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상고시대(上古時代).


태초의 세상은 용이라 불리는 거대한 영물들이 중원 천지의 정점에서 군림하던 세상이었으니.


세상 영물에 오직 용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온갖 난다 긴다 하는 영물들 중에서도 거대한 몸에 강인한 근골을 가진 용들을 천하는 으뜸으로 꼽았다.


심지어 용들은 지상에서 네발 두발로 걷는 것이 있었는가 하면, 물에서 사는 것도 있었으며 날개가 있어 날 수 있는 용들도 있었으니, 인중여포(人中呂布) 이전에 영중용(靈中龍)이 있었노라.


그런 연유로 상고시대의 천(天), 지(地), 해(海)는 용들의 터전이었으며 지배지라 할 수 있었으니.


상고시대는 용들의 시대였다 칭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러나... 대저 천하의 대세란 오랫동안 나뉘면 반드시 합하게 되고, 오랫동안 합해져 있다면 반드시 나뉘게 되듯이, 용들의 시대 역시 끝을 고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상고시대의 용들은 세상천지의 지배자였고, 그중 육식을 즐기는 용들은 오만하고 교만하여 함부로 인간과 다른 영물을 잡아먹는 등 포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에 원시천존께서 용들을 벌하기 위해 밤에서 별 하나를 떼어 천하에 떨어트리니, 떨어진 별은 빛을 잃고 거대한 바윗덩이가 되어 연안 바다에 떨어졌다.


바다에 떨어진 별은 이윽고 천지를 뒤흔들며 짙은 먼지구름을 만들어내 하늘을 덮으니, 천하엔 몇 년이 넘도록 혹한이 불어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였다.


이 같은 재앙에 용을 비롯해 세상 모든 피조물이 굶주렸는데, 용들은 거대한 몸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가장 많이 죽어나갔다.


이에 용들이 원시천존께 잘못을 빌며 간절히 용서를 청하니, 원시천존께서도 용서를 받아들여 자비를 베풀었다.


바로 하늘을 가렸던 먼지 구름을 거둬들인 다음, 용들의 몸을 사람처럼 바꾸어 사람과 함께 살아가도록 명한 것이었다.


용들은 거대한 몸과 그로부터 나오던 위엄을 잃었고 근골도 예전만 못해졌으나, 그 대신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도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상고시대는 끝을 맺었고, 비로소 용인이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는 진한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비록 대재앙의 여파로 오늘날 상고시대에 대한 기록은 입으로만 구전되어 온 것이 전부이나, 작금의 천하를 살아가는 용인들은 분명 상고시대 고대룡들의 후예로서...]


“공룡오적 같은 소리하고 있네. 뭐, 이 시대 사람들 발상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겠지만...”


바위에 걸터앉아 서책을 뒤적거리던 삿갓 쓴 남자는 피식하더니 그것을 모닥불에 던져넣었다.


모닥불에 몸을 담근 서책은 곧 붉은 불길에 삼켜져 훌륭한 불쏘시개가 되었다.


다만 그럼에도 모닥불의 불꽃은 그리 강하지 못했으나, 무공을 익힌 삿갓의 남자에겐 그 정도로도 충분한 밝기였다.


“원래 같았으면 운석 떨어진 시점에서 그냥 몰살이었는데 이걸 사네. 덤으로 진화론까지 엿 먹이고.”


삿갓의 남자는 오른손으로 삿갓을 올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무가 울창한 고갯길, 어둑어둑한 하늘엔 수백 수천개를 넘는 별들이 알알이 박혀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삿갓의 남자 주변에 널브러진 시신들과 대조될 정도로.


시신들은 모두 대여섯 정도 되는 수에 건장한 성인 남성이었는데, 하나같이 남루한 가죽옷 행색에 도(刀)로 무장하고 있었다.


“응?”


삿갓의 남자는 문뜩 나무에 기댄 채 죽은 한 시신의 얼굴에서 뭔가 기시감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옆에 세워둔 말의 안장에 걸어둔 행낭을 뒤적여 종이를 꺼냈다.


종이의 정체는 현상수배지였다.


삿갓의 남자는 혀를 내밀고 죽어있는 시신에 수배지를 가져다 대어 얼굴을 비교했다.


남자의 지식에 의하면, 오리주둥이처럼 납작한 입에 머리 뒤쪽으로 뻗어있는 약 1m 길이의 구부러진 볏이 특징적인 이 용인의 정체는 파라사우롤로푸스였다.


그러나 지금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 용인의 종이 뭔지가 아니라 이 자의 볏에 세로로 길쭉한 흉터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으니.


“얼씨구, 이녀석 현상금이 두둑하게 걸려있었네? 운이 좋았군.”


난데없이 습격해왔길래 되받아쳐 죽였더니 꽁돈이 생긴 격이라 삿갓 쓴 남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처음 산적에게 습격받았을 땐 재수가 없으려니 했는데, 이런 것도 나름 새옹지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런 게 칼 위의 인생이지.”


삿갓 쓴 남자는 수배지를 고이 접어 품 안에 넣고는 모포를 덮고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정오쯤 가까운 현(縣)에 도착한 삿갓 쓴 남자는 무림맹 지부에 산적의 시신을 넘기고 현상금을 수령했다.


“휘유.”


현상금의 액수가 나름 쏠쏠함을 확인한 남자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다름아닌 객잔이었다.


객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삿갓 쓴 남자를 반기는 것은 가벼운 소음이었다.


상평통보처럼 중심이 비어있어 1층에서 2층 3층을 올려다볼 수 있는 객잔에는 층마다 손님들이 붐볐다.


