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사이에 공백이 좀 많은데요.


컴퓨터로 쓴 글을 폰 메모장에 옮겨서 수정하니까 이 난리가 나더라고요;;


하나하나 수정하기 빡세서 그냥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



양쪽으로 묶은 머리끈을 풀자, 자유롭게 풀려난 머리카락이 거의 허벅지까지 드리웠다.

 

'길이는... 어깨까지였었나.'

 

불꽃처럼 넘실거리는 그녀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떠올리며,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가위로 잘라내고, 최대한 비슷하게 다듬었다.

 

나란히 걸려 있는 낡고 헤진 옷들 사이에서 홀로 존재감을 뽐내는 화려한 드레스.

 

실제로 입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과시하듯 여기저기 달린 리본과 레이스는 거추장스럽기만 했고,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역시 내게 이런 고급스러운 옷은 어울리지 않는구나.'

 

거울 너머로 비친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어 보였다.

 

괜스레 목이 허전한 기분이 들어서, 머리카락에서 풀어낸 끈 중 하나를 적당히 둘러 묶었다.

 

마지막으로 낡은 로브를 뒤집어쓰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는 모두가 떠난 지 오래인 텅 빈 고아원의 현관에서, 홀로 릴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나고 나서 벌써 몇 주가 흘렀고, 다음에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짜는 이미 훨씬 지나 있었다.

 

어쩌면 그때의 만남을 끝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것은 무모한 도박이었고, 실패하면 그녀와 나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

 

그래도 이 방법이 내가 생각한 최선이라는 건 변치 않는다.

 

하지만 건물 내부를 가득 채운 숨이 막힐 듯한 고요함에, 나는 점차 짓눌려갔다.

 

굳게 마음먹은 결심이 흔들리고, 드러난 균열 사이로 두려움이 비집고 들어와 서서히 덩치를 불렸다.

 

무서웠다.



죽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친다면 무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 모든 행위에 정말로 의미가 있는 걸까?

 

하지만 우습게도, 그런 와중에도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릴리가 보고 싶어’였다.

 

 

***





“포나...흐윽, 흡...”



릴리는 울고 있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찢어진 드레스 자락은 온통 흙탕물로 더렵혀진 모습.



눈물로 일그러진 얼굴로 덜덜 떨며 나를 찾는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워 보여서.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마지막이니까, 적어도 웃으면서 헤어지고 싶었다.




“릴리, 괜찮아.”



잘게 떨리는 손을 살며시 잡아주자, 서서히 떨림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두르고 있던 로브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이 로브에 감싸여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본 릴리의 얼굴을 마음속에 새기며, 나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걱정 안 해도 돼. 이제는 내가 지켜줄 차례야.”



침착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고 연습했던 문장을 다정하게 속삭였다.



쓸데없는 감정은 숨기고, 오로지 그녀만을 생각해야 한다.



괴로움을 드러내지 않고 떠나는 편이, 그녀가 조금이라도 덜 아플 수 있는 길이니까.



하지만-



나는 계획을 마무리하며 뒤돌아 나아가는 마지막 순간에, 그만 충동적으로 욕심이자 미련을 남겨버렸다.



흙바닥에 떨어진 빛바랜 보랏빛 머리끈 하나.



실수로 놓친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



잊혀지고 싶지 않아.



적어도 너만은 날 기억해줘.



그 정도는 바라도 되잖아, 그렇잖아.



한순간의 망설임이 머리끈을 쥔 손에 들어간 힘을 느슨하게 했고, 그리고.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머리끈은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어쩌면 목에 두르지 않은 반대쪽 머리끈을 손에 쥐고 문을 나섰던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나를 떠올릴 만한 물건을 남기면 분명 그녀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가진 것 중에서도 가장 낡고 흔해빠진 로브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나의 흔적이 그녀가 슬픔을 딛고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더 깊게, 그리고 더 오랫동안 과거에 사로잡혀 허우적대도록 만들 걸 알면서도.



내 욕심으로 릴리에게 못할 짓을 해버렸다.



나는 작별인사도 없이 작은 욕심만을 남겨두고서, 스스로 사지를 향해 걸어갔다.





***

 

 

조악한 처형대 위에서, 우악스럽게 붙들린 두 팔.

