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여우가 있었다.

사람의 흔적이 닫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어린 여우가 있었다.

언제부터 인지, 어떤 이유에서 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곳에 어린 여우가 있었다.

 

 

어린 여우는 몹시 배가 고팠다.

굶주림에 지쳐 산 속을 헤매이던 여우는 늙은 도사와 마주쳤다.

늙은 도사는 어린 여우에게 과일들을 건네주었다. 

어린 여우는 음식을 건네는 도사의 눈에서 헤어진 부모를 추억했다.

 

 

여우는 도사의 주변을 맴돌았다.

늙은 도사와 함께 생활하며 여우는 지혜를 얻었고, 사람의 언어를 배웠으며, 도술을 흉내 내었다.

여우가 성장하여 능히 사람의 형상으로 둔갑할 즈음

여우의 스승이자 부모 된 자는 등선하였다.

여우로 인해 진리를 깨달았으며,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그는 떠났다.

 

 

여우는 다시 홀로 남겨졌다.

산 주변에는 온갖 짐승과 요괴, 요물들이 가득했지만 여우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성장한 젊은 여우는 강했다.

스승에게서 배운 지혜와 도술은 여우에게 큰 힘을 주었다.

여우는 강력한 도술을 발휘하여 산의 짐승들과 요괴들, 영물들을 다스렸다.

그러나 젊은 여우는 무료했다.

산에 틀어박혀 살기엔 젊은 여우는 지나치게 힘이 넘쳤다.

 

 

어느 날, 우연히 산에 인간이 흘러 들어왔다.

젊은 여우는 호기심에 눈을 반짝였다.

깊은 산에서 빠져나가도록 인간을 인도하며 여우는 뒤를 쫓았다.

그리하여 젊은 여우는 속세로 내려올 수 있었다.

 

 

젊은 여우는 작은 마을에 당도했다.

마을 인간들의 생활을 보며 여우는 자신의 유년기를 떠올렸다.

여우는 스승에게 받은 호의를 속세의 인간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젊은 여우는 도술을 발휘하여 인간들을 도왔다.

가뭄이 있을 때엔 비를 내려 기근을 방지했고

짐승과 요괴들의 위협 또한 해결해주었다.

그로 인해 젊은 여우는……

사냥 당했다.

 

 

인간들은 교활하며 또한 어리석었다.

여우의 도술을 찬양하고, 숭배하는 인간들도 있었으나

두려워하고 시기하며 질투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여우로 인해 가뭄이 왔노라고 말했다.

그들은 짐승과 요괴들 또한 여우가 불러온 것이라 말했다.

모든 것은 인간들을 홀리기 위한 사악한 여우의 계략일 뿐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개중에는 젊은 여우의 능력을 탐하는 자들 또한 있었다.

그들은 여우를 죽이고 내단을 쟁취하여 그 모든 힘과 능력을 빼앗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주변의 도사들을 불러모아

젊은 여우를 사냥하려 하였다.

 

 

허나 사냥은 실패에 그쳤다.

젊은 여우는 큰 상처를 입었으나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상처입은 젊은 여우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스승과 같지는 않다는 걸

인간들의 욕망은 여우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다는 걸

질투와 탐욕에 눈이 먼 인간들은 젊은 여우에게 화답했다.

따뜻함엔 차가움으로

선의엔 악의로

행복한 추억엔 끔찍한 악몽으로

 

 

그리하여 여우는 결심하였다.

깊은 산에서 그리하였던 것과 같이, 인간들 또한 힘으로 다스리겠노라고.

여우는 힘을 갈망했다.

모든 인간들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더 이상 상처입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상처에서 회복한 여우는 닥치는대로 힘을 갈취하기 시작하였다.

인간과 요괴, 영물을 가리지 않고 힘을 빼앗았다.

피와 탐욕에 젖은 여우는 빠르게 힘을 키워 나갔다.

여우가 크게 성장할 때마다 그에겐 꼬리가 하나씩 늘어났다.

꼬리는 승리와 찬탈의 증표이자 힘과 탐욕의 증명이기도 했다.

여우는 자신의 꼬리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여우는 탐욕의 여정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윽고 여우의 꼬리가 아홉 개가 되었을 무렵

온 세상이 여우를 두려워하였다.

 

 

강력한 힘을 가진 여우에겐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추종자들은 여우의 힘을 두려워하며 동시에 선망했다.

그들은 경외심을 담아 여우를 칭송하였다.

위대한 구미호라고.

 

 

위대한 구미호와 그의 추종자들은 인간들의 나라를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그들은 압도적인 힘의 논리 아래 빼앗고, 부수며, 복종시켰다.

위대한 구미호는 냉정하며, 동시에 잔인했다.