손님들은 점심 식사를 때우러 온 손님부터 마작을 치는 손님 등 각양각색이었다.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삿갓의 남자에게 몇몇 손님들의 시선이 쏠렸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곧 점소이가 삿갓의 남자에게 다가왔는데, 드물게도 얼굴 제법 반반하다 말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일부 손님들의 시선이 그녀를 흘끗거리고 있는 걸로 보아, 아마도 이 객잔에서도 나름 유명한 간판미인이리라.


“어서오세요, 식사신가요?”

“우선 교자만두 한 접시에 값싼 걸로 백주 하나.”

“십삼 냥입니다. 자리는 아무 곳이나 빈 곳을 찾아 앉으면 돼요!”


점소이에게 철전을 던져준 남자, 강림은 한쪽 구석의 빈 자리로 가서 허리춤에 매인 칼을 칼집째로 풀어 식탁 옆에 세워뒀다.


그런데 삿갓을 벗자 드러난 강림의 얼굴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얼굴을 포함해 몸 전체의 피부를 덮은 오돌토돌한 파충류의 녹색 비늘.


큰 주둥이에 빼곡히 붙은 크고 날카로운 이빨까지.


강림의 머리는 아무리 봐도 도마뱀 같은 파충류의 머리였다.


흡사 요괴로 착각할 법한 외형이었으나, 객잔의 손님들은 놀라긴커녕 강림의 행색만을 쓱 훑고는 곧 관심을 끄고 각자의 밥그릇이나 마작패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보기에 강림은 그냥 이 중원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랑 낭인이요, 용인(龍人)이었던 까닭이다.


강림은 먼저 나온 백주를 술잔에 따라 홀짝이면서 복잡한 심경에 잠겼다.


‘새삼스럽지만 언제봐도 이질적인 광경이군.’


강림의 시야에 들어온 객잔 안을 채운 손님들.


이들은 절반은 부드러운 살색 피부를 가진 인간이었지만, 절반은 자신처럼 비늘 피부로 뒤덮인 공룡인인 까닭이다.


당장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에 가까운 통구이를 우두둑 뜯어먹는 저 사람은 강림과 같은 티라노 공룡인이었고, 2층에서 인간 남성과 뭔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이 또한 공룡인이었다.


부채처럼 쫙 펼쳐진 머리깃과 이마에 곧게 돋아난 두 뿔로 보아하니 트리케라톱스 공룡인이겠지.


한편 강림 역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직전 객잔의 손님들이 그러했듯 객잔 안을 채운 사람들의 면면을 훑었다.


그들의 3분지 2정도 되는 사람은 현지의 농민이나 상인들이었고, 나머지 3분지 1은 강림처럼 떠돌이 낭인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국수를 먹거나 마작패를 놓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등, 강림 입장에서도 공룡인만 없었다면 딱히 특별할 것은 없는 광경이었다.


사실 이 중원천지에서 용인과 인간이 함께 살아온 역사가 못해도 자그마치 천년이 넘어감을 감안하면, 강림이 느끼는 감상이 오히려 이질적인 것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환생을 해도 뭐 요지경인 세상에 환생을 하나.’


그도 그럴게, 강림은 환생자였으므로.


21세기 현대인일 뿐만 아니라 온갖 무협물을 읽어봤던 그로서도 공룡 수인이 용인이라 불리며 인간과 살아가는 이 세상은 퍽이나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몸도 티라노 공룡인으로 바뀐지라 유소년기 때는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었고.


‘하지만 그 구정물을 퍼마실 순 없었단 말이지.’


강림은 저승에서의 짧은 기억을 떠올렸다.


‘빌어먹을... 유럽 저승도 아닌데 환생에 앞서 망각의 물이랍시고 시꺼먼 하수구 물을 먹이려 하다니. 망할 놈이, 저승사자면 다야?’


그래서 그 하수구 물을 저승사자의 안면에 흩뿌리기로 뿌려줬던 기억은 벌써 20여년 전 기억이 되어감에도 강림의 머릿속에 아주 선명히 남아있었다.


안면에 시궁창 물을 맞은 충격이 컸는지, 백치처럼 멍청한 얼굴로 멍을 때리는 저승사자의 얼굴도 생생했고.


만일 이런 복잡기괴한 중원천지에 환생하게 될 줄 알았다면, 강림은 저승사자를 놔두고 적당히 눈에 띄는 빛무리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을 잠깐은 다시 생각해봤을지도 몰랐다.


‘물론 이제 와서는 부질없는 이야기지.’


상념을 떨쳐낸 강림은 빈 술잔에 다시 백주를 채우고 호로록 들이켰다.


“여기, 주문하셨던 교자입니다!”


점소이가 강림이 주문했던 교자 만두를 가져다 준 것은 그때쯤이었다.


“오오... 제법 군침이 도는 빛깔인데. 그럼 어디 한번 먹어볼까.”


강림은 젓가락을 들어 쫄깃한 자태를 풍기는 교자 만두를 집고 그대로 입에 넣어 음미했다.


“어이, 동작그만.”

“응? 갑자기 왜-”

“어디서 장난질이야, 이 우라질 새끼가!!”

퍼억- 콰장창!!!


...마작을 치던 옆 탁자에서 돌연 고성이 터지더니, 한 남자가 어퍼컷에 맞고 허공을 날아 강림의 탁자에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


채 먹어보지도 못하고 교자를 날린 강림의 기분은 삽시간에 더러워졌다.


강림은 시선을 내려 탁자를 부순 남자를 살폈다.


남자는 회색의 두꺼운 민머리와 그 주변을 벗겨지다 만 옆머리처럼 돋은 가시뿔이 눈길을 끄는 파키케팔로사우루스 공룡인이었다.


