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부유한 상단이 있었다.
왕국 전체에 이름이 높지도 않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지도 않았지만
상단이 있는 지역 안에서는 유명세를 떨친 꽤 잘나가는 상단이었다.
상단주는 귀족이었지만 딱히 대단한 작위도 없었다.
그저 시골의 한 남작가. 왕국 전체에 수백 명은 넘는 작은 지방의 영주였다.
유명하지도 않고, 권세가 높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그렇기에 행복할 수 있었다.
질척이는 권력투쟁에 끼어들지 않았으며, 피비린내나는 상단간의 암투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평민과 결혼한다 해도 막아서는 이 없고, 암살의 위협에 벌벌 떨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상단주는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평민 출신의 어여쁜 아내와 둘도 없이 귀한 딸.
부유하진 않지만 풍족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가업.
촌구석에 박혀 있기에 대단치 않지만 평화로운 영지.
모든 것이 순풍을 단 듯 부드럽고 평화로웠다.
딸의 14살 생일 전까지.
딸에게 줄 생일선물을 가지고 몇 달 동안 이어진 상행에서 돌아오는 상단주.
이번에는 꽤 먼 곳의 귀족이 소유한 탄광과 계약을 체결했기에 마음도 여유로웠다.
천천히 가도 내일이면 도착하기에, 그는 딸이 생일선물을 받고 어떤 표정을 할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마차 행렬을 이끌었다.
그때 갑자기 드래곤이 나타났다.
상단주의 아내는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급히 가신들을 이끌고 연기가 난 곳으로 가 보았으나 남아있는 것은 재와 잔불뿐이었다.
그녀의 남편이었을 잿더미는 흔적도 없이 바스러져 구별할 수조차 없었다.
자연재해를 무슨 수로 멈추겠으며, 어떻게 복수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찢어지는 울분을 해소하지 못했고, 밀어닥친 슬픔에 기절해버렸다.
며칠이 지나서 깨어난 그녀는 술로 매일을 지새웠다.
하지만 원체 몸이 약했던 탓이었을까, 술에 뭔가가 들어있었던 걸까.
그녀는 날로 수척해지더니 몇 달 후 갑자기 급사해버리고 말았다.
어린 소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들었으나, 머리가 그 정보를 해석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저 마음이 공허한 게 갑자기 세상이 텅 빈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술로 매일을 보내며 수척해지는 것도 보았다.
사용인들이 하나씩 떠나는 것도 보았다.
아버지의 친척들이 찾아와 서로 다투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엇을 하지는 않았다.
소녀는 그저 멍하니 보기만 했다.
어머니의 관을 눈 앞에 두고서야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어린 소녀는 그저 비극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소녀에게 남겨진 재산은 이런저런 이유로 친척들의 손에 넘어갔다.
너무 어리다느니, 여자가 어떻게 가문을 가지느니...
소녀는 어린 마음에도 부모님의 유산을 애써 지켜보려 노력했지만
어느 날 밤 방에 복면을 두른 괴한이 침입해 그녀를 공격하자 그 마음도 꺾여버리고 말았다.
소녀는 겁이 많았으니까.
다행히 괴한은 겁만 주는 것이 목적이었던지 상처만 좀 내고 돌아가긴 했지만
소녀는 며칠 동안 무서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하지만 불행은 겹친다는 것일까.
괴한에게 입은 상처는 썩어들어가 결국 소녀는 다리 한쪽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고통과 두려움에 계속 덜덜 떨던 소녀는 결국 그녀는 친척들이 내세운 후견인에게 재산을 전부 맡긴다는 서류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명목상의 후견인은 소녀의 눈앞에서 방금까지 그녀의 것이었던 재산을 친척들에게 전부 나누어주었다.
상단, 영지,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까지.
이제 소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집도, 친구도, 영지도, 물론 가족도.
모든 것을 가문의 위광에 의지하며 살아온 그녀로써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친척들은 그녀를 죽이지 않았지만, 동전 한 푼 나눠주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먼 도시에 던져버렸을 뿐.
언뜻 보기에는 그저 풀어준 것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그녀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어린 소녀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잘 곳은커녕 당장 먹을 것도 부족한 이 상황에서 당연하게도 소녀는 일자리부터 찾으려 했다.
하지만 장애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그녀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굶어죽기 직전에 놓인 그녀는 구걸이라도 하며 돈을 벌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결국 쓰레기통을 뒤지며 간신히 끼니를 해결하는 그녀.
당연히, 집은 없다.