 

‘그렇게 세게 쥐지 않아도, 어차피 도망치지 못할 텐데.’

 

이쪽을 내려다보는 처형관의 지독히도 무감정한 시선이 나를 따갑게 찔러댔다.

 

급조된 처형대의 헐거운 나무판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는 광장 가득 메아리치는 군중들의 고함에 금세 묻혔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나만을 바라보며 소리치는 광경이라.

 

그것이 내게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보여서였을까, 좀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잠식되었던 머리가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따악-!

 

“...윽......!”

 

간간히 소음을 뚫고 날아오던 돌멩이가 기어코 내 다리에 적중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주저앉으려는 다리로 간신히 버티고 섰다.

 

고작 이런 일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

 

릴리를 위해서라도.

 

나의 마지막이 곧 그녀의 마지막으로 기억될 테니까.

 

휘청이는 내 모습에 인파 사이로 비웃음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그들은 하는 일도 없으면서 국고를 축내는 멍청한 공주를 비아냥대고,

 

자리는 차지하되 권력은 쥐지 못한다.

 

쓸데없는 분란을 야기하지 못하도록, 양 날개가 모두 꺾인 채 새장 속에 갇힌 공주.

 

그녀가 그렇게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일어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통치로 백성들을 고통받게 한 책임을 그녀에게 전가했으며,

 

그녀는 틀에 맞춰 찍어낸 예쁜 인형, 그 이상의 취급은 받지 못했다.

 

자기 의사를 피력할 기회도, 그에 대한 존중도 없이, 뒤에서는 평민에게조차 무시당하는 신세.

 

세력을 키우는 가문을 잠재우기 위한 공물이자, 왕실의 체면치례를 위한 아름다운 전리품.

 

날 때부터 정치적인 자리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온 그녀가, 어떻게 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단 말인가.

 

-누군가는 사치에 눈이 먼 공주가 군대가 들이닥치는 와중에도 악세사리를 고르는 데 정신이 팔려 잡힌 것이라는 낭설을 퍼뜨렸다.

 

되는대로 지껄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무지는 죄다.

 

간단히 선동되어 죄 없는 이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마니까.

 

멍청하고 사악한 ‘공주’가 죽음으로서,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침략한 군대를 자신들의 새로운 ‘지배자’로 받아들이겠지.

 

나는 그 모순적인 행태에 치를 떨었다.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사랑받기 위해 발악하던 가련한 공주를 편드는 이는, 그곳에 없었다.

 

 

***

 

 

처형관이 치켜든 칼날이 태양빛을 반사해 눈부시게 빛났다.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아래서, 나는 그들을 마음껏 비웃어주기로 했다.

 

‘누가 누군지 제대로 구분도 못하는 주제에.’

 

아니, 그 이전에 알아볼 생각조차 없는 거겠지.

 

저들에게 중요한 건 누가 죽는지가 아니라, 누구의 이름으로 죽는지였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교착 상태가 깨지며 급격하게 혼란해진 정세.

 

불만이 극에 달한 백성들의 화풀이를 위한 제물에, 패전국의 포로로 붙잡은 힘없는 공주보다 더 적합한 존재는 없을 터였다.

 

웃기지도 않았다.

 

광장의 분위기가 절정에 달하자, 새파랗게 벼려진 칼날이 내 목을 노리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한 편의 조잡한 연극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거짓말과 기만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걸로 릴리는 안전해.’

 

그녀는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져버릴 이가 아니었다.

 

굳게 잠긴 삭막한 새장보다는, 넓고 아름다운 바깥이 그녀에게 어울리는 자리다.

 

비록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험난하고 괴로울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녀가 더 이상 울지 않았으면 했다.

 

그녀에겐 환한 미소가 어울리니까.

 

그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반드시 이겨내고, 모든 슬픔이 사라진 그곳에서, 마침내 온전한 행복을 되찾은,

 

나의 하나뿐인 친구가-

 

스스로를 마음껏 피워낼 수 있기를.

 

 

***

 

 

오랫동안 수소문해 가까스로 찾아간 그곳에는, 온갖 쓰레기들과 함께 한때 ‘포나였던 것’들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썩어가고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에 구역질이 났다. 

 

부정하고 싶었다.

