갈아입는 거엔 관심 없거든. 얼른 마기 마리 방송이나 틀어.”


“어, 어어? 응...올가마리. 나는 가끔 네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려. 입는 옷도 남자처럼 바지만 입고 다니잖아.”


나도 그래.


“그럼 무슨 반응을 원했던 거야 이 변태...”


“그런 거 아니거든!”


로망이 방의 노트북으로 마기 마리 방송을 틀었다.


로망은 의자에, 나는 침대에 누워 방송이나 보고 있던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내가 직접 쫒아냈던 후지마루가 들어왔다.


“어...어? 처음 보는 사람이랑 소장님?”


“너, 넌 누구야! 여긴 나랑 올가마리가 땡땡이치는 비밀의 장소라고!”


“나는 빼! 나 그래도 소장이란 말이야! 마기 마리 방송 아니면 땡땡이도 안 친다고!”


“스스로 땡땡이 친다는 사실을 인정했어?!”


“어? 아, 아냐! 아냐 아냐! 이거 아니야!”


우선은 로망이 앞으로 나서서 상황을 정리한다.


“일단 만나서 반가워. 나는 로마니 아키만. 칼데아의 의료 책임자야. 편하게 닥터 로망이라고 불러줘. 그리고 이쪽은 칼데아의 총 책임자인 올가마리 아니무스피어 소장님. 너도 잘 알고 있지?”


“아하하...잘 알고 있죠.”


“다 망했어...나름 소장 이미지 잡아 놨는데...이렇게 되면 내 이미지가 뭐가 되냐고...”


침대에서 얼굴을 못 들겠네.


거기에 뭐랄까, 초면에 뺨 때린 사람과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건 심적 부담감이 크구나.


“그런데 두 분에게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여긴 어디에요?”


...어?


“뭐?”




후지마루에게 칼데아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줬다.


후지마루와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마지막 마스터 후보는 마술사도 아니고 어딘가의 국제 기구 관계자도 아니었다.


마술이 뭔지도 모르는 일반인.


길 가다가 갑자기 납치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칼데아라고 하더라.


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따지고 보면 납치 피해자였다.


그럼 쟤 입장에서 칼데아는 납치범이고, 나는 거기의 총 책임자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에게 왜 아무것도 모르냐며 뺨 때린 격이구나.


“아....그...조, 좀 전에 뺨 때린 건 미안해요. 진짜 정말로 미안해요. 이 일은 추후 합당한 보상을 할 테니...”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고개를 들어주세요.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다들 좋은 사람인 것 같고...잠깐 휴가 왔다고 생각하죠.”


아냐. 그게 아니야.


너는 지금 상상도 못 할 일에 휘말리게 된 거야.


“어떤 곳인지 알겠는데 왜 제가 이곳에 있는 거죠?”


“그건 소장인 제가 설명해 드리죠. 왜냐면...”


입술을 열던 그 찰나.


방 안이 정전되더니 칼데아 전체에 심한 충격이 가해졌다.


전체 방송으로 다급한 나레이터의 목소리가 나온다.


-긴급 사태 발생! 긴급 사태 발생! 중앙발전소 및 중앙관제실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뭐, 뭐야 이게...소장님? 이거 뭔가 큰일 난 거 아니에요?”


후지마루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린다. 눈과 귀에 뿌연 안개가 낀 듯 현실 감각이 사라진다.


이게 뭐야.


뭔데 이거. 폭발? 원작처럼 폭탄 테러가 일어났어? 테러를 막기 위해 그만큼 노력했는데도?


내가 실패한 거야? 시작하기도 전에? 나 때문에?


숨이 안 쉬어진다. 답답하다.


누가 가슴에 쇳덩이를 올려 둔 것 같아.


로망. 이것 좀 치워줘. 로망...


“-장님! 소장님!”


“어어...어?”


누군가 날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로망...?”


“소장님! 얼른 지시를 내려주세요!”


“어...어! 그, 그렇지! 로망! 의료 스탭을 데리고 중앙관제실로! 후지마루군! 너는 얼른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있어! 나는 예비 관제실로 가서 상황을 알아볼게!”




그리고 밤.


수면제를 아무리 먹어도 잠이 오지 않아 잠시 산책을 나왔다.


산책이라고 해도 창문도 없는 흰색 복도를 혼자 걷는 게 전부지만.


“답답하네.”


칼데아의 상황은 어떻게든 수습했다.


“수습...했다고 봐야 할까.”


중앙관제실과 중앙발전소에 일어난 화제는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폭발을 일으킨 방해 공작이다.


