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쓰러뜨리면 끝날 줄 알았다.

정확히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으면 견딜 자신이 없었다.

혼자 시작해 다같이 걸어왔던 길을 다시 혼자 되짚어 가는 것은 그 어떤 사투보다도 힘들었다.

내 손에 묻은 피는 그 어떤 성수로도 씻기지 않았고, 동료들의 목소리는 눈을 뜨건 감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죽지 못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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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

반겨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가 어디서 무슨 짓을 겪었던, 나의 무사함에 감사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다.

내 곁에 언제나 있었던 가장 큰 행운을 더 이상은 놓치지 말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욕심을 부렸다.

"우리, 단 둘이서만 살자.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 누구도 찾지 않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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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몹쓸 생각을 한다.

내 억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리아는 지금보다 훨씬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편히 살고 있었을 텐데.

"이 바보. 그게 무슨 말이야?"

처음 이 생각이 들었을 때, 리아는 내 머리에 딱밤을 날렸다.

"좋은 옷이나, 맛있는 음식 같은 건 너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구.
너도 마찬가지잖아?"

얼굴이 새빨게지면서도 당당히 선언하는 모습을 보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탑에서 죽은 동료들은 나를 미워할까.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분명, 너라도 행복해져서 다행이라고 축복해주리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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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마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용사님, 당신의 힘이 다시끔 필요합니다."
"부디 올바른 결단을 내려주십쇼!"

"...너희,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내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던 녀석들은 일제히 숨을 삼켰다.

"계속 감시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내가 거미쥐었다 생각했던, 그 찰나 같은 행복조차 진실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역시 화가 났다.

나는 행복해질 자격조차 없는 걸까?

용사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책임져야 하기에...

"...일단, 돌아가 줘."

"용사님!"

"어차피 내가 어딨는지 알잖아."

리아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았을 작은 투정이었을 뿐인데도, 전령들은 작은 비명을 삼키며 엉거주춤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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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다시는 오지 마라!"

전령들이 떠나기 무섭게 리아는 문지방에 밀가루를 뿌렸다.

"그거 미신이잖아. 그리고 소금을 뿌려야지."

"소금은 비싸. 밀가루라면 다음번엔 얼굴에도 한 움큼씩 뿌려줄 수 있지!"

엉뚱한 소리.

그녀의 엉뚱한 소리는 언제나 나를 웃게 만든다.

그리고 내 웃음소리는 그녀를 웃게 만든다.

...행복하다.

웃으면서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나는 역시 행운아다.

하지만 리아의 웃음소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리아는 양손을 살포시 배 위에 겹쳤다.

"......모르겠어.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께."

이 멍청아.

너 감시 당하고 있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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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용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리아와 함께 웃으며 느낀 행복을 내가 지킬 수 있다면,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연기?"

몸보다 생각이 빠르게 움직인 경험은 드물다.

연기가 보였을 때부터 늦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도착하고 난 뒤였다.

"—"

집은 다시 지을 수 있다.

"—아."

타버린 물건들도 다시 만들 수 있다.

"리아."

하지만 사람만큼은.

죽은 사람만큼은 어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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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을 추적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히, 히익! ㅇ, 요, 용사!"

쉬워서, 더더욱 화가 났다.

고작 이까짓 놈들이 내 행복을 짓밟았다.

내가 지키기로 마음 먹었던 그 행복을.

도대체 누가 마왕인거지?

마지막 남은 전령은 내게 묻은 피만 보고도 무슨 일이 벌어졌고, 앞으로 벌어질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히, 히이이익!"

"왜 그런거야?"

내가 놀랄 정도로 침착하게 목소리가 나왔다.

용사는 시도때도 없이 화를 내서는 안되니까...

...나는 화조차 제대로 못 내는 구나.

이 용사라는 직책 하나 때문에.

"대체, 왜..."

아무 짓도 안했으면 도와줬을텐데.

너희가 나를 용사로 만들었으니

나는 용사로써 최선을 다하려고 했는데.

나는—

"그, 그깟 여자 하나가 그리 중요하단 말이오?!
우리는 당신을 옭아매던 족쇄를 풀어준 것 뿐일세!"

—아?

"용사라면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필연!
고작 한 여자 때문에 인류가 망하는 것을 손놓고 볼 속셈이었나!"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람들의 목숨이 아닌가!!!"

...

"하."

그렇구나.

"그러네."

"그—으응?"

그런 뜻이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의 목숨.

"네 말대로야."

"그, 그럼...다시 용사로—"

써걱!

못다 끝낸 말이 피와 뒤섞인 한숨으로 흐트러진다.

쓰러진 몸뚱아리는 조금씩 경련하다가 서서히 굳어갔다.

"축하해.
너희들은 목숨을 대가로 세상을 구하게 되었어."

나는 용사.

용사는 행복을 지키지 않는다.

용사는 사람을 지킨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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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지키는" 에서 "사람을 지키는" 으로 타락하는 과정을 좀 더 맛도리 있게 표현하고 싶었는데

아직 잘 몰루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