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적인 옷을 입은 남자가 웃으며 인사하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이계와의 전쟁을 시작한 이후 아카데미 역시 일시 폐쇄되었고, 모두 집에 돌아가 무기한 대기하라는 소리만 듣고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약 5개월이 지난 뒤, 갑자기 전원 즉시 아카데미로 복학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죄송합니다만, 지구가 뭐죠?"


"하하, 여러분들의...뭐라해야하나...지도층? 분들이 겁대가리 없이 침략했던 행성의 이름이랍니다. 아, 행성이라는 개념을 모르나? 그냥 지역 이름이라고 합시다. 네. 자, 교재는 자리 하나도 빠짐없이 제가 미리 준비해서 올려드렸으니, 부담 갖지 마세요. 자리가 부족하면 이야기하시고요."


그 말에 학생들은 눈앞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쓰던 교재와는 차원이 다른, 깔끔하고 뻣뻣한 종이로 된 새 책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아, 다들 종이에 안 베이게 조심하시고요. 아무래도 이런 뒤떨어진 장소와는 생산하는 종이의 질이 다르다보니."


대놓고 비웃음을 머금은 말을 듣고도, 대다수의 학생들은 가만히 있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랐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이계의 강사라니? 이 아카데미에서? 그렇다면 몇 달째 부재중인 제국의 황제, 엘프들의 여왕, 마탑의 탑주 같은 이들은 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하지만 몇몇-이를테면 야만인 부족장의 아들인 칼-등은 생각하는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으레 생각을 하지 않는 이들의 행동원리는 단순한 법이었다.


쾅!


이계인이 선 탁자에, 투박한 도끼가 날아가 꽂혔다. 하지만 꿈쩍않는 그의 모습에, 칼의 눈썹이 꿈틀했다.


"야."


"여긴 강사에게 반말을 하는게 보통인가요?"


"지랄 말고. 너 뭐냐? 생긴 것도 비리비리하게 생긴 놈이 여기서 나대는 것도 그렇고. 너네 쪽으로 간 우리 할아버지랑 아버지는 어디 갔어?"


"허어...뭐, 좋습니다. 차라리 이 편이 설명하기 편할지도 모르겠네요. 초면에 무기나 쳐던지는 꼴을 보니 여기가 아무리 미개해도 제법 높으신 분인가 본데...할아버지랑 아버지 성함이 뭐죠?"


"스타크. 아칼."


"아, 그 '부족의 정신은 꺾일 수 없다!'느니 뭐니 같잖은 개소리를 하던 놈들? 걔네가 학생 가족이었어요?"


"뭐 이 새끼야?!"


흥분한 칼이 달려들었다. 물론 칼도 나름대로 판단의 근거는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다지 다부진 체격은 아니었고,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기를 든 상태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그에게서 힘으로 도끼를 빼앗았다.


그래, 칼이 도끼를 빼앗겼다. 학생들 모두가 경악했다. 다른 건 몰라도 힘으로는 전교 최강이던 칼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무기를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가 황망한 눈으로 텅 빈 손을 바라보던 중, 이계인이 입을 열었다.


"초면에, 그것도 강사에게 반말, 욕설, 그리고 상해 시도까지. 원래라면 당장 감방에 들어갔겠지만...여러분같은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어차피 제대로 된 예의는 기대 안 했습니다. 자,"


남자는, 그대로 칼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려 자리로 내던졌다. 그는 부딫히긴 했지만, 정확히 자신이 앉던 자리에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충돌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상자같은 물건을 꺼냈다. 그가 그 위에 달린 조그만 단추 같은 것들을 누르자, 칠판에 화면이 떠올랐다.


"살려다오! 살려만 다오! 제발...그것...그것...몰...피? 모르...핀? 제발 그것을...!"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목숨만..."


그리고 그 안에서, 야만인 하면 떠올리는 복장을 한 두 명의 남자가 넋이 나간 얼굴로 미친듯이 중얼거리는 모습이 나왔다. 칼은, 언제나 당당하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충격에 빠졌다.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느니 전사의 맹세니 헛소리를 길게도 하던데...신경계에 고문 장치를 꽂아서 몇 번 지져주고, 마약 몇 번 넣어줬더니 저렇게 되던데요? 의지를 꺾을 수 없다라...그건 의지를 제대로 부러뜨리는 법을 모르는 이런 곳에서나 통하겠죠."


이계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참고로, 저렇게 된 건 저 분들만이 아니랍니다."