“원작에서도 일어났던 테러인데...알고 있었는데...과할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썼는데...왜 막지 못했을까...”


인류 멸망을 회피하기 위해 필수적인 레이시프트가 가능한 마스터는 후지마루 리츠카 뿐.


마스터를 포함해 약 200명 넘게 있던 칼데아의 직원 대부분이 폭발에 휘말려 사망했다.


의료진이 노력해 주고 있지만, 사망자는 더 늘어날 테지.


후지마루의 레이시프트를 통해 특이점을 바로잡았지만, 행운에 행운이 겹친 결과였다.


앞으로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부족한 스태프와 물자로 특이점 공략을 일곱 번이나 더 성공해야 한다.


실패하면 인류 멸망.


여기까지 와서 알았다. 후지마루 리츠카가 페그오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그렇지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잖아. 원래 죽었어야 할 내가 살아 있잖아.


게임 스토리처럼 모든 것이 쉽게 풀릴 것으로 생각하긴 어렵다.


뭐가 하나 잘못돼서, 어쩌면 내가 살아 있어서 원작과 엇나갈지도 몰라.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내가...내 책임이야. 내가 좀 더...내가...뭔가 더 좋은 수가 있었을 텐데. 내가 아니라 다른 뛰어난 사람이라면 방법을...”


어지럽다. 숨쉬기가 힘들어.


하얀 벽에 기대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칼데아의 벽 너머에 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류 멸망. 70억 인구 중 살아남은 사람은 이 안의 수십 명뿐.


그리고 나는 그들을 이끌어 인류 멸망을 되돌려야 하는 총 책임자.


책임감에 짓눌려 압사할 것 같아.


“하아...하아...”


숨이 막힌다. 폐에 물이 들어온다.


칼데아의 하얀 복도는 너무 폐쇄적이다. 벽이 점점 좁아진다.


하얀색. 하얀색이. 팔이 저리다.


“천장이...너무 좁아...”


“괜찮아 올가마리. 편하게 누워.”


어느새 나타난 당근 머리 남자가 팔로 내 몸을 지탱해 눕혀줬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숨이 트인다.


“불안증이 재발했구나. 너는 옛날부터 그랬지. 너무 어린 나이에 책임감을 가져버린 거야. 아무에게도 말 못 할 책임감을. 괜찮아 올가마리.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힘들었지. 잠깐만 쉬자.”


로망의 진지한 모습은 처음 봤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왜 여성 스태프에게 인기 있는지 알 것 같아.


“있지 로망...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인류를...사람들을...”


목이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폐 속에 가득했던 물이 이젠 목으로 넘어왔다.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이런 말은 한 적 없는데.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속마음을 뱉어내자 잠기운이 몰려온다.


수면제의 효과가 이제 돌기 시작한다.


“괜찮아 올가마리. 모든 게 잘 될 거야.”


그런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마. 로망 주제에.


평소처럼 헤실헤실 웃으면서 실없는 소리나 하란 말이야.


”로망...나 졸려...“


“피곤했지. 잠깐만 눈 좀 붙여.”


“응...졸리니까...의사니까...잘 때까지...어디 가지 마...”


“나는 여기에 있어. 걱정하지 마 올가마리. 잘 자렴.”


나는 밀려오는 잠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미쳤어. 완전 미쳤어. 말도 안 돼. 내, 내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으아아앗!”


다음 날 아침.


오늘은 이불 바깥으로 안 나가기로 결심했다.


설사 오늘 당장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도 로망의 얼굴은 못 봐!


“으으으으...왜 그런 말을 한 건데...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읏...이, 이제 어쩜 좋아아아...소장 때려치우고 싶다...”


그건...안...되겠지...


기억을 지우는 약물은 없나? 로망에게 부탁해서 두 개 구한 다음에 하나는 로망에게 억지로 먹이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먹을까.


아니면 머리를 콱! 하고 내려치면 기억이 사라질까?


“으으으으으읏....으읏...으우우우우우우우우웅...!”


김밥처럼 돌돌 말린 이불 바깥으로 얼굴만 뿅 내밀었다.


침대 맞은편에는 칼데아에서 지급하는 여성 스태프 표준 제복이 걸려 있다.


하늘하늘한 프릴 치마가 마음에 안 들어서 바지만 입고 다녔는데.


“치마...입어볼까.“





엄청 길어졌긴 한데 한번에 전부 만에 올리면 1화가 아닐?까?


fgo 몰라도 알 수 있도록 복잡한 설정이나 설명은 최대한 배재하고 써 봤는데 잘 이해될진 모르겠네


물론 모든 패러디가 그렇듯 fgo 원작 스토리나 설정을 알면 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