이 중원 무림에서는 그 돌처럼 단단한 특유의 대머리 두개골 때문에 석두(石頭) 내지는 독두(禿頭) 용인이라 불리고 있었다.


...본인들은 자기네를 강골두(强骨頭) 용인이라고 부르라지만 석두와 독두보다 직관적이지 못해 오직 그들만이 쓰는 명칭이었다.


“크헉, 컥... 아니, 장난질? 이 친구야, 증거도 없으면서 이러면 안 되지...! 재수가 없는걸 왜 내 탓으로 돌리나, 엉?”

“닥쳐! 사기 친 게 아니고서야 아까부터 네가 내리 이기고 있는 게 말이 되겠냐!”


한편, 내동댕이쳐진 석두 용인은 콜록거리면서도 입을 놀려 항변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이미 상대의 머릿속은 이미 흥분과 분노로 가득해 씨알도 먹히지 않으니.


“설령 정말로 네가 운이 좋아서 그랬대도 상관없다. 넌 내 심기를 거슬렀어. 판돈 가져가려면 그 손모가지 하나는 받아야 쓰겄다.”


살기등등한 남자의 기세에 그 말이 그저 위협이 아닌 예고임을 눈치챈 석두 용인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살길을 찾던 그의 시선이 돌연 한곳에 멈췄다.


바로 의자에 앉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강림에게로.


“어어, 가, 강 형! 강 형 아니오? 이런 데서 다 보다니, 이런 인연이 있나!”


석두 용인은 강림의 얼굴을 보자 화색이 되어 횡설수설거리면서도 아는 체를 했다.


“너... 장팔이냐?”


강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석두 용인의 얼굴을 응시하다, 곧 미간에 그어진 흉터 자국을 보고 그가 누군지 기억해냈다.


“마, 맞소! 나 장팔이오. 마침 잘 됐수. 강 형, 나 좀 도와주시오. 저기 저놈이 아주 나쁜 놈이요!”


강림이 자신을 알아보자, 살 길이 보였다 여긴 장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왜?”


하지만 장팔을 대하는 강림의 목소리는 지극히 건조했다.


“왜, 왜라니... 우리 저번에 제법 좋은 기억으로 헤어지지 않았나? 강 형도 내가 물어다 준 건수로 나름 쏠쏠하게 챙겼잖소!”

“그랬지. 하지만 지금 불쾌한 기억으로 덧씌워졌군.”


냉담한 반응에 장팔은 당혹스러워 눈알을 굴렸다.


그러다 강림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젓가락에 시선이 닿자 대강 무슨 일인지 눈치챈 그는 재빠르게 입을 놀렸다.


“그, 나 때문에 식사 망친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오! 내가 거하게 한 턱 쏠 테니, 가벼운 선행한다 치고 나 좀 살려주면 안되겠소?”

“.....”


장팔의 애원을 들은 강림은 5초 정도 침묵하다가 마침 근처에 보인 점소이 소년에게 말했다.


“점소이, 여기서 제일 비싼 요리는?”

“매, 매체구육이요.”

“매채구육에 교자, 그리고 상등품으로 죽엽청 두 병이면 얼마지?”

“어... 그러니까, 서른여덟 냥입니다!”

“사겠소! 사줄 테니 제발 좀 도와주시오!”


강림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장팔이 화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돈은 좀 깨지겠지만 제 한 몸 무사히 건사하는 것이 돈보다 중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강림은 젓가락을 바닥에 툭 던지곤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장팔에게 돈을 꼴아 꼭지가 돈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 시발, 그래서 지금 밥값 때문에 나랑 싸우시겠다?”


즉석에서 이뤄진 강림과 장팔의 흥정을 들은 남자는 험악한 얼굴로 강림을 위협했다. 


남자는 나름 한 덩치 했지만 그래봤자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라노 공룡인인 강림에게 위협적으로 구는 것을 보면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그런 믿는 구석이야 뭔지는 뻔했다.


‘무림인이군.’


강림은 무심한 시선으로 남자를 쓱 훑어봤다.


“하, 이 새끼가 꼴에 보아하니 무림인인거 같은데, 그래봤자 내 독문무공 풍뢰각권엔- 꺽!”


한껏 우락부락한 덩치를 과시하며 강림을 위협하던 남자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날았다.


강림이 기습적으로 정권을 내질러 남자의 복부에 못처럼 꽂아 넣었던 까닭이다.


“인간 무공엔 관심 없다. 식상하거든.”


강림의 묵직한 정권을 얻어맞은 남성은 무공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버렸다.


내공도 살짝 실었다지만, 티라노 공룡인인 덕택에 원래부터 완력 하나는 뛰어난지라 방심한 틈에 일격을 얻어맞은 이상 예정된 결말이었다.


* * *


잠시 뒤, 다른 탁자에서 강림은 못다 한 식사를 시작했고, 장팔은 맞은 편에 앉아 실실 웃으며 말을 걸었다.


“강 형, 아깐 정말 고마웠소. 덕분에 살았지 뭐요.”


강림은 반응하지 않고 식사에만 집중했다.


반들거리는 갈색 빛깔의 매체구육에 교자를 올려 한입에 씹어먹는 강림의 먹음새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군침을 돌게 만드는 미식의 광경이었다.


그 먹음직스런 광경에 장팔은 괜히 침만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강 형, 내 강 형이니까 말해주는 건데, 나랑 다시 한번 한탕 노려볼 생각 없소?”


강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연 것은 매체구육 한 접시를 싹 비우고 죽엽청을 한 잔 쭉 들이키고 난 뒤였다.