 

시체가 온전치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스스로도 손이 심하게 떨린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나는 간신히 거칠어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편안히 안식에 들게 하는 것만이, 지금의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

 

나는 홀로 그녀의 초라한 마지막을 수습했다.

 

부러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왔다.

 

이건 나만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시신은 얼굴이 그나마 멀쩡하지 않았다면 나조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장기의 상당수는 소실되었고, 관절은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으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난도질된 자국으로 가득한 신체.

 

검게 말라붙은 피가 손에 끈적하게 엉겨붙고, 썩어가다 만 시신에서 악취와 함께 구더기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녹아내린 피부 사이로 흉하게 드러난 갈비뼈는 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진 흔적과 함께 반쯤 부러져 있었다.

 

이외에도 전신에 걸쳐,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조차 속이 울렁거려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명백한 보복성의 상흔이 가득했다.

 

피부가 죄다 썩어 문드러진 후에도 이렇게 선명한 흔적이 남은 걸 보면, 원래는 이보다 훨씬 처참한 상태였겠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어이 그 모든 뼈와 육편을 한데 모아 상자에 담았을 때, 그것은 한 사람의 몸이라기엔 너무나도 가벼워서-

 

어느새 나는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

 

 

시신을 들고 간 곳은 포나의 고아원 근처, 언젠가 그녀와 함께 놀곤 했던 백합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밭이었다.

 

그로부터 고작해야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내게는 아득한 추억처럼 느껴졌다.

 

맨손으로 땅을 파내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눕히고,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단단히 덮어준 뒤, 미리 준비해온 조잡한 팻말을 근처에 심는다.

 

무덤의 위치와 주인을 표시하기 위한 팻말이건만, 그 위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생전의 그녀를 온전히 나타내기에 내 글재주는 너무 미천해서.

 

내가 성급하게 새긴 몇 자 안 되는 단어들로 그녀의 삶이 간단히 한정되는 것이 싫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모두 마쳤음에도, 나는 온통 흙투성이가 된 옷을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어느새 저편에서부터 찾아드는 새벽빛이 희미하게 이쪽을 비추고 있었다.

 

야속하게도 내게는 오래도록 머무를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언제까지나 그녀의 곁에 함께하고픈 마음을 누르고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서려던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포나를 닮은 주홍빛 백합 한 송이.

 

무슨 변덕이었을까, 나는 떠나려던 발걸음을 돌려 꽃밭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는 희미해진 과거의 기억에 의지해, 어설픈 손놀림으로 꽃을 꺾었다.

 

내가 이끄는 대로 힘없이 딸려오는 모습마저 꼭 그녀를 닮아서, 그만 웃음이 나왔다.

 

차가운 새벽공기를 담고 불어오는 바람결을 따라 주홍빛 꽃잎이 미미하게 떨렸다.

 

네가 곁에서 이렇게나 떨고 있다면 기꺼이 따뜻하게 안아줄 텐데.

 

나는 그 위에 언젠가 그녀가 나를 닮았다고 말했던 빨간색 백합을 단단히 엮어주었다.

 

그래, 이렇게-

 

기억 속의 그녀를 따라, 주홍빛과 붉은빛을 띄는 백합을 엮어 작은 화관 두 개를 만들었다.

 

그러나 완성된 것은, 꽃잎은 성한 곳이 없이 죄다 뭉개지고, 이리저리 구겨진 꽃줄기가 제멋대로 삐져나와 있는, 화관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무언가였다.

 

‘가르쳐 준다고 할 때 열심히 배워둘 걸 그랬나...’

 

가만히 앉아서 화관 만드는 것을 못 견뎌하던 과거가 못내 후회스러웠다.

 

둘 다 엉망인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나는 숙고 끝에 그나마 나은 것을 골라 묘지 팻말에 걸어주었다.



'내게 힘이 있었더라면, 너는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만약에'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제와 떠올려 봤자 뭐가 바뀐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이미 수백 가지의 가정이 빈틈없이 들어차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목덜미를 문지르자, 느슨하게 묶은 끈에 손가락이 걸렸다.



손끝에 느껴지는 익숙한 천의 촉감.

 

"......"



나는 그녀에게 헌사하고 남은 화관 하나를 스스로의 머리에 걸치고서, 서서히 걷혀가는 간밤의 안개를 뒤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