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참 어려워요."



남자는 눈앞의 캔버스에 목탄을 대고 구도를 재며 입을 열었다.



"아, 맞아요, 그렇죠. 그 직선이며, 구도며."



적당히 말을 주워섬기며, 나는 언제나처럼 기분을 맞추기에 애썼다.



"그런 건 연습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비례? 색감? 수천수만 번 하면 누구나 해요, 마치 집에서 스튜를 끓이듯. 하지만 흠, 잠시만요."



남자가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에 담겨있던 보자기에서 덩어리를 꺼내자, 좁은 방 안이 혈향으로 가득 찼다.



"제가 말하려는 건 조금 더 추상적인 것이죠."



조금 덜 마른, 검붉고 조금은 푸른 빛까지 도는 그 덩어리가 캔버스에 짓뭉개지듯 선을 남기자,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아, 그대가 여기 있어선지, 시작이 좋군요."


"원체 실력이 좋으신 이유겠지요."



기분이 좋아진 남자는 손을 연신 놀리며 입으로는 쉼 없이 말을 뱉었다.



"정성껏 채취해 말리고, 흔적을 남기기까지. 품이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끊긴 이야기를 이어가겠다는 듯, 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남자는 즐거움이 가득 담긴 어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림이 어려운 이유는, 그리는 사람이 그 안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정교한가? 어디에 노력을 쏟았는가? 어떤 시선으로 보았는가, 아, 더 말해봐야 귀만 아픈 수준일 터. 캔버스 안엔 사람이 담겨 있어요.


나, 그리고 나를 구성하는 세계. 해바라기를 그려도, 밤하늘을 그려도, 바다를 그려도, 헤어짐인가? 무한함인가? 희망인가? 절망인가?"



여느 뮤지컬처럼 과장스레 말하던 그가 입을 다물고 갑작스레 손이 멈추고, 뒤통수에서도 그 미소가 느껴질 즈음이 되자. 진득한, 희열에 찬, 열정적인 목소리로 이어나간다.



"그리고 말입니다, 희망은."



그리곤 뜸을 들이다 대단한 비밀을 말해주듯.



"잘 안 팔려요."



라며 말했다.



"굶주리고, 춥고, 낡고. 그러면 내 세상엔 자연히 절망이 차오르지요. 아, 사람들은 절망에 열광합니다, 아주 미칠 듯 열광해요. 연극에선 만나지 못한 남녀가, 글에는 험난한 시대가, 그림엔 혼란이! 전국에는 영웅의 그림보다 악당의 그림이 잘 팔리는 법이지요!"


"죄송하지만, 전 동의 못 하겠습니다."



내 말에 다른 색 없이 검붉게 색칠되던 그의 자부심에 길고 어두운 스크래치가 그어졌다.



"굶주린 자들의 그림이 팔리는 것은, 굶주렸음에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의지고. 악당의 그림을 구매해 파괴하는 건, 여린 힘으로도 구현하고자 하는 정의입니다. 또한 아시다시피, 세상은 그 두텁고 어두운 절망을 뚫고 나오는 영웅을 사랑하기에 열광하기 마련입니다."


"아, 하하, 그래요?"



남자는 웃으며 내 말을 받았지만, 나는 그 웃음에 내재한 닥치란 비명을 듣지 못할 만큼 천치는 아니었다.



"제가 이래서 당신을 좋아하지요."



짓뭉개진 끝을 매만지던 남자는 다시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천 조각으로 덩어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이런 우연이, 실수가 명작을 만들어 주니까."



분위기는 예상했던 만큼 싸늘했다.


남자는 내 언동을 우연과 실수로 치부해 덮어주고, 나는 입을 다물고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고.


그러면 조용해진 분위기에서 축객령을 받곤, 방 밖으로 나서 일상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그랬다.



"아니, 글쎄요."



이번엔 달랐다.



"있잖습니까, 현 씨."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언제나 제일 늦는 게 후회라고 했나.



"저는 바로 지금이. 명작을 만들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남자'는, 아, 내가 지금까지 '남자'라고 생각해 왔던 존재는, 정성스레 싸매던 천을 다시 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혐오스러운 덩어리는 오간 데 없고, 손잡이 없는 반짝이는 칼날만이 랜턴의 빛을 반사하며 예기를 뽐냈다.



"아, 현 씨, 내 가장 아름다운 작품."



전신이 돌이 된 것처럼 굳고.


예감은 미친 듯 경종을 울리고.


소름이 전신을 질주하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신다.



"지루하고, 단조롭고, 무난하고, 겁 많고."



그러곤 한참을 뜸을 들이다 지금이라는 듯이 내뱉는다.



"정의롭고."



미소와 터트리기 직전의 광소. 그는 그것을 즐기듯 그 사이 지점에 멈춰 서 흥얼거리듯 말한다.



"솔직히, 중간에 제물이 바뀌면 어쩌나 고민했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지는군요! 그럴 리 없는데도. 자진하여 제물이 되고, 돌려보내고, 자진하고, 돌려보내고. 기억 못 하는 것처럼! 진짜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까? 특별했기에 살아남았다고? 그 알량한 정의감으로? 혹은, 뭐. 행운? 운명?"



횡설수설하던 존재는 황홀경을 느끼는 듯 부르르 떨었다.



"하아아. 이거 정말, 기대 이상의 명작이군요."



존재가 가볍게 휘두른 단검의 날에 캔버스가 스크래치대로 부욱, 찢어진다.


가볍게 갈라진 캔버스 뒤로는 검은, 너무도 검은 어둠이 랜턴의 빛을 살라 먹으며 피어났다.


어둠은 세상을 태우듯 조금씩, 아주 조금씩 커져 캔버스를, 랜턴의 빛을 집어삼켰음에도 그 존재만은 더욱 밝게 비추는 듯 보였다.


그렇게 나와 어둠만이 남은 세상에.


가장 절망이 깊은 순간에.


존재가 가볍게 휘두른 손가락에.


나는 선명하게 죽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외신/다크 판타지/인간찬가 쓰깐걸 읽고 싶은 하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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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알러지있음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