“또 건수 하나 잡았나?”

“물론이요. 이번엔 저번 일보다 더 안전한 일이지. 강 형 입맛에도 맞을거요.”

“무슨 일이길래?”


강림이 들어는 보잔 식으로 말하니 장팔은 씩 웃으며 말했다.


“검존 성학림이라고 들어봤수?”


분위기를 잡으며 운을 띄운 것에 비해 강림이 기억을 더듬어도 들어본 적은 없는 이름이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별호가 검존인 걸 보면 이름 꽤나 날렸던 모양이군.”


강림이 시큰둥하게 한마디 내뱉었는데, 장팔은 예상했다는 듯 별 동요 없이 말을 받았다.


“맞소. 한때 천하십대고수중 한명이었지. 십칠년 전 지병으로 수명이 다해가니 무덤자리 찾겠다며 자취를 감췄고.”

“강호의 고명하신 선배는 갑자기 왜?”

“그 검존 성학림이 은거하기 전에 남긴 말이 유명했소. 자기 무덤을 찾는 이에겐 진귀한 영약과 자신의 검, 그리고 제 독문무공의 비급을 주겠노라고. 그래서 한동안 내로라하는 무림인들 눈이 뒤집혔었지. 다들 헛물만 켰지만.”

“그런데?”


웬만한 무림인이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전설인데도 강림의 태도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그러자 장팔은 눈짓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몸을 강림 쪽으로 가까이 당기며 작게 소곤거렸다.


“이 몸께서 검존의 무덤 위치가 적힌 장보도를 입수했다 이 말이오. 내 장담하건데 이건 진짜요.”


장팔은 옷매무새를 살짝 열어 품 안에 든 돌돌 말린 종이의 일부를 보여줬다.


아마도 그것이 장보도일 것이었고, 제법 확실하다 여겼는지 장팔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그 검존이란 양반은 인간이냐?”

“그렇소만... 내 말 좀 더 들어보시오!”


검존이 인간이란 말에 강림이 관심을 끊을 것처럼 보이자, 장팔은 다급히 설득을 이어갔다.


“그, 강 형이 용인들 무공에만 관심 있는거야 내 잘 알지! 그런데 검존의 무덤에 비급만 있는 게 아니지 않소? 저번에 봤을 때도 칼 자주 해먹던데, 이 참에 검존의 애병으로 새로 장만해 보는 거요. 또, 거기에 영약도 있으니 강 형이 둘 중 하나, 아니 둘 다 가져도 좋수다. 물론 비급은 내 몫이고.”


파격적인 제안에 강림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아무리 검존의 비급을 가져가겠다지만, 그렇다 해도 먼저 나서서 강림에게 유리한 분배를 내미는 걸 보고 뭔가 꿍꿍이가 있다 여긴 까닭이다.


“뭐어, 그 검존의 무덤이지 않소. 뭔가 기관진식 같은 것이 있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고. 해서 고강한 무위를 지닌 강 형이 함께해준다면 내 안심이 되어서 그러오. 게다가 다른 놈들이 냄새 맡고 꼬이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하는 것도 있고.”


그 무언의 시선을 눈치챈 장팔이 헛기침을 하며 몇 마디 덧붙였다.


강림은 죽엽청 한 잔을 들이키며 생각에 빠졌다. 그 모습에 장팔도 심기 거스를라 입을 닫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탁.


돌연 강림과 장팔의 탁자 위에 죽엽청 한병이 놓였다.


강림과 장팔이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니 점소이가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까 강림이 객잔에 들어왔을 때 주문을 받았던 그 여성 점소이였다.


“제가 귀가 좋아서 우연히 들었는데... 검존의 무덤을 찾는다고요.”


그녀의 말에 장팔이 뭐라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여성 점소이의 말이 더 빨랐다.


“이 죽엽청은 제가 사비로 사서 무사님께 드리는 거에요. 아까 죽엽청만 두 병시킨 걸 보니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이걸 왜 나한테 주지?”

“의뢰대금이에요. 사실, 제 아버지도 검존의 무덤을 찾아다녔거든요. 대장장이셨는데, 검존의 애병을 만져보겠다나...”

“그런데?”

“그러다가 7개월 전쯤에 이 부근에서 연락이 끊겼어요. 그래서 여기로 찾아와서 임시로 점소이 일을 하며 행방을 찾고 있었죠.”


점소이의 말에 장팔이 은근히 화색이 되어 강림에게 속삭였다.


“보시오, 분명 확실하다니까?”

“더 말해보시오. 내게 뭘 원하는 거요?”


강림은 들은 채도 않고 점소이를 추궁했다.


“그냥... 그 검존의 무덤이란걸 찾아다니면서 제 아버지의 시신도 같이 찾아주셨으면 해서요. 반년 넘게 연락 끊긴 걸 보면 여기 근방의 어딘가에서 죽은 듯한데, 그럼 딸로서 아버지 장사라도 지내줘야죠.”

“크흠... 아버지 일은 유감이오.”


숙연한 이유에 장팔이 뒤늦게 헛기침을 하며 여성 점소이에게 위로의 말을 건냈다.


“.....”


강림은 말없이 죽엽청 한 병과 여성 점소이를 슥 훑어보더니, 그녀가 내려놓은 죽엽청을 챙겼다.


“그대 이름은 뭐고, 댁의 아버지는 어떻게 알아보면 되겠소?”


승낙의 말에 여성 점소이는 화색이 되어 감사해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적혜림이고, 제 아버지 성함은 적무기에요. 한쪽 눈이 멀어서 가죽 안대를 찼으니 알아보는 건 쉬울 거예요.”