그는 하늘 아래에 오직 위대한 구미호만이 존귀하다 설파하였다.

공포와 굶주림을 전파하며 절대적인 복종만이 구원이라고, 그는 외쳤다.

 

 

위대한 구미호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그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그의 포악함은 더욱 깊어져 갔다.

위대한 구미호는 이제 그의 추종자에게조차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의 압도적인 힘은 거역할 수 없는 족쇄가 되어 하늘 아래 모든 이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었다.

그 처절한 공포가 인간들의 세상 대부분을 뒤덮고,

이윽고 마지막 학살만을 남겨 두었을 때

위대한 구미호는 또다시 배반당했다.

 

 

위대한 구미호의 흉폭함은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분열을 초래했다.

소수는 공포와 고통마저 찬양했으나 대다수는 두려움에 떨며 등을 돌렸다.

마지막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들은 추종자들에게 제안했다.

함께 위대한 구미호를 제압한다면

그의 휘하에 있던 세상을 나누어 주겠다고.

이로 인해 추종자들은 더 이상 맹종하지 않게 되었다.

 

 

위대한 구미호는 하늘 아래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과 싸우게 되었다.

그는 압도적인 힘을 가졌으나 맹목적인 고독에 짓눌렸다.

그것은 처절한 투쟁이었다.

위대한 구미호의 주변에는 항상 피와 시체만이 가득했다.

위대한 구미호는 그의 힘으로 세상 모든 것을 부술 듯이 저항하였으나,

하늘의 의지는 제아무리 위대한 구미호라 할지라도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다.

지속되는 사투 속에서 위대한 구미호는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

 

 

그가 힘을 잃어감에 따라 그의 꼬리도 하나씩 사라져 갔다.

그것은 다른 이에게서 빼앗은 힘의 증표이지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는 당연한 이치였다.

초라해지는 여우의 모습과는 상반되게 공세는 더욱 거칠어졌다.

이윽고 세상이 여우를 향해 마지막 활시위를 당길 때, 여우는 최후의 힘을 발휘하여 간신히 숲으로 도망쳤다.

숲으로 도망친 여우에게는 커다란 상처와 단 하나의 꼬리만이 남아있었다.

이렇게 위대한 구미호는 다시금 상처입은 여우가 되었다.

 

 

여우는 다행히도 운이 좋았다.

상처입고 쓰러져 있던 여우를 한 소녀가 거두어 주었다.

소녀는 여우를 숲 속에 있는 마을로 데려가, 보살펴 주었다.

그 마을은 혼세의 전란을 피해 도망친 자들의 안식처였다.

의식을 찾은 여우는 다짐했다.

이 곳에 잠시 몸을 숨겨 회복한 후, 다시금 세상에 나가 복수하겠노라고.

 

 

다만 한 가지, 여우를 언짢게 하는 것이 있었다.

소녀였다.

여우는 소녀를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윽고 여우가 몸을 회복하여 네 발로 걷기 시작할 무렵, 소녀의 강한 포옹을 받으며 여우는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소녀의 품에서는 과일과 봄의 향기가 났다.

과거, 여우가 깊은 산 속에서 만끽하던 행복이 거기에 있었다.

여우는 소녀의 눈을 보며 먼저 떠나간 그의 스승을 떠올렸다.

 

 

여우는 고뇌했다.

피와 탐욕, 증오와 복수.

여유와 만족, 소소한 행복들.

여우는 이내 지쳐버렸다.

결국 여우는 모든 것을 털어버리기로 했다.

과거로부터 그를 속박하고 있던 악몽의 사슬을 깨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여우는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히 여생을 보내기로 다짐했다.

다만 운명은 여우를 그렇게 두지 않았다.

 

 

소녀였다.

여우를 구해준 그 소녀는 불치의 병이 있었다.

지나가던 도사는 전설속에서나 등장하는 묘약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고 했다.

소녀의 여생은 5년이 채 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여우는 병상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여우에게 있어 소녀는 생명의 은인이자 마음의 구원자이기도 했다.

여우는 결심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도움을 주기로.

 

 

여우는 묘약을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났다.

허나 숲을 빠져나와 다시금 속세로 내려온 여우가 마주한 것은

자신의 업보였다.

세상은 여우가 지배했을 때보다 더 피폐했다.

여러 요괴들의 지배 하에 놓인 세상은 요괴들의 세력 싸움으로 인해 더더욱 황폐해졌다.

인간의 도사들은 과거 위대한 구미호와의 결전에서 입은 상처로부터 아직 회복하지 못하였다.

인간들은 요괴의 지배 하에서 벌레처럼 짓밟히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우는 막막했다.

묘약을 찾기 위해선 인간들의 도움이 필요했으나

인간들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결국 여우는

자신이 뿌린 죄악의 씨앗과 열매를

자신의 손으로 거두기로 하였다.

