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은 위대하다.


사람 자체가 별볼일 없어도 가문을 등에 업고 있으면 나보다 급이 낮은 녀석들은 주제를 알고 알아서 기기 때문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저기 조정의 관리나 문벌귀족처럼 잘나가는 건 아녔지만, 서주에서 손에 꼽는 상단의 적자였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나를 가르치기 위해 아버지가 모신 명사들이 하나같이 잔머리는 좋으나 공부 머리는 없다고 한탄했던가.


그래도 아들이란 놈이 상단 하나 운영하는데 문제가 없었고, 성격도 모난 곳이 없다는 데서 아버지는 감지덕지하였다.


단점이라곤 술을 좋아한다는 거지만….


내가 부리는 사치 정도야 상단 입장에선 눈에 거슬리는 정도도 아녔다.


가끔 비싼 술을 구한다고 흥청망청 금원보를 날리긴 했는데.


뭐, 상단 말아먹을 정도는 아니니까. 아버지도 한숨만 내쉴 뿐 그 이상 날 다그치진 않았다. 아마 내가 엇나가길 두려워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어디 연회가 열려 초청받은 나는 창가에 기대어 혼자 술을 기울였다.


처음엔 귀빈 취급이라 여기저기서 아는 체하기 바빴지만, 어디 명망 높은 구파의 도사님들이 왔다더니 우르르 몰려가더랬다. 나는 순식간에 찬밥 신세가 되었다.


쯧! 그깟 칼잡이들이 뭐 그리 흥미롭다고.


“응?”


혼자 울적하게 술을 기울이는데. 창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잔을 기울이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월광 아래 희미한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에 따라 우수수 흩날리는 하얀 꽃잎.


기울어진 그믐달.


마치 항아가 흐느껴 우는 절경 속에서 음양을 몸소 체현한 흑백의 도포를 걸친 기이한 여인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저기 말코 도사놈들은커녕 기루의 기녀보다 적은 천 면적은 누가 봐도 거동이 불편해 보였고, 동네 농사꾼이나 인부도 아니면서 무릎 아래로 다리를 훤칠히 드러내고 있었다.


“….”


하지만 자세히 보니 손목과 다리, 그리고 목 위로 언뜻 보이는 시꺼먼 붕대가 감겨 있더랬다. 검은 붕대에는 금색 자수로 요상한 문자가 쓰여 있다.


색녀?


아니, 그건 그녀를 폄하하는 단어였다.


그녀는 신비로웠다.


당장이라도 눈을 깜빡이면 눈앞에서 사라질 것처럼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이었다.


내 집요한 시선을 깨달은 그녀가 고갤 이쪽을 향한다.


반듯하면서도 뺨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특이한 앞머리와 석산의 잎처럼 길게 휘어진 속눈썹, 그리고 침울한 고동색 눈동자.


“어머나?”


여인이 살며시 웃었다.


그림에서 튀어나온 먹물이 비로소 살아 숨쉬는 듯했다.


“허….”

“대인께서 어인 일로 술이 아닌 미천한 소녀에게 관심을 주시는지요?”

“미천하다?”


내가 눈썹을 찌푸리자 여인이 손을 모아 고갤 숙인다.


“일개 방사 나부랭이랍니다.”

“아아. 선씨가 이번 장사 거래 대박을 기원한다며 부른 사기꾼 무리가…?”

“바로 소녀랍니다.”


내 사기꾼이란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인이 소박하게 웃었다.


“…그래. 손님이셨군. 그런데 어찌 바깥에서 소박을 맞고 계신가? 혹여 술맛이 없는 거라면 내 당장 사람을 시켜 비장의 술을 몇 병 꺼내올 수 있는데….”

“후후. 주도에 흥미가 없을 뿐이랍니다. 그런 대인께서야말로 어이하여 무리와 어울리지 않으시고 이리 청승맞게 혼자 대작하고 계신지요?”

“저기 무당의 유명 인사들이 왔다는 모양이군.”


깡패 검수들 말이야.