“그렇소? 그럼 바로 움직이지.”


강림은 죽엽청 두 병을 챙겨 일어서 객잔 밖으로 나섰고, 장팔도 놓칠세라 강림의 뒤를 따랐다.


객잔을 나온 강림과 장팔은 마을의 대로를 걸어 마을 밖으로 나섰다.


마을 안에선 장팔은 강림의 뒤에서 걸어왔으나, 강림이 마을 밖으로 나서니 자연스럽게 강림보다 앞으로 나섰다.


“자, 이제부터 내 뒤만 바짝 따라오면 되오.”


강림보다 앞에 선 장팔이 강림을 보며 우쭐거렸다.


장보도를 가진 게 장팔인지라 강림도 별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저 못미더운 시선으로 볼 뿐이었지.


* * *


“...그래서, 그 검존의 무덤은 언제쯤 나오는거냐?”

“그, 거의 다 왔소, 강 형. 조금만 더 가면 나온다니까?”


무심한 눈길로 쏘아보는 강림의 눈치를 보며 장팔이 진땀을 흘렸다.


벌써 사흘째 첩첩산중을 헤메고 있는데 검존의 무덤은커녕 동굴 같은 것조차 찾지 못한 까닭이었다.


처음엔 자신만만하던 장팔도 하루 이틀을 넘어 사흘쯤 되니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변해갔다.


자신 있게 그를 끌어들였는데 아직도 허탕만 치고 있으니, 슬슬 강림이 자길 족쳐도 이상할 게 없으리라 직감했으니까.


사실 저번엔 서로 이득보며 좋게 좋게 헤어졌다지만 그건 그때가 드물게 운이 좋았던 것이었다.


이번에도 일이 안 풀리면 마지막에 그를 맞이할 것은 강림의 응징이 될 터.


“이봐, 그 장보도 이리 내. 내가 보고 가는게 더 빠르겠다.”

“으악 놀라라!”


결국 참다못한 강림이 장팔의 손에서 장보도를 낚아챘다.


강림 딴에는 장팔의 길눈이 미묘하게 나사가 빠진 것을 알아 답답해 그런 것이었지만, 장팔은 화들짝 놀라 움츠러들었다가 강림이 장보도를 보며 길을 찾는 걸 보고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적어도 헛고생시켰다며 대나무 기둥에 거꾸로 매달리게 되는 것보단 나을 테니.


한편 강림은 장보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사흘이면 대충 근처에는 왔을 텐데.’


장팔의 길눈이 좀 삐긴 했지만 아주 삔 것은 아니었다.


목적지 근처까지는 잘 찾아가는데 묘하게도 그 근처에서 마지막 한두 걸음을 못 가고 주변만 빙빙 돌며 헤매는 것이 장팔의 기묘한 길눈이었다.


그런고로 장보도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강림과 장팔은 장보도에 표시된 검존의 무덤 근처까지는 왔음이 확실했다.


“이거 안 되겠소. 잠깐 쉬었다 찾아봅시다, 강 형.”


한 식경쯤 지났을 때일까, 장팔이 앓는 소리를 내며 근처 계곡가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마침 그곳은 제법 큰 폭포가 흐르는 넓은 웅덩이가 있어 꽤 장관인 곳이었다.


장팔이 돌연 쉬자고 한 것도 폭포가 자아내는 장엄함에 피로가 풀리는 느낌을 받아서일지도 몰랐다.


“강 형? 거기서 뭐하오?”

“.....”



장팔이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강림은 폭포를 지긋이 노려봤다.


저 폭포,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잊을만 하면 보였던 것 같은데.


강림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가, 강 형? 갑자기 거긴 왜 가시오?”


그리고 강림은 그 가설이 참인지 거짓인지 입증해보기 위해 호수같은 웅덩이를 가로질러 폭포로 향했다.


폭포에 가까워질수록 거센 폭포물이 강림의 몸에 튀겼으나, 강림은 몸이 젖는 것은 신경쓰지 않고 계속 폭포로 걸어갔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장팔이 강림을 따라 폭포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이 폭포 바로 앞까지 도달한 강림은 그대로 폭포 속으로 걸음을 옮겼고, 콸콸 쏟아지는 폭포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장팔이 어어 하다가, 곧 뭔가 눈치챈 얼굴로 헐레벌떡 폭포 속으로 달려갔다.


“강 형, 혹시 이거...!”


폭포를 뚫고 나온 장팔의 입이 희열로 쩍 벌어졌다.


거센 폭포 물의 뒤편엔 넓은 동굴이 펼쳐져 있었던 까닭이다.


심지어 통로는 반듯이 잘 정돈되어 있어 자연 동굴이 아니라 지하실 통로에 들어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리 비밀스럽게 숨겨진 장소라면 틀림없이 검존의 무덤은 이곳을 가리키는 것일 터.


“으하하, 강 형! 검존의 무덤이 분명하오. 우리가 찾았소!”


장팔이 희희낙락해져서 소리쳤다.


동굴은 제법 깊게 이어져 있는지 기쁨에 찬 장팔의 목소리가 크게 울렁거렸다.


“시끄러우니 꼴값 떨지 말고 조용히 따라와라.”

“헙...”


강림의 가벼운 으름장에 장팔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장팔이 조용해지자 강림은 동굴 안쪽으로 걸어갔고, 장팔도 그 뒤를 따랐다.


“강 형, 정말 제대로 찾은 것 같소. 저 벽에 빛나는 저것들 죄다 야명주요!”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간격을 두고 벽에 별처럼 박혀있는 야명주를 보고 장팔이 확신에 차서 속삭였다.