처음엔 길거리에서 노숙을 했지만 걷어차이지 않고 잠잘 수 있는 곳은 뒷골목 쓰레기통 옆뿐이었다.
고된 삶에 성문 밖으로 나가서 살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야생동물들에게 산 채로 뜯어먹히는 미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여름에는 그나마 살 수 있었지만, 겨울이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차디찬 한기는 누더기가 된 그녀의 옷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독감에 걸려도 약은커녕 따뜻한 물 한잔마저도 구할 수 없이 추위에 떨어야만 한다.
아픈 몸을 이끌고 쓰레기장을 뒤져 간신히 찾아낸 모포는, 몸을 완전히 덮을 수 없을만큼 작았고 추위를 막기에는 너무 앏았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그녀에겐 사치였다.
소녀는 간신히 몸에 한 겹 두른 모포를 꼭 잡고, 조금이나마 따뜻할 것 같은 종이쓰레기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고통과 피로가 사정없이 그녀를 갉아먹었지만, 소녀는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느꼈다.
지금 잠들면 두번 다시 눈을 뜨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너무 피곤하지만,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지만, 죽기 너무 무서웠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버텼다.
살아남기 위해서.
살갖을 에는 추위를 오기로 버텼다.
굶주린 배를 잊으려 흙도 퍼먹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녀는 현실을 애써 외면했다.
썩어가는 쓰레기 몇 개를 간신히 주워먹고
뒷골목 구석에서 잔뜩 웅크린 채 죽지 않기 위해 버티는 매일만이 이어져 있는 것을 애써 잊어버리고 소녀는 버텼다.
포기하는것이 더 편안할지라도.
삶에 행복은 없을지라도.
미래가 너무 어두워 보여도.
그녀는 살고 싶었다.
자살하기에는 너무 겁이 많았기에.
죽기 너무 무서웠기에.
악착같이 삶을 갈구했다.
그렇게 몇 년간 하수도에서 썩은 쥐 시체를 뜯어먹고, 차디찬 돌바닥에서 잠들었다.
몸도 다 가리지 못하는 넝마를 걸치고 누더기를 입은 채 하나밖에 없는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며 구걸에 나섰다.
냉대의 시선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못했다.
선심 쓰듯 던져지는 동전 몇 닢, 자그마한 빵쪼가리.
바닥에 떨어진 음식, 낡아서 버려진 천조각.
그녀는 이 모든 것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런 것에 상처입기에 그녀의 마음은 이미 누더기가 되었으니.
하지만 그런 그녀가 구걸을 하다 얼핏 본 풍경,
자신과 또래의 소녀가 제 부모님의 손을 꼭 잡고 행복하게 활짝 웃는 모습.
그것이 그녀는 너무나도 버티기 힘들어서,
토할 것 같은 입을 급히 틀어막고 뒷골목으로 도망치듯 넘어졌다.
더럽고 불결한 어둠 속.
며칠간 굶던 소녀는 텅 빈 뱃속에서 신내나는 노란 위액을 토했다.
너무 역겨웠다.
그 미소를 보던 자신이 너무 역겨웠다.
자신의 부모님이 생각났다.
자신의 침실이 생각났다.
매일 먹던 따끈한 음식이 생각났다.
당연하다는 듯 덮고 자던 푹신한 이불이 생각났다.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주던 여러 사용인들과 상단의 직원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이 생각났다.
애써 잊은 것들이 생각나버렸다.
겨우 적응한 것들을 되돌아보아버렸다.
‘어째서 이렇게 됐지? 대체 왜?’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로 흘리지 않던 눈물을 흘렸다.
몇 년 동안 흘리지 못했던 슬픔을 흘렸다.
쌓이고 쌓인 울분을 토했다.
원망을 외치고 한을 쥐어뜯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소녀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아다.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길바닥에서 뒹군다.
하루하루를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야 한다.
겨울이 오면 매일 목숨의 위협을 느낀다.
원한과 원망만 쌓이고 울분을 토해도 바뀌는 것은 하나 없다.
그녀는 다시 지팡이를 집어들고 구걸하러 거리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소녀는 너무나도 억울했다.
자신의 부모는, 집은 어디로 갔는가?
세상의 거의 모두가 당연한 듯 누리는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자신이 살던 과거는 어디로 가고 비참한 현재만이 남았는가?
미래를 생각할 권리조차도 현재에 빼앗겨버린 소녀는 물었다.
‘왜 이렇게 됐나요? 제 행복은 어디로 갔나요?’
소녀가 아무리 기도하고 외치며 간구해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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