나는 술잔에 남은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으며 팔꿈치를 창가에 대고 턱을 괴었다.


“저런….”


내 투덜거림에 여인이 쓰게 웃었다.


“뭘 그리 남일인 것처럼 구나. 자네 일행 아닌가?”

“저들은 자칭 도사들이고. 저는 방사니까요. 이래 봬도 진짜랍니다?”

“하핫! 사기꾼들이야 늘 그렇게 말하지.”

“대인께선 괴력난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시군요. 세상엔 내공이나 영물 같은 해괴한 힘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어찌 방사가 사기꾼이라는 건가요?”

“역사가 그리 말하고 있지.”


자칭 방사라며 역사에 얼굴을 비친 놈들은 죄다 사기꾼이었다.


서복, 좌자, 우길 같은 작자들 말이다.


“저런. 대인의 짧은 식견엔 소녀도 무척 아쉬울 따름이네요.”

“하핫! 그럼, 어디 증명해보지 않겠나?”

“증명이란…?”


돈이야 썩을 정도로 넘쳐흐른다. 시간은 말할 것도 없다.


“집에 방이 남아 돌고 있지. 식객다운 식객도 없어 눈치 볼 것도 없소.”

“아하? 혹여 지금 소녀에게 추파를 던지시는 건지요?”

“추파라면 추파고. 흥미라면 흥미지. 내가 그대를 받아들이는 조건은 단 하나요.”

“도술의 증명일까요?”

“그거야 방사 마음대로 하시고. 조건은 사람 목숨은 건드리지 말것.”

“어머나?”


여인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짓는다.


방사.


역사에 그와 같은 사기꾼들이 나타나면 꼭 크게 해악을 끼쳤다.


돈은 많다.


남들은 모르는 가족 전용 비상금도 있다.


따라서 그녀에게 내가 사기를 당해서 전재산을 털려도 평생 먹고 살 도리는 있었다.


“내 술잔에 독이라도 넣으면 곤란하니 말이지.”

“후후. 그렇지 않아도 무색무취의 환단 제조법은 제법 여럿 알고 있답니다.”

“넣을 겐가?”

“넣어 드릴까요?”


내 은근한 도발에 여인이 미소로 맞응수했다.


“사양하지.”

“아쉽네요.”


뻔한 대화에 우리는 뒤늦게 깔깔 웃었다.


이미 상단주인 아버지는 병마 때문에 몸져 누우셨다. 작년부터 상단 주요 업무는 모조리 내가 맡고 있다.


설령 집안이 이 여자 때문에 망해도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야 나는 이 도박이 꽤 흥미로울 거라 여겼다.


그러니.


“그래서. 방사 이름은 뭐요?”

“서복이라 합니다.”

“흐하하하! 누가 봐도 사기꾼이잖는가?”


여인은 반박하지 않았다.


“재밌는 인연이로구나.”

“그런가요?”

“암. 천하의 시황제를 상대로 사기를 친 서복이 눈앞에 있고….”


나는 술병을 기울여 술잔이 넘쳐흐를 때까지 가득 채웠다. 잔을 쥐자 투명한 액체가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바깥으로 쏟아진다.


잔에 비친 항아와 꽃잎을 담은 나는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툭.


잔이 창틀을 내리친다.


“여기. 불경하게도 영정이란 자가 있으니 말이오.”

“과연.”


서복이 손으로 입가를 가린다. 그런데도 숨길 수 없는 진득한 미소가 도자기 같은 잔에 희미하게 비친다.


“정말. 불경하기 짝이 없는 만남이군요.”

“동의하지.”


여인이 희게 웃었다.


장담컨대.


달로 도망친 항아 따위와 비교도 되지 않는 신선의 아리따움이었다.






대충 서복 나오는 페그오 패러디 하나 보다가 혹해서 씀.

서복은 여자인 게 당연하잖아?(달빠뇌)


뒷내용은 진짜 불로장생한 서복 도사님과 불로초를 사이에 놓고 무림인들과 엮이는 좌충우돌 우당탕탕 러브코미디?


실은 나도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