강림의 생각 역시 장팔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런 만큼 강림은 기관진식 같은 함정이 있을까 조심하며 신중히 나아갔다.


다행히 초입 부분에 함정이랄 부분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강림과 장팔은 제법 큰 석문에 다다랐다.


장팔이 나서서 석문을 밀었는데, 석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으음, 열리지 않는데. 아마도 뭔가 잠금장치가 되어있나 보오.”


그러더니 장팔은 석문 이곳저곳을 살피며 단서를 찾아봤으나,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하고 아래턱만 매만졌다.


그에 강림이 나서려던 찰나, 돌연 장팔이 고개를 좌우로 부르르 털더니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에에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부셔버리지 뭐! 뭔가 함정이 있을 수도 있겠소만, 이 문을 못 열면 허탕치는 건 피차 똑같지 않소?”


곧이어 장팔의 반들반들한 민머리에서 내공이 불꽃처럼 피어올라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그 모습이 마치 불을 켠 초 같기도 했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도 보여 묘하게 웃겨보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강림은 저 모습에 비웃으며 얕잡아본 무림인들의 결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아... 간다아-!”


어깨를 펴고 상체를 숙여 머리가 석문을 향하게 기울인 장팔은 그대로 쏜살같이 석문을 향해 달려나가 석문을 힘껏 들이받았다.


꽈과---앙!!!!


장팔의 민머리와 석문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 동굴 복도는 내부를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과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에 휩싸였다.


미리 이리될 줄 예상한 강림은 진즉에 삿갓을 앞으로 푹 기울였던 덕에 흙먼지 실컷 들이키는 일을 피했다.


그리고 장팔이 일으킨 돌풍이 멈추자, 강림은 삿갓을 부채처럼 휘휘 저으며 흙먼지를 쫓았다.


이윽고 흙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광경은, 사방에 흩뿌려진 석문의 파편들과 팔짱끼며 의기양양하게 개폼을 잡고 있는 장팔이었다.


“하하, 봤소? 나도 할 때는 한단 말이지!”


장팔은 씨익 웃었고 강림도 내심 피식거렸다.


이것이 바로 장팔 같은 석두 공룡인들만의 독문무공인 금강두골권이었다.


그들 특유의 견고한 두개골에 내공을 실어 더욱 단단하게 가공하는 것이 핵심으로, 이렇게 강화한 두개골을 활용한 공방일체의 초식을 특징으로 삼은 무공이었다.


당장 장팔은 공성추처럼 사용했지만, 쓰는 석두 공룡인에 따라선 제 3의 주먹이 되거나 강기마저 막아내는 방패도 될 수 있었다.




어쨌건, 석문을 부수고 맞닥뜨린 것은 비교적 넓은 광장이었다.


이곳에도 야명주가 알알이 박혀있는지라 광장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 강 형! 저기 저거 봤소!?”

“그래, 잘 보이는군.”


장팔이 정면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야명주의 은은한 빛 아래 뭔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것은 장팔에게도 강림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그것은 제단이었고, 제단의 중심엔 석관과 검 한 자루가 대좌에 꽂혀 있었다.


“저게 바로 검존의 검인가 보오! 얼른 가서... 켁!?”


이에 장팔은 한달음에 달려가 검존의 검을 뽑으려 했으나, 돌연 강림이 그의 뒷목덜미를 잡아채 그럴 수 없었다.


“강 형? 갑자기 이게 무슨...”

“제단 주변에 저것들 안 보이나?”

“응? 무슨... 헉!?”


강림의 말에 제단 주변에 시선이 간 장팔이 헛숨을 들이켰다.


제단 주변에는 적잖은 수의 시신 내지는 백골들이 널브러져 있던 탓이다.


“크크크,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내가 열어주려고 했다만, 설마 졸던 사이에 석문을 강제로 부숴버릴 줄이야.”


제단 뒤편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제단의 뒤편, 그늘 속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정체는 검조(劒爪) 공룡인이었다.


강림의 지식으로 표현하자면 다름 아닌 테리지노사우루스 공룡인.


양손 합쳐 도합 10개의 검처럼 길고 예리한 손톱이 특징적인 공룡인으로서, 이 손톱을 명검처럼 다루기로 유명한 공룡인들이었다.


“큭큭, 안 그래도 무료했는데 간만에 재미 좀 보겠군.”

“이 시체들... 당신이 한 건가?”


강림이 묻자 검조 공룡인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쩔 텐가? 어차피 네놈들도 이렇게 될 것인데. 끌끌끌...”

“어어, 어어어!?”


그때, 장팔의 두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헛숨을 들이켰다.


“날카롭게 벼려진 양손의 붉은 손톱과 바닥에 발 끄는 듯한 이 기이한 웃음소리는... 설마, 혈조 진영선!?”

“아는 놈이냐?”


강림이 묻자 장팔은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알다마다, 놈은 6년 전 악양에서 심심하다는 이유로 한 무림세가를 몰살하는 악양혈사를 일으켰던 악명높은 마인이오! 당시 근처의 무림맹과 형산파의 추격을 뿌리치고 사라진 뒤로 목격된 바가 없어 죽었다 들었는데...!”


그 말에 강림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그런 대단한 양반이 왜 이런 산간벽지에 6년씩이나 방구석 폐인처럼 죽치고 있으셨나?”

“간단하다. 허명뿐인 피라미는 질렸고 강한 놈들과 싸우고 싶었을 뿐이다. 칼 위의 인생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나?”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장팔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짚이는 것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잠깐, 그럼 설마 장보도는...”

“맞다. 내가 우연히 이곳을 찾은 후에 만들어서 암암리에 뿌린 것이었지. 그래야 네놈들처럼 한가락 한다하는 녀석들이 꼬일 것 아니냐?”