 

 

여우는 인간들을 도와 요괴를 퇴치하기 시작했다.

비록 대부분의 힘을 잃은 그였으나 스승에게 물려 받은 지혜로 대신하였다.

그럼에도 고된 일이었기에, 여우는 틈틈이 수행을 쌓았다.

여우는 이제 힘을 빼앗지 않았다.

오로지 그 자신만의 힘으로 본인의 업보를 청산하고자 했다.

신기하게도, 과업을 해결할 때마다 여우는 새로운 힘을 얻어갔다.

그와 함께 새로운 꼬리도 돋아나며,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영롱한 빛을 띄었다.

허나 여우는 더 이상 꼬리가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것은 본인이 저질렀던 죄업의 상징이자 속죄의 징표일 뿐이었다.

여우는 자신의 꼬리를 절대로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하였으며, 인간들 중 누구도 그를 여우라 의심하지 않았다.

 

 

여우의 여정은 계속됐다.

여우는 묘약을 찾는 한편 자신의 과오 또한 해결해 나갔다.

여우의 꼬리는 점점 늘어났고, 그와 함께 후회 또한 커져 갔다.

이윽고 여우의 꼬리가 다시 아홉 개가 되었을 무렵, 인간의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다.

세상 사람들은 여우를 신선이자 구원자라 칭송했으나, 여우는 몹시 상심했다.

여우는 결국 묘약을 찾지 못했으며, 오직 본인의 죄업만이 그 곳에 있었을 뿐이었다.

 

 

여우는 다시 소녀에게로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 소녀는 성장하였으나 몸은 더 야위어져 있었다.

병상 위 소녀의 팔은 겨울 나무의 가지처럼 앙상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여우는 소녀의 눈 빛 깊숙한 곳에서 보았다.

따스한 봄바람과 과일의 향기를.

소녀의 마음은 여전히 여우의 그리움을 자극했다.

 

 

여우는 고민했다.

긴 여정을 통해 여우는 자신의 죄업을 실감하고 큰 후회에 점철되었다.

이대로 고향에 돌아간다 한들 여우는 후회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뿐일 것이다.

하여 결심하였다.

자신의 남은 삶을 소녀에게 주기로.

 

 

깊은 밤, 여우는 소녀의 병상에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내단을 꺼내어 소녀의 입에 집어넣었다.

여우는 소녀의 몸에 들어간 내단을 녹여 밤새도록 소녀를 치유하였다.

과거, 소녀가 그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듯이.

그리하여 이튿날 아침, 소녀는 완전히 생기를 되찾았다.

의원이 보고선, 이제는 정상인처럼 살아갈 수 있다 하였다.

하늘이 내려준 기적이라고도 하였다.

 

 

여우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몸은, 속이 비어 말라 비틀어진 나무 껍데기와도 같다고.

푸석푸석하게 건조되어 언제 바스러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여 여우는 소녀를 향해 태연하게 말했다.

잠시 고향에 다녀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리고 떠나기 전, 여우는 소녀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곳엔 생명력 넘치는 푸른 숲이 있었다.

 

 

여우는 지친 몸을 이끌고 간신히 깊은 산 속까지 도달했다.

여우는 자신의 거처였던 동굴에 들어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회상했다.

따스하고 행복했던 유년기.

배신과 증오가 넘쳐났던 청년기의 과오들.

그리고 그것들을 주워 담으며 했던 수많은 후회들과

마지막으로 보았던 소녀의 눈을.

 

 

여우는 참으로 후회될만할 짓들을 많이 하였다.

그리고 여우는 지독하게도 후회의 늪에 빠져 살았다.

허나 건강해진 소녀의 눈을 떠올리며 여우는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았다.

조용히 눈을 감으며, 여우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였다.

 

 

찬란한 빛이 보인다.

빛을 뚫고 가자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익숙하고도 그리운 얼굴이 보인다.

늙은 도사.

여우의 스승이자 부모.

 

 

여우는 늙은 도사에게 뛰어 갔다.

늙은 도사가 무어라 말하였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이내 늙은 도사는 손을 내밀어 여우를 쓰다듬었다.

따뜻하고도 상냥한 손길에 여우는 마음이 풀어졌다.

늙은 도사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여우를 꼭 안아줬다.

그리고 곧, 도사는 다시 떠나갔다.

그러나 여우는 아쉽거나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한 만족감에 잠들었다.

 

 

봄날이 밝았다.

깊은 산 속 어느 동굴 속, 어린 여우가 있었다.

찬란한 은빛 털과 영롱한 금빛 눈을 가진, 어린 여우가 있었다.

잠에서 깬 어린 여우는 열 개나 되는 자신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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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글 첨 써봄.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호평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