그가 다시 한번 리모컨을 조작하자, 화면이 넷으로 갈라졌다. 각기 다른 화면을 보고, 학생들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불타오르는 세계수, 철로 된 무언가에 고개를 숙인 채 구속되어 이계인들에게 둘러싸인 엘프들의 여왕.


뒤에서 울리는 불쾌한 소음을 덮어버릴 정도로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는 마탑주.


사지가 잘린 채 구타당하는 황제.


그리고, 세계 최강이라던 전 용사 아인의 몸에 빛이 내리꽂히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


이 세계의 지도자들, 최강자들 전부가 무력하게 제압되어 있었다.


"저기 귀 긴 분은...뭐 별 거 없더라구요. 숲 중간에 큰 나무...저거 좀 태웠더니 뭐라뭐라 소리만 질러대길래 대충 마취총으로 기절시켜뒀고. 노친네는 자꾸 저희 쪽 높으신 분들이 이상한 짓을 하시길래 뇌파 검사를 돌렸더니 왠걸, 뇌파가 이리저리 요동치더라구요? 바로 주변에 열감지 카메라 돌렸더니 변태마냥 음습하게 숨어있던 노인네를 찾아서 바로 제압하고, 음파병기로 정신 못차리게 해 줬죠. 그 최면인지 뭔지, 인공지능 로봇에겐 안 통해서 다행이죠. 하기사 나중엔 그것도 안 통하는 정신 보호구가 금방 나왔지만."


"아, 웃긴게 마법산지 뭔지하는 거적때기 뒤집어 쓴 인간들은 좌표나 중력이 여기랑 달라서 그런가 순간이동 비슷한 걸 하다가 온 몸이 찢어져서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게 아마 여러분이 한 일 중에서 제일 무섭지 않았을까요?"


이계인은 낄낄거리며 창백해진 학생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꼴에 뭐 황제니 어쩌니 수천년 전에 사라진 계급제 어쩌고 하는 아저씨는 안타깝게도 병사들의 화를 너무 돋구셨나 봐요. 그래도 숨은 붙어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아, 저 갑옷 입으신 남자분은 좀 까다롭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제발로 사막에 가주신 덕에 머리 위에 궤도 레이저를 꽂아줄 수 있었지만."


공포에 질린 학생들의 앞에서 이계인은 미소지었다. 그는 부드럽게 책상에 박힌 칼의 도끼를 들어올려 그대로 깨부쉈다.


"흠. 역시 열등한 기술로 만든 조잡한 무기라 그런지 강도가 형편없네요. 이정도면 그냥 맞아줬어도 이 슈트에 흠집도 못 내겠지만...그래도 옷이 찢어지는 건 불쾌하니, 무기는 압수인 걸로."


그는 부스러기를 대충 털어내고 말을 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저희한테 전쟁 선포도 없이 난입해서 민간인 학살까지 저지른 여러분들을 보고 처음엔 다들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궤도 폭격으로 여길 아예 날려버리려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만."


"이곳의 신인지 나발인지가 자원이란 자원은 전부 내주고, 두번 다시 침략하지 못하게 할 테니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싹싹 빌기도 했고...뭣보다 저희는 여러분 같이 미개한 야만인이 아니라 지적인 문명인이라서요. 적어도 직접 동참하진 않은 여러분께 기회를 드리기로 했어요. 짐승같은 본능을 버리고, 문명을 받아들일 기회요."


남자는 리모컨을 조작해 화면을 바꿔, 강의용 프레젠테이션을 켰다.


"쉽게 말해서, 여러분을 포함한 이 차원의 지성체가 '멸종시켜야 할 해수'인지 아니면 그래도 '가르치면 알아는 듣는' 그냥 엄-청나게 무식하고 못 배워먹은 '유사인간'인지를 여기서 시험할 거라는 뜻입니다. 만약 저희가 전자라고 판단을 내리면...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리 멍청해도 짐작할 수 있죠?"


학생들 전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여러분, 공부 열심히 해야겠죠? 자, 교재 33쪽을 펼치세요."


아무도, 그에 거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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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가 민간인인 먼 미래의 지구를 얕보고 함부로 침략을 강행했다가 영혼까지 줘털리고, '미개한 야만인'들을 교육한다는 명분 아래 식민지화를 차근차근 진행하는 유사 피카레스크물.


판타지에 맞서 호모 사피엔스의 혐성과 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런 거 누가 안 써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