혈조라 불린 검조 공룡인은 그 말을 하며 킬킬거렸다.


나름 자신의 책략에 자화자찬하는 모양이었는데, 강림이 딴죽을 걸었다.


“웃기는 소리하고 자빠졌군. 강자랑 싸우고 싶단 놈이 들어온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여?”

“응?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저기 죽은 저 시신은 무림인 아니잖아. 그리고 저 자 하나만이 아닐 테지.”


강림의 말에 장팔이 강림의 검지가 향하는 곳으로 눈을 돌리니 그곳엔 시신 더미가 있었고.


...왼눈에 안대를 찬 부패한 시신 또한 보였다.


“끌끌, 그건 또 어떻게 알았나? 그래, 가끔 실망스런 녀석들이 걸리기도 했지. 하지만 내가 바깥으로 나가기엔 쌓은 악연이 너무 많아져서 말이야. 또, 그런 의미에서 검존의 무덤에 나 같은 놈이 죽치고 있단 게 발각될 가능성을 내가 왜 놔두겠나?”


혈조는 살인멸구를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죄책감이나마 드러내긴커녕 이유까지 밝히며 여전히 당당했다.


보아하니 철저하게 감출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거나, 이미 이곳까지 당도한 상대에겐 감출 의미가 없다고 여긴 듯했다.


그 뻔뻔함에 강림도 화답하듯 비아냥댔다.


“네가 어떤 놈인진 견적 다 나왔으니 검이나 들어. 칼 위의 인생이란 게 이런 거 아니겠나?”


불과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돌려받자, 혈조는 퍽 재미있었는지 거친 웃음을 터트리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끌끌끌, 그래! 칼잡이들끼리 긴말 필요 없지. 마음에 들어!”


서로 마주 선 혈조와 강림은 자세를 취했다.


혈조는 두 팔을 벌렸다. 손톱은 검이요 팔이 곧 검 손잡이나 다름없는 검조 공룡인 특유의 발도 준비였다.


이윽고 혈조의 손톱에서 별호만큼이나 검붉은 내기가 흐릿하게 일렁였고, 몸을 간질이는 희열에 그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반면 그에 맞서는 강림은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저 칼을 허리춤으로 당겨 잡고 그대로 발도를 준비하며 혈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림에서 악명 떨친 마인을 상대로 마주하고 있었음에도 강림의 손과 몸 그 어디서도 두려움과 불안 따위로 인한 흔들림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준비식에서부터 누가 강(姜)이고 누가 유(流)인지 단번에 갈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침착한 모습에 혈조의 눈꼬리가 움찔거렸다.


“이 모습을 보고도 동요가 없다니, 실력에 제법 자신이 있나 보군. 어디 명문 정파의 무공이라도 익혔나 보지? 지금 자세를 보아하니... 화산파의 도사 나부랭이 같은데.”

“이거 동작을 좀 티 안 나게 손봐야 하나, 만나는 것들마다 다 화산파래.”

“...화산파 무공을 멋대로 배낀거냐?”


강림이 오른눈을 씰룩이며 피식거렸다.


“그보다는 참고했다고 해야지. 내가 내 멋대로 만들고 있는 무공이니까.”


그 대답을 들은 혈조는 잠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안면을 찡그렸다가, 기습적으로 강림에게 달려들었다.


오랜만에 피를 갈구하는 혈조의 붉은 손톱이 날쎄게 허공을 찢으며 강림의 흉부를 노렸다.


시시각각 죽음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강림은 가속하는 사고 속에서 상념에 빠져 들었다.


비록 환생이라는 마법 같은 일을 겪은 강림이었지만, 그는 여타 퓨전 무협이나 웹무협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이 먼치킨이 될 거라 여기지 않았다.


비슷한 출발선에 선다고 해서 꼭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무협지에서 읽은 무공을 재현하자니 이 세상이 좀 뒤틀리긴 했어도 그 근본까지 뒤틀어지진 않아, 무협지 속의 무공들은 멀쩡히 존재하고 있었고 죄다 제 주인이 있었다.


그러니 매화검법이니 백보신권이니 재현해보겠다고 난리쳤다간 비급도둑으로 몰려 척살당하기 딱 좋았던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강림은 이 무림의 세계에서 그저 누군가 일으킨 흐름에 맥없이 휘말리며 살고 싶진 않았다.


비록 화경이니 초절정이니 하는 절대고수가 되어 무림을 호령하진 못하더라도, 21세기 현대인의 삶을 기억하는 자신만이 세울 수 있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고 싶어 했다.


그래서 강림은 궁구했고 결국 찾아내었다.


이 세상의 사람뿐 아니라 여타 무협지 주인공들도 못해본 길을 가기로 한 것이었다.


‘바로 공룡인들의 무공을 경험하고 도감으로서 정리하는 것.’


그것이 그가 세운 두 개의 목표 중 첫 번째였다.


강림에게 있어 공룡인들의 무공은 완전히 새로운 별천지였다.


각 공룡의 특징을 간직한 공룡인들이 그 특징을 이용해 만든 독창적인 무공이라는 울림이 강림의 감성을 간질인 까닭이었다.


당장 파키케팔로사우루스인 장팔의 것만 봐도 여타 무협지에서 그 족보를 찾을 수 없는 신박한 무공이지 않던가.


심지어 같은 종의 공룡인이라도 그 성향에 따라 무공의 세세한 결마저 달라지는 심오함이 있었다.


그렇기에 강림은 검조 공룡인과 싸우는 이 순간에 내심 기대감으로 두근대고 있었다.


