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는 사실 누구보다 패배를 직감했을 것이다.

그는 산군(山君)으로 불리는 성기사였고, 그 이름 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허나 마왕은 호랑이는 아니지만 늑대 같은 괴수들을 계속 보내고 있었으며,

제 아무리 맹수라도 늑대떼에 물리면 죽는게 당연한 이치다.

한때 북부 겨울의 산에서 남부의 평원까지 끝없이 진격하고 개척하며 동료 기사들과 영광의 시간을 누렸건만.

이제 그의 곁에 남은 거라곤 상황이 파국으로 이어지자 교단에서 대충 기본 마법만 배우고 투입된 앳된 성녀와,

마왕군에 의해 이전 파티원들을 모두 잃은 마지막 엘프 궁수.

약탈의 광기에 미친 용병들, 그리고 이미 전쟁에 졌단걸 눈치채면서도. 그걸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시민들....

산군은 나지막히, 6년 전 그의 죽은 동료가 손에 쥐여줬던 작은 십자가와 낮의 전투에 지친채 그에게 기댄채 자고 있는 앳된 성녀, 그리고 엘프를 보았다.

산군은 지쳐가도 성녀와 엘프는
묵묵히, 여전히 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산군과 동료는 끝까지 마왕의 늑대떼를 잡아냈다.

하지만 그것은 종장에 다다른 인류의 세기를 아주 조금 더 연장하는 것뿐.

결국 제국은 쓰러졌다. 그것도 내분으로.

마지막까지 제국을 위해 싸우던 늘 한결같이 우뚝 빛나던 교단은 부패한 성직자에 무너졌고,

방어선은 이미 짓밟히고 찢겨진지 오래였다.

그의 옆에서, 같이 한 몸이 되어 싸우던 엘프와 성녀가 절규하고 있다.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될 수 없다. 그녀들은 나락에서 겨우 올라왔었던 이들이니.

문득 땅에 떨어진 십자가가 부러졌다.

겨울산부터 지금 평원까지. 수많은 죽을 고비를 거쳐도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던 산군은, 부러진 십자가에서 처음으로 죽음의 두려움이라는걸 느꼈다.

평생을 싸워온 산군은 영광스럽지도 못하게 고작 오래된 십자가에 무너졌다.

엘프 궁수는 이빨을 갈면서 그에게 다시 검을 들 것을 강요한다.

성녀는 몸을 떨면서도 다시 일어서 지팡이를 손에 쥐고는 산군을 결의에 찬 눈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수도로 몰려오는 마왕군을 향해 더이상 의미없는 처절한 저항을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그는 최전방의 무너진 신전에 있었던 어린 사제 한명이 생각났다. 모든것이 변할때 묵묵히 제 일을 하던...

그는 더 이상 신에 대한 충성심도, 구원에 대한 신념도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산군은 지쳤다.

신을 위해서라는 얄팍한 명분 아래 그와 함께 싸운 기사 700만이 죽었다.

그는 너무 지쳤다. 더 이상의 살생도, 더 이상의 동료가 죽어가는 것도. 그는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이 죽는게 나았다.

그런 그가 배낭에서 꺼낸건, 2명 분의 이동 스크롤이었다.

이 이동 스크롤은 다른 대륙의 안전지대로 이동하는 스크롤이었다.

그곳은 풍족하고, 전쟁의 화마 또한 절대 닿을수 없는. 말하자면 유토피아였다.

그래. 저들은 반드시 해피엔딩을 맞아야한다.

그것이 운이 좋았던 성기사가 빌어버린 마지막 소박한 소원이었다.

산군은 궁수와 성녀에게 스크롤을 쥐여줬고, 끝까지 함께 싸우겠다고 울부짖는 그녀들을 강제로 떠나 보냈다.

이내, 산군의 눈 앞에 거대한 마왕군의 군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지쳤다. 그러나 운명은 그런 그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그에게 어떠한 휴식도 허용이 될 리가 없었다.

마지막 성기사는 침착하게 그의 부러진 칼을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