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보면 알겠지만 오늘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임 

일단 조선시대 무덤하면 생각나는 건 다들 알겠지만 능들임

왕들이 묻힌 릉

그것이 조선시대의 무덤의 대표이자 동시에 초호화판이라 할 수 있음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무덤은 기본적으로 토광묘임 

쉽게 말해서 그냥 땅 파고 묻은 거라고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현재에도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방식이지 


어쨌거나 이런 토광묘 자체는 흔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선조들의 무덤들이 어떻게 도굴당하고 했는지 잘 알고 있음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은 유교사회고 유교사회에서 무덤은 아주 중요함. 조상에게 예를 다하는 게 유교의 기본 골자인데 본인 무덤 도굴 당하면 후손도 피꺼솟이고 묻힌 본인도 능욕당하는 판이니까 


일단 조선에서도 부장품을 넣는 풍습은 여전히 존재했음. 다만 본인이 기존에 쓰던 게 아니라 그걸 작게 미니어처화 시킨 걸 넣었지 

이유는 무덤 자체를 작게 간소화 했기 때문에 큰 부장품 넣기에는 공간이 애매했음. 넣으려면 따로 구덩이를 추가로 파야했고. 


여기에 더해서 조선은 무덤의 관리도 철저해야 한다는 게 기본이었기에 무덤이 훼손 되지 않길 원했음. 특히 양반가들은 더욱. 

다들 그렇잖아. 최근에도 조상님 무덤인데 무덤이 여러가지 이유로 훼손당하면 기분 골룸해지는 거 

나는 내 증조 할머니 무덤에 말법집이 생겼는데 어떤 땅꾼이 그거 그대로 채집해 가면서 무덤도 덩달아서 훼손된 걸 봤음 

지금도 그러는데 조선이야 안 그랬겠냐. 더군다나 무덤 도굴해서 부장품 팔아먹으려는 인간은 현재도 그렇지만 여전히 존재함. 


아무튼 이런 상황이다보니 조선의 양반과 왕들은 고민했음. 어떻게 하면 본인들 무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지. 그리고 본인 무덤과 관을 잘 온존시킬 수 있는 지. 그런 고민을 거듭하다가 나온 것이 회곽묘였음. 


회곽묘. 이건 간단하게 말하면 무덤을 극한으로 요새화 시키는 방식이었음. 


일단 먼저 사람 묻을 곳을 선정하고서 그곳에 구멍을 팜. 그리고 여기에 석실을 쌓고 그 중간에 숯가루를 덮음. 이렇게 함으로서 나무 뿌리와 개미와 같은 외부 자연요인으로 인한 무덤 훼손을 막을 수 있음. 

이런 상태에서 시신이 놓인 관을 그 석실에 놓은 다음에 석실 뚜껑을 덮고서 숯가루를 한 번 더 덮은 다음에 석회를 석실 주변에 왕창 뿌리고 그 위에 봉분을 만들면 끝임.

능은 여기에 더 나아가서 숯도 아주 체계적으로 쌓고 석실도 크고 탄탄하게 지으며 석회질을 엄청난 두께로 해놓음. 


글로 보기만 해도 알겠지만 여러모로 무덤 자체를 두꺼운 석회암으로 둘러싸 버리는 방식이었음. 그래서 조선시대 무덤들 특히 고위급 인사들의 무덤들을 발굴하면 미라가 나오는 이유도 관을 말 그대로 석회로 휘감아 버리기 때문에 시신이 썩기 전에 미라화 되어 버리는 거임 

여기에 더해서 도굴을 막기 위해서 석회로 아주 밀봉을 해놓는데 이 석회 두깨가 1m가 족히 넘어가는, 말이 석회지 그냥 콘크리트 떡칠을 해놓은 거라서 현대에서도 뚫기 진짜 더럽게 힘듬 

그래서 조선시대 왕릉들이 현재도 대부분이 멀쩡한 거임 

도굴을 하고 싶어도 석회로 떡칠을 해놓고 숯가루도 뭔 벽이 만들어 질 만큼 탄탄하게 쌓아놓았으며 석실도 단단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도굴 하다가 지쳐 쓰러질 판이었으니까 


근현대사에서 흥선대원군 관련한 이벤트 중 유명한 오페르트 도굴 사건에서 오페르트가 실패한 이유도 회곽묘라서 그럼 

간밤에 타임어택으로 두꺼운 콘크리트, 그것도 1m 이상의 두께의 콘크리트를 뚫고 관을 가져간다? 현대에도 힘든 짓이거든 

현대에도 회곽묘는 발굴 할 대 드릴을 동원함. 이래도 존나 뚫기 힘들거든. 실제로 회곽묘 뚫어서 발굴하는 작업 동영상 보면 뭔 석회 두께가 미쳐 돌아가는 걸 포크레인으로 겨우겨우 치우고 있는 걸 흔하게 볼 수 있음. 


하지만 이럼에도 진짜 근성으로 뚫은 경우가 딱 한 번 있는데 그게 성종의 묘인 성릉과 중종의 묘인 정릉이 도굴당한 거임 

근데 이것도 임진왜란의 혼란기에 근성으로 뚫어낸 거였음. 일반적으로 도굴은 몰래 해야 하는데 왕릉은 진짜 떡장갑 중의 떡장갑으로 단단하게 해서 몰래 도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거든. 근성의 일본군도 진짜 근성의 근성을 발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 

그래서 현재도 성릉과 정릉은 비어있음. 도굴당한 이후로 시신도 못찾았거든. 

범인도 제대로 못 찾아서 결국 유야무야 끝났고 


어쨌거나 그래서 현재도 조선은 기록도 존나 많지만 고고학적으로 그걸 확인하기도 참 쉬운 묘한 국가가 되었다 

무덤을 도굴하기에는 애초에 검소함을 미덕으로 생각한 유교 특성상 부장품이 특별하지도 않았고 도굴하기에는 더럽게 튼튼했기 때문임

가야, 신라, 백제의 왕릉들이 일제 강점기에 괴악하게 발굴이란 명목으로 실질적으로 도굴 당한 것에 비하면 진짜 잘 버틴 거지