혹자가 본다면 까딱하면 목이 달아날 생사결에 미쳤다고 욕할 광경이었다.


허나, 어차피 이번 생은 덤으로 얻었다 여기는 강림에게 있어 죽음은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 짧은 듯 긴 상념이 강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강림과 혈조와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져 있었다.


시뻘건 내기 두른 다섯 개의 손톱이 갈퀴처럼 강림의 가슴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그때 강림 또한 행동에 나섰다.


뽑아든 검에 내기를 싣고 비스듬히 들어 사선으로 베어들어오는 혈조의 손톱들을 막아낸 것이다.


물론 기세를 탄 혈조의 공격은 한번 막았다고 꺾일 것이 아니었다.


“비, 빌어먹을... 역시 강 형이라도 혈조는 좀 그렇지...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나?”


어쩌다보니 이 생사결의 유일한 관객이 된 장팔이 중얼거렸다.


척 봐도 강림은 지금 요란하고 흉포한 혈조의 무공에 휘말려 정신없이 막아내기 급급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강림은 수세에 몰리고는 있어도 당황하고 있진 않았다.


강림은 그저 목숨을 건 외줄타기를 하며 혈조의 무공과 그 안에 담긴 묘리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불현 듯 기대감에 차 있던 강림의 입가가 조금씩 내려갔다.


혈조의 무공은 그저 흉포하고 어지럽기만 할 뿐, 10개의 갈퀴손톱을 하나의 검으로 치환하면 인간 마인도 대충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는 심상이 강림의 머릿속에 그려진 까닭이었다.


‘슬슬 끝내야겠군.’


그때까지 방어에만 치중하던 강림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그의 칼이 진분홍과 흰색이 섞인 빛으로 번뜩 반짝이며 갈퀴손톱에 맞서기 시작했다.


“헛!”


혈조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직전까지 자신의 공격에 맥을 못 추는 것처럼 보였던 강림의 검이 돌연 내기를 휘감으며 신기루를 그려내기 시작했던 탓이었다.


강림의 검이 차르륵 떨릴 때마다 그의 검은 하나 둘 늘어나 혈조의 갈퀴손톱에 하나하나 대응하고 있었다.


“화산파 도사를 따라한다 싶더니, 역시 환검이었나!”


그 말대로 강림이 펼치고 있는 검은 환검이었다.


강림의 검에서 그려지는 신기루는 우락부락한 티라노 공룡인이 펼치는 것이란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고 화려했다.


그리고 그 신기루가 자아내는 심상이 점점 형태를 갖춰가자, 혈조의 얼굴에 혼란이 서렸다.


“매화...? 아니, 달라. 이건...”


그것은 어떤 꽃이었고, 혈조는 곧 그 꽃의 정체를 알아챘다.


“도화...?”


강림의 검에서는 도화가 피어나고 있던 것이다.


“도화꽃을 피워내는 검법을 만들어보고 싶었거든.”


바로 이것이 강림의 두 번째 목표였다.


그것은 전생에서 매화검법을 보며 강림이 종종 가졌던 생각이었다.


혹자가 보면 매화나 도화나 무슨 차이냐고 하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강림이 찾은 그의 낭만인 것을.


그리고 그는 노력으로 낭만에 도달해가고 있었다.


그저 도화를 좋아했고, 검으로 매화를 피웠다면 도화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맨땅에 헤엄치듯 시작한 것이 어느새 모양이나마 그럴듯하게 갖춘 경지까지 온 것이었다.


“이제 그만 끝내자고.”


선고하듯 떨어진 강림의 선언.


“...헛!?”


그 말에 도화 꽃잎에 정신이 팔렸었던 혈조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으나, 이미 결판은 정해져 버렸다.


강림의 검 끝에서 줄기줄기 피어난 도화꽃잎들이 혈조의 목을 훑고 지나가 그에게 안식을 가져다 준 까닭이었다.


툭- 데구르르...


하나의 목이 지면에 나뒹굴었고, 목을 잃은 몸뚱이도 털썩 쓰러졌다.


“쯧.”


강림은 검을 휙 휘둘러 피를 털어내곤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이... 이긴거요? 혈조를?”


그제야 장팔이 엉거주춤 일어서며 ᄄᅠᆯ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장팔은 놔둔 채, 강림은 제단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제단의 대좌에서 검존의 애검을 뽑아냈다.


“네껀 네가 알아서 챙기고, 시신도 꼭 챙겨라.”

“응...? 아, 아! 물론이지, 물론 그럴거요, 강 형!”


강림의 말에 장팔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제단으로 가서 검존의 비급과 영약들을 챙겼다.


그리고 안대 쓴 시신을 들쳐 업고는 밖으로 나가는 강림을 따랐다.


동굴 밖으로 나온 장팔은 시신을 거적대기에 감싼 뒤 말 안장에 올려놓곤 이마의 땀을 닦았다.


"휴...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다 잘 풀렸구려!"

"받아라."


그때 강림이 장팔에게 뭔가를 던졌다.


장팔이 그것을 받아 뭔가 확인하니, 그것은 다름아닌 검이었다.


"어... 이거 검존의 애병 아니오?"


장팔이 영문을 몰라 물었다. 이것은 분명 강림의 몫이었을 것이었다.


그런 장팔에게 강림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이것도 그 시신과 함께 점소이 여자에게 가져다줘라. 그건 그 사람 아비의 유품이니까."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강림은 장팔을 등친 채 훌쩍 떠나갔다.



ㅡㅡㅡ


씨발!! 세이프!!!!


근데 시간에 쫓겨서 끝부분을 급마무리한게 조금 걸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